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개가 된 사나히(2번째)

오늘, “벼개가 된 사나히”를 보며 불현듯 구자혜 연출의 공연이 전반적으로 그렇듯 이번 작품 또한 완벽하게 구축한 한 편의 시와 같다고 느꼈다. 뺄 것 없고 괜히 나온 장면이나 대사가 없으며 그냥 쓰는 무대가 없다. 모든 것이 한 편의 시처럼 어울린다. 아, 그래 이게 그동안 내가 구자혜 연출의 작품에서 느낀 공통된 느낌이었구나.

소년은 계속해서 남성성, 남성되기의 의미를 탐색한다. 삼마이, 니마이, 가다끼, 그리고 왕에 이르기 다양한 형태의 남성성을 탐색하고 그것에 내재하고 외재해는 모순과 의존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리하여 꿈에서, 왕과 벼개 사이의 이분법을 벗어나기 위한 고민과 괴로움을 계속 밀고 나간다. 그 모든 곳에 여역배우가 있고 그들은 남성성, 혹은 남역이 구성되는 방식을 명확히 지적한다. 남성성은 여성과의 관계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완성되지만 여성이 죽어 사라져야 그 성질이 완결된다. 여기에 2막 아랑애사가 중요하다. 피를 흘리며 죽은 시체, 여성을 존재로 다시 사유하는 태도. 그리하여 아랑애사는 어떤 의미에서 소년이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모색하고 변형하려는 남성성의 한 형태이자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남역배우라는 말은 남성성이 본질이기보다 계속해서 배우고 수행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압축한다.

무엇보다 이 극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비투비다. 남역배우되기와 비투비의 실천이 만드는 퀴어함이 또 다른 매력이며 모든 곳에서 모든 규범을 흔드는 꼬마의 역은 작품의 주제를 재현하는 핵심이다.

한 번 더 볼 예정인데 또 한 번 더 볼까 싶다. 진짜 정말 재밌다.

벼개가 된 사나히(고연옥/구자혜)

일요일에 ‘벼개가 된 사나히’를 관람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는데, 이 공연만이 아니라 내란 사태라 공연계의 타격이 크다는 말을 들었다… 얼른 내란 우두머리와 동조자들 모두를 잡아들여야 하는데 뭐하나 싶네.

암튼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공연 <벼개가 된 사나히>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국극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다. 여성국극과 관련한 논의가 나오던 초기에 읽었던 논의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기존의 전통과 규범, 통상적인 문법 등을 깨는 파격이 중요했다는 점이었다. 사회적, 기술적 변화가 있으면 그것을 적극 반영하며 여성국극을 계속해서 갱신했다는 논의는 여성국극을 누가 어떤 포인트에서 구성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형식과 입장으로 전개되겠구나 싶었다. 또한 사회적 고민과 질문을 어떤 식으로 여성국극에 담아내며 새로운 경로와 사회적 맥락에 닿을 것인가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정확하게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번 작품이 여성국극의 자기갱신을 치열하게 고민한 작업이라고 느꼈다.

일단 추가 2회를 더 예매했다. 언제나 그렇듯 구자혜 연출의 작업은 두세 번은 더 관람하고 싶은 매력이 있고 이번에도 그렇다. 무엇보다 국극 배우들의 소리가 좋아서 그냥 감상하고 싶기도 하고.

감기

이번 감기… 독하다는데 진짜 독하네요… 계획했던 많은 일정이 어그러졌고 가고 싶은 집회도 못 갔지만… 암튼 간신히 살아났다. 그 와중에 이무기 팀의 공연 다녀온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살짝 혼몽한 상태였음에도 매우 좋았다. 그나마 독감은 아니어서 다행인가…

그리고 요즘 상황에서 쓰고 싶은 글이 있지만, 먼저 메모만 남기면…

양비론은 가해자, 폭력범, 혹은 내란범에게 동조하는 일이지 공정한 행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양비론은 양쪽 입장을 공정하게 전달하는 행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적 지형을 뒤섞어 논쟁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게 한국 보수 혹은 극우 언론이 해온 일이고 이를 통해 민주당계 정치인을 악마로 만들어 진보 정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민정당계 독재/내란 세력을 유능한 인물로 포장한 방식이기도 했다. 또한 이런 양비론이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작동한 차별과 억압을 논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양비론을 멈췄으면.

어휴… 불법퀴어이론입문 업데이트해야하는데… 올해는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