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저 사고였을 뿐>은 별다른 정보 없이 봤는데, 잘 만든 영화의 표본 같았다. 이란 독재 정권에서 고문피해자가 고문관을 만났을 때의 공포와 혼란, 그리고 분노가 영화 내내 흐르는 와중에 피해자의 윤리는 무엇인지를 질문하도록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목소리와 걸음걸이 등만 알 뿐이고 그래서 가해자-고문관을 죽이려 하지만 확신이 없기에 다른 피해자를 찾아간다. 다른 피해자는 극도로 분노하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가해자인지 확신할 수 없고 단편적 단서로 가해자라고 추정을 하면서도 동시에 고문관의 폭력으로 받은 피해로 계속해서 분노한다. 하지만 그 피해와 분노는 파트너에게 설명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가해자의 가족에게 전가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 영화의 중요한 질문이 등장하는데 나의 인생을 망친, 나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삶을 망친 가해자의 아이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가 죽어간다고 말을 한다면, 피해자인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아이와 가해자의 파트너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병원비를 미리 결제를 해야 할 때, 그 카드는 누구의 것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가해자의 파트너가 출산을 해서 축하를 해줘야 한다면, 피해자들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피해와 가해가 명확한 상황에서도, 예기치 않은 장면에서 피해자들은 어떻게 가해자와 똑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떤 판단과 결단을 해야 하고, 가해자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를 담아낸다. 그것이 동네 사람들에게 얼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어떤 종류의 망설임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피해자(당장 죽여버려야 한다는 입장부터, 한바탕 혼쭐을 내줘야 한다는 태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등)는 내 주변에 존재하는 지인들의 현실적인 반응이고, 내 안에 존재하는 복잡한 입장의 현존이다. 그래서 속이 터지고 모든 입장에 동조하며 모든 입장에 망설인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선택과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면 좋겠다는 바로 그 장면에서 영화는 끝났고 모든 질문은 관객, 혹은 피해자의 복잡한 이해 관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모든 사람에게 남겨진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연극으로 각색하기 참 좋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공간 사용과 인물 동선 등이 연극을 염두에 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도 공식 허가 없이 촬영을 했고 그래서 조심스러움과 간결한 작업이 필요했다고. 이 두 상황 사이의 유사성이 흥미로웠다.
02
며칠의 시차가 있었지만, <어쩔수가없다>는… 흠… 흐음… 어떤 의도인지 알겠고 무슨 장치인지도 알겠는데,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이 산만하다. 스토리를 단선적 시간의 틀에 맞추지 않도록 했다는 것은 알겠고, 그것을 해석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복잡한데도 정교하게 잘 만든 작품을 알고 있다(예를 들어, 얼마 전에 공연한 <퇴장하는 등장1>). 스토리를 익숙한 틀에 맞추지 않는 것과 이것이 산만해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데, 나는 좀 산만하게 느꼈다. 만수의 살인에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지 않고 개연성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영화 여기 저기에 분산시켜둔 단서들이 여기저기서 조각을 맞춰나가는 장면도 재밌다. 그럼에도 뭐랄까 집중력 있게 끌고가기보다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계속 전작 <헤어질 결심>이 떠오르며 <헤어질 결심>이 다시 보고 싶어지는 기분. 그럼에도 <복수는 나의 것>의 감성이 튀어나와 좋았고, 특유의 개그(?)에서 박장대소를 했고 묘하게 취향인 장면이 있었다.
암튼 이번 영화가 호불호가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알겠다.
+ 영화 <박쥐>를 안 봤는데 <박쥐>를 보면 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