[쪽글] 사랑과 폭력이 격렬하고 사랑스럽게 만날 때

지젝을 읽고 쓴 쪽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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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5. 목.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 정치학.
사랑과 폭력이 격렬하고 사랑스럽게 만날 때
-루인
폭력을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발터 벤야민의 논의를 따라가면, 폭력을 단일하고 명징한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으로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다. 폭력은 ‘우리’ 공동체의 외부에 존재하며 가끔 무질서하게 등장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법치국가, 그리고 전지구적 어떤 규율에 폭력이 내재하며 폭력은 질서 그 자체기도 하다. 동시에 폭력은 기존 질서를 내리치며 다른 가능성의 틈새를 여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폭력을 신비화하지 않고(26) 폭력의 다층적 측면(24)을 살피고자 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는 큰 틀에서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폭력의 복잡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폭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는 언어제 내재하는 상징적 폭력이다. 이것은 2장의 핵심 논의기도 한데, 이웃을 내 공포의 원인 혹은 공포 자체로 삼는 태도와 연결된다. 둘째는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 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24)인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에서 주의할 점은 기존 체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조와 질서 자체가 폭력이기도 하단 점을 지적한다. 지젝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묶어서 객관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셋째는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24)으로 여기는 주관적 폭력이다. 흔히 폭력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가장 근접한 형태로 기존의 질서와 상태를 위협한다고 인식하는 것을 지칭한다(24). 그리고 객관적 폭력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는데 주관적 폭력을 폭력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24).
지젝이 폭력을 이렇게 세분하는 이유는 폭력의 구조적 측면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폭력의 복잡한 층위를 인지하기 위해서다. 지젝이 1장에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비꼬는?) 이들은 주관적 폭력에 대항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주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주관적 폭력의 근간을 이루는 객관적 폭력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 그들은 (객관적)폭력의 생산 구조에서 이득을 보면서, 그리고 그 구조를 유지하면서 주관적 폭력만을 해소하려 한다. 혹은 스페인은 아프리카에선 인종/민족 배제적 정책을 위해 거대한 장벽을 설치하지만 유럽에선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151). 언제 어디서나 일관성 있게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스탈린과 그의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내며 수많은 폭력을 행사한 이들도 가족에겐 따뜻하고 훌륭한 아버지로 기억된다(82). 이것은 모순 같지만 모순이 아니다. 이것을 모순으로 느낀다면 이는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284)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순으로 이해한다면 폭력을 구조적이고 다층적으로 사유하기 힘들다. 모순 같지만 ‘자연스럽게’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 폭력이 실행되는 방법이다.
폭력의 복잡한 양상을 고민하는 지젝이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을 논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필연인지도 모른다. 지젝의 벤야민 논의 혹은 신적 폭력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랑과 폭력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우선 지젝은 신적 폭력을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277)으로 설명한다. 사랑을 설명하며 “순수한 폭력의 영역, 그러니까 법(합법적 힘) 바깥의 영역, 법제정적이지도 법보존적이지도 않은 이 폭력의 영역은 사랑의 영역”(281, 원문 강조)이라고 했다. 자신의 폭력 논의의 의의를 설명하면서는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284)고 말했다. 신적 폭력은 구조화된 사회적 질서의 외부에 있는 존재들의 어떤 실천이며, 그 존재가 머무는 곳은 사랑의 영역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신적 폭력은 사랑의 영역이자 사랑의 폭력이며, 사랑의 영역에서 신적 폭력이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이 사랑/폭력을 실행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해도 말이다.
사랑과 폭력의 관계를 다루는 지젝의 설명은 사랑을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실천이자 어떤 혁명적 가능성으로 해석할 여지를 만든다. 또한 사랑은 매우 폭력적인 개입 행위로 사유할 가능성도 생긴다. 지젝은 언어와 이웃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사랑을 잠시 언급하는데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93)고 했다. 사랑을 하는 행위가 사랑을 받는 사람에겐 폭력적일 수 있다는 지적은, 지젝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전유해서(혹은 오독해서) 사유할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젝이 사랑의 폭력적 가능성을 처음 지적한 것도 아니다. 마리아 루고네스를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가 지적했고, 근래엔 벨 훅스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사랑을 애정어린 그리고 깊숙한 개입으로 설명했다. 사랑은 단순히 연애 행위/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며 삶의 복잡한 측면을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며, 상대와 나의 변화를 야기하는 실천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며 둘이 그냥 만나는 행위가 아니라 내 삶의 근간과 네 삶의 근간이 모두 흔들리는 경험을 통해 서로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실천이다. 그리하여 나와 타인의 경계,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 우리와 그들, 이것은 내 문제고 저것은 네 문제라는 식의 구분을 허무는 실천이 사랑이다. 사랑의 정치에서 이웃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자 출처가 아니다.
신적 폭력이 사랑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사랑이 일종의 신적 폭력일 수 있다면, 사랑과 폭력의 개념 자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284)는 말처럼 폭력적 사랑, 사랑스런 폭력, 그리하여 사랑폭력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폭력은 비규범적 존재, 이른바 사회적 주변부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존재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삶의 다른 가능성/해석을 급진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라고 믿기에, 개념을 다시 사유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2014와 2015

일전에 스페인의 트랜스젠더 운동사를 요약한 논문을 읽었었다. 엄밀하게는 정치 제도화와 관련한 운동을 요약한 것이었다. 이제는 잔상만 남아 있어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기억을 더듬었을 때, 내가 깨달았던 건 다음과 같다.
ㄱ. 스페인(포괄적으로는 유럽)에서 LGBT/퀴어 이슈는 진보 거대 정당의 주요 의제며, 특히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법제화가 매우 중요한 의제다.
ㄴ. 정치권과 협업한다거나 법제화하는 작업은 취약할 수밖에 없는 방식의 운동인데 집권자나 집권 정당의 의중에 따라 좌우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LGBT/퀴어 이슈에 우호적 정치인이나 정당이 정권을 잡아서 어떤 긍정적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도 다음 선거에서 LGBT/퀴어에 부정적 정치인이나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폐기되거나 유명무실해지기 쉽다.
ㄴ은 내가 정치제도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함부로 바꿀 수 없거나(요즘 보면 그런 것도 없지만), LGBT/퀴어에 부정적 제도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LGBT/퀴어의 삶이 살만하고 안전한 삶일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사회적 분위기, 정동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정치제도화 운동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LGBT/퀴어 이슈를 둘러싼 화제나 논쟁은 정치권 혹은 정치제도화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혼자선 늘 갈등한다.
2014년을 돌이켜보면 한국 정치에서 LGBT/퀴어 이슈는 진보 정치의 의제가 아님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른바 진보연하는 정치인과 언론사가 LGBT/퀴어 혐오를 정당한 정치적 의견으로 승인하는 모습이 그랬다. 한겨레신문은 돈 앞에 굴복하며 LGBT/퀴어 혐오 발화를 하나의 의견, 팩트로서 ‘독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란 입장을 피력했다(이것을 ‘보편적 인권’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이 만든 효과 중 하나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박원순은 LGBT/퀴어 혐오 발화를 주도하는 일부 교회 목사들의 모임에 가서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비공개자료지만, 서울시 전체에서 서울시청 소속 공무원의 온라인 인권교육 참여율이 가장 낮다). 그리고 구청직원 모두에게 온라인 등의 인권교육 참여를 의무화한 성북구청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농담 반 진단 반으로 말하기를, 한국에서 동성애자, 더 정확하게 게이가 선거에 나와 당선되는 상징성을 가져갈 정당은 새누리당일 것이며 적어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아닐 것이다(후보로는 다른 정당에서 여럿 나왔다).
한국이 유럽 등 서구의 정치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평가해선 곤란하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다르고, LGBT/퀴어 관련 역사적 정치적 맥락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어떻게 할 때 LGBT/퀴어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삶으로 바꿀 수 있을까가 고민일 뿐이다.
2015년, 나는 아마 과거로 갈 것 같다. 누구도 상관없겠지만, 별 관심도 없겠지만 과거로 갈 예정이다. 당장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 같은 그런 과거로. 그런 와중에 아마도 외국에도 갔다 올 것 같고 혐오폭력, 증오범죄와 관련한 글도 쓸 것 같다. 늘 그렇듯 그냥 내키는 대로 살겠지. 어쨌거나 살아는 있겠지.

[쪽글] 비규범적 정치학의 ‘폭력적’ 실천을 위하여

수업 두 번째 쪽글입니다.
폭력 개념을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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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정치학.
비규범적 정치학의 ‘폭력적’ 실천을 위하여
-루인
벤야민, 발터. 「폭력비판을 위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서울: 길, 2008. 인쇄본.
6년 전인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매일매일 촛불을 든 집회가 열렸고, 어느 순간부터 경찰은 물대포와 체루액을 쏘는 등 ‘폭력’적으로 집회를 진압했다. 누군가가 주동한 집회는 아니었지만 법규를 지키면서 집회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공유한 태도였다. 그리고 경찰은 그 집회에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익히 알고 있듯 집회는 6월 10일, 절정에 이르렀다. 그날 아침부터 경찰은 세종로에 컨테이너를 쌓아 ‘명박산성’을 올렸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명박산성’은 당일 예고된 집회를 사전 차단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열릴 것이라고 예상되었기에 경찰의 진압 규모 역시 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명박산성’은 당일 예고된 집회, 그리고 당일 진행된 집회 자체를 막지 않았다. 거리엔 정말 많은 사람이 모였고 별다른 경찰의 저항 혹은 진압에 부딪히지 않으며 행진도 진행했다. 적어도 내가 참여했던 시간까지는 경찰과의 충돌이나 폭력적 진압은 없었다. 그리고 행진을 하면서 깨달았다. ‘명박산성’은 청와대로 가는 길을 차단하려는 목적이기보다 집회를 차단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음을. 그날의 집회와 행진은 컨테이너로 막아둔 길목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집회 자체를 차단하지는 않지만, 경찰 혹은 정부가 지정해준 장소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사람들은 집회를 진행하고 정부는 안전하게 남겨졌다. 혹은 사람들은 시위를 하고 정부는 시위대의 시선 밖으로 벗어났다.
답답했던 것은 일부가 ‘명박산성’을 넘으려고 시도했고, 청와대로 행진할 것을 제안했음에도 대다수가 ‘명박산성’을 넘지 말 것을 주장했고, 넘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모든 집회에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대응하며 ‘합법’적이고 ‘비폭력’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믿음이 강고했다는 점이다. 시위 참여자는 그 어떤 ‘폭력적’ 행동도 해서는 안 되고 ‘비폭력’으로 집회를 진행해야만 명분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로선 상당히 갑갑했다. 청와대로 향하길, 민란이나 혁명이 변하길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읽고 있으면 이런 현상은 마치 자연법과 실정법의 대립 혹은 얽힘, 법정립적 행동과 법보존적 행동의 대립 혹은 얽힘처럼 읽히기도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82). 즉 자연법은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 수단이 매우 폭력적일 수 있으며, 실정법은 수단이 정당하다면 목적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경찰은 자연법과 실정법 모두와 관련있고,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모두 실행한다(95).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정당하다고 믿었지만 실정법의 논리에 따라 수단의 정당성을 통해 목적의 정당성을, 혹은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정당성 모두를 주장하려 했다. 혹은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태도는 기존의 (실정)법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법보존적이었고, 정부가 주장하는 새로운 ‘법’이 아닌 다른 어떤 ‘법’을 정립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정부의 관점에선 이 모든 것이 법질서 혹은 정부라는 체제를 위협하는 폭력이었지만, 집회 참가자는 ‘비폭력’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태도가 조금은 갑갑했다.
사회의 저항운동이나 지배 규범을 문제 삼는 비규범적 정치가 갈수록 법의 테두리에서 폭력이라고 불릴만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루탄을 던지던 방식은 촛불 점화로 바뀌었고 거리 투쟁은 경찰과 모든 것을 조율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러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항으로서의 ‘폭력’, 정당한 대항 폭력마저 (부정적 의미에서의)‘폭력’으로 독해되고 있는 현재의 이해 방식이 고민이다. 노동조합의 ‘합법적’ 파업이 한국 사회의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심각한 폭력, 귀족 노조의 이권 다툼으로 인식되고 있다. 퀴어 정치학의 문제 의식이 불편을 야기하니 꺼내선 안 되는 언설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퀴어의 발언 자체가 폭력으로 명명되곤 한다. 이런 태도가 고민이다. 즉 폭력에 작동하는 권력 위계와 맥락이 사리지고 있는 현상이 고민이다. 벤야민은 법에 대한 비판이 “법질서 자체의 몸통과 사지를 반박하지 않고 개별적인 법률이나 법 관례들만 반박할 때” 이것은 “완전히 무력한 것”이라고 했다(93). 비슷하게 대항 행위나 저항 행위가 좀 더 강력하게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폭력적’이란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 즉 수단이 부당하면 목적도 부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한계에 갖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고민을 하곤 한다. 저항과 항거의 방식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문제제기마저 실정법의 한계 내에서 이루진다면 비판으로서의 힘을 잃는 것은 아닐는지.
이런 고민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구분하는 벤야민의 설명은 상당히 흥미롭다.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신들의 단순한 발현”, “신들의 존재의 발현”(107)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신화적 발현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직접적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과 … 동일한 것”(108)이며,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한 것”(110)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이 지적을 오독해서, 법, 국가 혹은 지배 규범이 그 자신의 존재와 정당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이 폭력라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은 지배 규범의 작동과 비규범적 정치의 대립 혹은 맞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신화적 폭력/지배 규범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비규범적 정치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지배 규범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비규범적 정치는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지배 규범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비규범적정치는 죄를 면해준다(111). 신화적 폭력-신적 폭력과 지배 규범-비규범적 정치를 등가로 설명하는 것엔 분명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모든 폭력을 등가로 사유하는 현재의 방식에서 폭력의 복잡한 결을 구분하는 사유는(지금 시대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또 다른 설명체계와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하게 사유할 측면이다. 무엇보다도 폭력이 폭력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112) 인간을 생명 이상으로(114) 이해하기 위한 어떤 ‘가능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저항 정치에서 폭력의 위상을 반드시 다시 사유해야 한다. 모든 폭력을 등가로 이해하는 현재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