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호소] 인권을 혐오하고 짓밟는 세력이 인권중심사람에 들어오는 것을 단 한 발자국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오후 2시라고 합니다.
저는 딱 그 시간이 수업시간이기도 하고, 수업을 대체하는 콜로키움이 진행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요.
콜로키움에선 밀양전 등 밀양 이슈를 다룰 예정입니다. 그래서 더 고민이고 선뜻 결정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일지…
다른 한편 서울시인권헌장 재정을 거부하는 일군의 무리도 인권을 주장합니다. 서로가 인권을 주장하며 싸우는 형국입니다. 인권이란 뭐죠? 그런데 다른 질문 하나. 트랜스젠더에겐 인권이 무슨 의미인가요? 트랜스젠더의 맥락에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권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요? 질문과 고민이 이어지는 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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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호소]
인권을 혐오하고 짓밟는 세력이
인권중심사람에 들어오는 것을 단 한 발자국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지난 11월20일 서울시민인권헌장 공청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은 공청회 진행 방해를 넘어 단상까지 점거하고 인권활동가들을 모욕했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인권 그 자체를 짓밟았습니다. 당일 사회를 맡은 박래군 인권중심사람 소장은 시작 전부터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사회자 교체 요구를 받았습니다. 공청회 진행을 위해 힘겹게 입장했지만 참석자들에게 멱살이 잡히고 “동생이 죽으면 다냐”는 막말을 들으며 위협 당했습니다. 공청회는 파행을 거듭하다 안전을 이유로 결국 취소되었습니다. 인권재단사람 활동가들은 인권이 짓밟히는 그 현장에 있었고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11월27일 2시 인권중심사람에선 서울시 시민보호관 주최로 2014년 시민인권보호관 제도의 평가와 발전방안 토론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공청회에서 마주했던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이 온다고 합니다. 섬돌향린교회와 한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며 피켓을 가지고 모이라고 호도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토론회를 무산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민인권보호관과 서울시인권헌장도 구분 못하는 무지함을 탓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권센터 내에 있는 풀 한포기, 벽돌 한 장이라도 훼손하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인권을 더럽혔던 그 입들이 인권중심사람에서 열리는 인권행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발언과 행동은 참지 않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이들에게 우리는 문을 열어줄 수 없습니다.
 
시민들의 인권센터, 인권중심사람을 운영하는 인권재단사람은 인권을 혐오하고 짓밟는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단 한 발자국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인권중심사람은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을 위한 공간이고, 지역주민들과 인권활동가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국가와 기업의 지원이 아니라 시민들의 모금, 인권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으로 세워졌습니다. 인권을 혐오하는 이들은 인권중심사람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인권중심사람은 다양한 인권행사들이 열리는 곳입니다. 인권재단사람은 인권중심사람을 운영하는 주체로서 시민과 인권을 잇는 그 어떤 행사라도 안정적으로 진행되도록 도움을 주고 협조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권센터 벽돌 한 장 쌓을 때마다 도움을 주었던 기부자들과 했던 약속입니다. 서울시민인권헌장 공청회처럼 인권이 묵살되지 않도록, 혐오와 폭력 앞에 인권이 좌절하지 않도록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인권활동가들과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인권중심사람이 인권을 혐오하고 훼손하는 세력에게 더럽혀지지 않도록 함께해주십시오.
 
2014.11.25
재단법인 인권재단 사람

맥이 빠지는 날

알바를 끝내고 귀가할 때면 맥이 빠지곤 한다. 내가 택한 일이다. 어쨌거나 내가 택한 일이다. 활동이나 공부와는 완전 별개인 일을 하겠노라고 결정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둘을 분리해서 살았다. 알바하는 곳에선 익명의 A로 지내고, 공부하고 활동하는 곳에선 무명의 누군가로. 생계가 공부나 활동과 긴밀할 때 받을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 둘을 분리해서 지내려고 했다. 무엇보다 알바에서 퇴근하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삶을 살았다. 둘은 어떻게든 영향을 주고 받지만, 퇴근하는 순간 알바에서 하는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는 삶. 참 괜찮았다. 하지만 알바가 끝나고 나면 맥이 빠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나 지금 뭐하고 있지? 공부하려고 알바를 시작했는데 알바가 주요 일과고 공부는 가끔하는 것 같다.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런 표현을 내 몸에 익히며 자랐다. 남의 돈을 버는 게 아니라고, 아니 이런 식의 표현 자체를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내 몸은 내가 체화한 이런 표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말로 인해 나는 늘 갈등하다. 내가 정당하게 받아야 하는 급여가 늦게 들어와서 이를 알릴 때도, 내가 미안해하고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빨리 처리하겠다고 답하면, 무려 고맙다고 반응한다. 젠장. 고맙기는 뭐가 고마워. 그 사람이 제때 처리를 안 하고 있는데 고맙다니. 심지어 내가 미안해 하며 말하다니. 아, 정말 기분이 더러워.
몇 년을 이러며 살고 있다. 내가 나를 부정하는 나날. 아니다. 내가 체화한 어떤 관습은 내가 정확하게 비판하는 규범인데, 이 둘이 내 몸에서 계속 부대끼고 경합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계속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매달 반복되는 스트레스. 그리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왜 내가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는 일에 쏟고 있지? 나는 지금 뭐하고 있지? 맥이 빠진다. 이렇게 맥이 빠지면 집에 와서 뭘 하기가 좀 힘들다. 어떤 날은 무엇이건 하지만, 어떤 날은 그냥 맥이 빠진 상태를 보듬으려고 그냥 멍하니 보낼 때도 많다.그러니 더 ‘나는 지금 뭐하고 있지?’란 고민을 자주 한다. 자꾸만 정체하는 느낌이다. 아니다. 계속 퇴보하거나 퇴행하는 느낌이다. 그냥 혼자 뒤처지는 느낌이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왜?

감정, 요동치는

자해충동이 잠잠해지면 자살충동이 격해진다고 했던가.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의 편지낭송회 행사에서 누군가가 쓴 편지의 일부다. 무력한 심정으로 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지. 자해충동이 잠잠하면 자살충동이 격해지고, 자살충동이 잠잠하면 자해충동이 격해진다. 둘이 동시에 작동하기보다는 교차하며 번갈아 강해지고 잠잠해진다. 참 이상하지. 아니 이상할 것도 없지. 자해충동은 삶의 욕구,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힘이니까.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기 위한 강렬한 힘이니까. 알잖아. 자해충동과 그에 따른 몸의 흔적은 살고자 하는 욕망, 결국 어떻게든 견디기 위한 어마한 힘이라는 것을. 그 힘이 어떤 순간을 견디게 하잖아. 그럼 자살충동은? 이것 역시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힘이라고 믿어. 살고 싶지 않음이라기보다는, 살려달라는 간절한 신호라기보다는 살고자 하는 어떤 박동이라고 믿어. 그저, 삶을 그만두고 싶은 욕망일 뿐. 그만 살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게 아니라 그만 살고 싶은 욕망 혹은 매혹적인 충동.

한동안, 일단 살자고, 살아가자고, 나이들어서 만나자고 말했어. 하지만 이젠 이런 말을 애써 하고 싶지 않아. 살건 살지 않건, 살아가길 선택하건 삶을 중단하길 선택하건 아무래도 좋아. 어떤 선택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 살지 말자고 권할 수는 없지만 죽은 사람도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라면, “일단 살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그냥 어떤 선택을 해도 좋아.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아. 어쨌거나 최선을 다 한 것이니까.

자해충동과 자살충동 혹은 삶을 중단하고 싶은 욕망. 어차피 이 욕망, 감정 혹은 충동은 쉽게 없어지진 않을 거야. 오래오래 지속되겠지. 괜찮다고 느꼈는데 어느 순간 다시 찾아올 거고. 어느 순간 다시 이 두 욕망 사이에서 요동치는 자신을, 이 두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깨닫겠지. 아무래도 좋아. 그냥 흔들릴 때는 흔들리는 것 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