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스페인의 트랜스젠더 운동사를 요약한 논문을 읽었었다. 엄밀하게는 정치 제도화와 관련한 운동을 요약한 것이었다. 이제는 잔상만 남아 있어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기억을 더듬었을 때, 내가 깨달았던 건 다음과 같다.
ㄱ. 스페인(포괄적으로는 유럽)에서 LGBT/퀴어 이슈는 진보 거대 정당의 주요 의제며, 특히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법제화가 매우 중요한 의제다.
ㄴ. 정치권과 협업한다거나 법제화하는 작업은 취약할 수밖에 없는 방식의 운동인데 집권자나 집권 정당의 의중에 따라 좌우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LGBT/퀴어 이슈에 우호적 정치인이나 정당이 정권을 잡아서 어떤 긍정적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도 다음 선거에서 LGBT/퀴어에 부정적 정치인이나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폐기되거나 유명무실해지기 쉽다.
ㄴ은 내가 정치제도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함부로 바꿀 수 없거나(요즘 보면 그런 것도 없지만), LGBT/퀴어에 부정적 제도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LGBT/퀴어의 삶이 살만하고 안전한 삶일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사회적 분위기, 정동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정치제도화 운동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LGBT/퀴어 이슈를 둘러싼 화제나 논쟁은 정치권 혹은 정치제도화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혼자선 늘 갈등한다.
2014년을 돌이켜보면 한국 정치에서 LGBT/퀴어 이슈는 진보 정치의 의제가 아님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른바 진보연하는 정치인과 언론사가 LGBT/퀴어 혐오를 정당한 정치적 의견으로 승인하는 모습이 그랬다. 한겨레신문은 돈 앞에 굴복하며 LGBT/퀴어 혐오 발화를 하나의 의견, 팩트로서 ‘독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란 입장을 피력했다(이것을 ‘보편적 인권’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이 만든 효과 중 하나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박원순은 LGBT/퀴어 혐오 발화를 주도하는 일부 교회 목사들의 모임에 가서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비공개자료지만, 서울시 전체에서 서울시청 소속 공무원의 온라인 인권교육 참여율이 가장 낮다). 그리고 구청직원 모두에게 온라인 등의 인권교육 참여를 의무화한 성북구청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농담 반 진단 반으로 말하기를, 한국에서 동성애자, 더 정확하게 게이가 선거에 나와 당선되는 상징성을 가져갈 정당은 새누리당일 것이며 적어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아닐 것이다(후보로는 다른 정당에서 여럿 나왔다).
한국이 유럽 등 서구의 정치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평가해선 곤란하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다르고, LGBT/퀴어 관련 역사적 정치적 맥락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어떻게 할 때 LGBT/퀴어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삶으로 바꿀 수 있을까가 고민일 뿐이다.
2015년, 나는 아마 과거로 갈 것 같다. 누구도 상관없겠지만, 별 관심도 없겠지만 과거로 갈 예정이다. 당장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 같은 그런 과거로. 그런 와중에 아마도 외국에도 갔다 올 것 같고 혐오폭력, 증오범죄와 관련한 글도 쓸 것 같다. 늘 그렇듯 그냥 내키는 대로 살겠지. 어쨌거나 살아는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