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라면

날이 쌀쌀하니 어쩐지 대파라면을 먹고 싶었다. 대파라면은 몇 달 전 올리브쇼에 나온 남성렬 셰프의 레시피로 이미 꽤나 유명하더라. http://youtu.be/2ZACXiW5hro 나는 얼추 한 달 전 즈음 E가 알려줘서 봤었다. 채식으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여서 끌렸을 뿐만 아니라 짬뽕 느낌이라 좀 더 끌렸다. 짬뽕을 좋아하는 편인데 러빙헛이나 채식을 지원하는 중국집이 아니면 먹기 힘들어서 아쉬웠는데, 집에서 짬뽕 느낌을 낼 수 있다니 더 끌렸다.
그래서 당시 실제 만들어 먹었다. 짬뽕라면의 면을 사용하면 더 좋았겠지만, 채식라면으로 만들어도 나름 괜찮았다. 다만 기름을 많이 넣었는지 좀 느끼한 감이 있었고 물이 빨리 졸아서 아쉬웠달까. 하지만 만들기 간단한 라면은 아니어서 자주 해먹지는 않았다.
날이 좀 쌀쌀하니, 그리하여 몸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으니 다시 대파라면을 먹고 싶었다. 집 근처 가게에 파채를 팔아서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어 더 좋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대파라면을 만들어 먹었다. 지난 번엔 일반 채식라면을 이용했다면 이번엔 채식 칼국수라면을 사용했고, 페페론치니를 몇 개 넣었다. 결과는? 마음에 드는데 파채가 아쉬웠다. 지난 번엔 파를 E가 다듬어줬고 파채를 만들어 줬다. 그래서 파의 풍미가 풍부한 대파라면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미 만들어진 파채여서 그런지 풍미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역시 음식은 직접 손질을 해야 제맛이려나.
아무려나 대파라면의 레시피는 정말 좋다. 뭔가 다른 라면을 먹는 느낌인데다, 단순히 재료를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혀 다른 라면을 먹는 느낌이라 더 맘에 든다. 다음엔 파 대신 다른 야채로 만들어봐야지. 후후.

자료 찾는 요령을 익히기

학제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 특히 퀴어 이슈로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어떤 흥미로운 주제를 연구할까라는 기대로 주제를 묻곤 한다. 그리고 그 주제의 키워드, 사실상 알 수 있는 것은 키워드 정도인데 그 키워드를 듣고나면 다음날 거의 반드시 자료 검색을 한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인데, 내가 아직 공부를 못한 무궁무진한 분야에서 어떤 연구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렇기도 하고, 이런저런 괜찮(을 것만 같)은 자료가 나오면 그와 공유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꽤나 번거로운 일 같겠지만 타인의 연구주제, 사실상 한두 단어로 집약되는 주제어를 검색하면 이것만으로 상당한 공부가 된다. 그래봐야 제목과 때때로 초록을 읽는 수준이고 본문은 못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료 검색으로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수박 겉핥기 식의 어줍잖은 정보며, 그 주제를 전공할 사람의 지식과 고민엔 결코 비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어떤 흥미로운 연구가 전개되고 있는지, 어떤 키워드가 주로 쓰이는지 가늠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내게 무척 소중한 시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자료 검색을 연습하고 훈련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순간이다.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선 언제나 키워드를 선정하는 작업이 가장 어렵다. 키워드를 거르는 작업이 자료 검색의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주제에 맞는 키워드를 찾기가 가장 어렵다. 내가 아무리 오래 고민해도 내게 필요한 논문의 키워드를 찾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주제와 관련한 키워드를 찾는 건 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의 주제와 관련한 키워드를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일은, 결국 내가 나중에 내게 필요한 자료를 찾으려 할 때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어떤 요령이 생기니까. 이 요령을 익히는 작업이 무척 중요한데, 마구잡이로 자료를 검색하다보면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없는 어떤 요령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나는 오늘도 자료를 모으는 시간을 보냈다. 냐하하. ;;;

커밍아웃, 매우 짧은 메모

커밍아웃은 벽장에 있다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 혹은 커밍아웃하는 범주로 더 넓은 공동체에 속하는 작업인 것일까? 아니면 더 좁은 곳으로, 어느 좁디 좁은 벽장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정답은 없지만 때때로 커밍아웃은 더 좁은 벽장으로 이동하는 경험이지 않을까란 고민을 한다. 내가 하는 발화가 나를 규정하고 제한할 때 커밍아웃은 도대체 세상으로 들어감 혹은 나감, 더 넓은 관계로 확장됨 등으로 이야기하기 힘들지 않을까. 커밍아웃이 분명 기존의 관계맺깊자체를 새로운 틀로 재편하긴 하지만 넓고 좁음, 좋고 나쁨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까란 매우 짧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커밍아웃과 클로젯, 그리고 이들 모두의 장을 구성하는 두려움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면 뭔가 전혀 다른 논의와 상상력이 가능할 듯도 하다. 아직은 이런저런 망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