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밥밥

요즘 먹고 있는 밥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건 밥솥을 열었을 때 모습.

이건 뒤집고 있는 모습.
쌀, 찰현미, 흑미, 병아리콩(이집트콩), 렌틸콩, 고구마가 들어갔습니다. 밥만 먹어도 맛있고 건강해질 것 같지요. 건강해지는 건 모르겠고 맛은 있어요. 렌틸콩과 병아리콩은 집 근처 마트에서 싸게 팔고 있어서 구매했고, 찰현미는 예전에 마트에서 공동구매로 싸게 팔았을 때 샀고, 흑미는… 어쩐지 흑미가 있더라고요. 콩밥을 먹을 때면 콩의 고소한 맛이 매력인데, 렌틸콩은 아무런 맛이 없고, 병아리콩도 특별히 튀는 맛은 없는 듯하네요. 역시 고구마가 들어가니 달콤하게 맛있어요. 고구마밥이 최고예요. 후후.
다음에도 이렇게 먹을 듯합니다. 일단 맛있거든요.

보리 고양이가 아프다 혹은 아팠다

보리가 아팠다. 혹은 보리가 아프다. 둘 중 하나만 적절한 표현이지만 둘 다 적절한 표현이다.
지난 월요일 오전 보리가 기운이 없었다. E가 오면 반갑게 맞이한 다음 뛰기 마련인데 그날은 그냥 상당히 얌전했다. 왜 그럴까 싶어 보리를 살피다가 오른쪽 눈이 이상하단 걸 발견했다. 눈 색깔이 상당히 탁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그냥 일시적 현상일까 하며 바로 병원 가길 망설였다. 잠시 지켜보는 게 좋을지 당장 병원에 가는 게 좋을지 망설이는데 E가 당장 병원에 가라고 해서 서둘러 보리를 납치해서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보리를 진료하는 의사는 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체온, 안압 등 기본 증상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 눈에 상처가 났는지 검사를 하는 등 몇 가지 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다시 나와서 상처는 아닌 듯하다며 피검사를 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할 것인지 내게 물었고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동의했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대기실에 앉아서 검색어를 입력했다. ‘고양이 전염성 복막염’ 몇 가지 검색 결과를 확인하며 의사가 했던 말, 행동의 의미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확진이 불가능하며 죽어 부검을 하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다는 기사, 습식이면 1~2주, 건식이면 1~2년이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였나. 의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변종에  따른 복막염을 의심한다고 했는데, 계속해서 확진은 불가능하기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단서가 될 법한 것을 검사하겠다고 했다. 정확하게 이런 이유로 몇 가지 가능성을 지워가는 방법을 택했고 피검사를 하는 것도 알부민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의사가 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구나.
중얼거리며, E와 행아웃을 하다가, 기다리는 동안 챙겨간 논문을 읽었다. 어쨌거나 아직은 확진이 아니니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검사를 하고 있는 거지 어떤 식으로건 확진을 한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나는 별일 아니기를 믿으며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의사가 나를 불렀다.
혈액검사 결과 평균치에 부합하지 않는 사항들이 있긴 하지만 평균치를 내면 일단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한숨이 나왔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눈물이 글썽였다. 사실, 무서웠다. 많이 무서웠다. 그래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혈액검사 결과로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일단 며칠 지켜보자고 했다. 일단 바이러스성 결막염을 의심하며 그에 따른 약을 처방하고 차도를 살펴본 다음 다시 검사를 하자고 했다.
집에 와서 안약과 구강약을 투여하며 간병을 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에선 조금 아리까리하다. 기운은 돌아와서 이젠 잘 뛰어 다닌다. 홍채 크기도 비슷하고 탁한 것도 없다. 그래서 다시 검사를 받았을 때 이제 괜찮은 것 같다며 닷새치 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종종 오른쪽 눈을 제대로 못 뜰 때가 있다. 이게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다. 계속 불안과 안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일단은 괜찮지만 더 지켜봐야 할 듯한 상태? 괜찮겠지?

발이 아파도 신을 신었지

10대 시절 내가 신을 운동화를 직접 사서 신은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가 아는 분이 신발공장을 했고, 그래서 가끔 상표도 알 수 없는 남는 신발을 선물 삼아 주시면 그 신발을 신었다. 그러니 이른바 캐릭터 신발이니 뭐니 하는 건 나와 별 상관 없는 일이었고 그런 상품을 신어보고 싶다는 바람도 갖지 않았다.
그렇게 새 신발이 들어오면 그걸 신어야 했는데 치수는 얼추 맞았음에도 나는 새 신을 신을 수가 없었다. 발에 안 맞았기 때문이다. 치수는 맞았다. 아니 어릴 땐 성장을 고려해서 신발을 크게 신어야 했기에 발가락에서도 한참 남았다. 그러니 발에 안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안 맞았다. 볼이 넓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신발을 구매할 때 볼 너비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땐 안 그랬다. 발가락을 눌렀을 때 많이 남는다면 그것은 내가 신기에 충분한 것이고 나는 신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발이 아팠고 부모님은 내가 신발을 신기 싫어서 엄살을 부린다며 혼을 냈고 때리기도 했다.
신발이 안 맞아서 아프다고 하면 맞는 신발로 바꿔 주는 게 ‘상식’ 같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환경에선 그게 상식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어릴 때 본가에선 내가 신을 신발을 직접 구매하는 일이 없었다. 그럴 경제적 여건도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 공장에서 남는 신발을 가져다 선물로 준다면 그걸 신어야만 했다. 그걸 신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만약 발이 아프면 그냥 참고 신다가 신발이 늘어나서 신을 만하면 그땐 편하게 신으면 되는 일이었다. 내겐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조금도 슬프게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그 시절을 그냥 살았고 내겐 당연한 일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환경에 유순해진 서글픈 현상으로 독해한다면 나로선 다소 당혹스러운데 이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신발에 구멍이 나거나 밑창이 떨어져도 새 신이 생길 때까진 그냥 신고 다녔는데, 이것 역시 나로선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에 좀 무덤한 성격이기도 하고 ‘아직은 신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랑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생각 난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에 여러 논평을 덧붙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뭐하나 싶어 다 지웠다. 그냥 내 어린 시절의 가벼운 경험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