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그를 통해 어떤 시대가 마감되었다고 평가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을 애도하는 언설일까, 그 사람의 상징성을 환기하는 언설일까? 다른 말로 한 사람의 삶이 특정 시대, 특정 세대의 아이콘으로 소비될 때 그 사람은 어디에 존재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상징성, 아이콘이 아닌 삶은 어디에 있고 또 어떻게 인식될까?
유명 연예인의 죽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알던 사람의 죽음과 그의 죽음이 애도되는 방식을 떠올리고 있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ㄱ의 죽음은 어떤 사람에겐 “이 나쁜 자식아, 도대체 왜 죽었느냐”로 애도되고, 다른 사람에겐 “우리의 중요한 역할모델이었는데”로 애도된다. 둘 다 진심을 다한 애도다. 하지만 ‘이 나쁜 자식아’와 ‘우리의 역할모델’은 전혀 다른 삶이고 모습이다. ㄱ은 이 역할모델이 부담스럽고, 역할모델이란 형식으로 소비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 수도 있다. 그럼 역할모델의 모습이 ㄱ과 무관한 것이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어떻게든 ㄱ을 경유하고 ㄱ의 삶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온전히 ㄱ의 책임이란 뜻이 아니다). ‘이 나쁜 자식아’란 애도 역시 ㄱ을 해석하는 방식이란 측면에서 둘은 그렇게 다르기만한 애도의 언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나쁜 자식아’에 비해 ‘역할모델’, ‘아이콘’과 같은 언설은 ㄱ의 죽음을 그리고 삶을 좀 더 건조하게 박제하거나 아무튼 뭐 그런 느낌이다. ‘우리의 역할모델’이나 ‘아이콘’엔 ㄱ의 구체적 삶은 잘 안 보인다는 느낌이랄까.
적어도 내게 있어 ‘역할모델’ 같은 언설은 수잔 스트라이커, 케이트 본스타인 같은 인물에게 쓸 법한 표현이다. 지혜 선생님, 석사 때 가르침을 준 내 선생님 등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여러 선생님은 내게 매우 중요하고 살아있는 역할모델이지만, 애도의 언설에서 ‘우리의 역할모델’이라고 말하진 않을 것 같다. 내가 ‘역할모델’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기에, 애도의 언설에 등장하는 ‘아이콘’, ‘우리의 역할모델’과 같은 말은 조금은 묘한 느낌이다. (다른 사람에겐 ‘이 나쁜 자식아’보다 ‘나의 역할모델’이 더 절절한 애도의 언설일 수 있다는 뜻이다.)
2년 전 이즈음 한무지의 죽음을 맞았다. 그 이후 가끔 그와 내가 맺었던 관계, 에피소드 등이 떠오르는데 솔직히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론의 언어로 외피를 포장하지 않으면서, 구체적 정황으로 그의 삶을 애도하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잘 안 된다. 한무지에게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어느 이른 아침부터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일, 생전 처음 트랜스젠더 모임에 나갔다가 그를 만났을 때의 인상 등을 말하고 싶지만 쉽지는 않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겠지. 언젠가 말할 수 있을까?
아무려나 무지의 2주기가 ‘조용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