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블로깅. 매일 해야 할까

글을 쓰기 위해선 하루도 빠짐없이 한 문장이라도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배웠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도 며칠만 연습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눈치를 챈다고 했다지 않나. 나 같은 막귀야 일 년간 연습을 하지 않고 연주를 해도 차이를 모르겠지만(피아니스트는 슬프겠지ㅠㅠ) 아무려나 그렇다고 하더라. 마찬가지로 글도 매일매일 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배웠다. 이왕이면 길게, 길게 쓸 상황이 안 된다면 한 줄이라도, 한 문장이라도 어쨌거나 글을 쓰는 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공개용으로 쓰건 비공개용으로 쓰건 중요하지 않고 어쨌거나 매일 매일 쓰는 훈련. 하지만 별다른 쓸 거리가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블로깅을 매일 하다보면 정말 별다른 쓸거리가 없을 때가 있다. 어찌 고민이 없고 쓸거리가 없을까 싶긴 하다. 매일을 반복해도 어떻게든 쓸거리는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아직 공개용으로 쓸 수 없어 비공개용으로만 남아야 하고(내가 죽으면 구글계정에 영구히 보관되는 동시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사라지겠지.. 크크크. 옛날 어느 작가는 유언으로 이제까지 쓴 원고를 모두 태우라고 했다는데 클라우드 환경에서 글을 쓰는 나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 어떤 허접한 소리를 해도 비밀번호만 확실하게 보호되고 있다면 안전하다. 크크크.) 그러다 보면 딱히 다른 말을 쓸거리가 안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공개용으로 써야 할까?

글을 쓰는 훈련은 공개용이건 비공개용이건 중요하지 않다고 배웠다. 매일 꾸준히 쓰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너무도 자주 시덥잖은 블로깅만 하고 있는 나는 매일 블로깅을 하는 게 괜찮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홍보할 내용이 있으면 좋아라 하면서, ‘오늘은 이렇게 때웠어. 후후’하면서 매일 블로깅을 하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가끔은 잘 모르겠다 싶다.
(그리고 이렇게 오늘도 블로깅을 대충 때운다… 😛 )

상상적 지리학

자세히 밝히기엔 부끄러운 내용이라 생략하지만, 곰곰 고민하다가 홍콩의 우산 시위는 나의 퀴어한 삶과 실천을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막연하게 홍콩의 우산 시위를 이해하고 있었던 나의 태도가 부끄럽다.

E와 자주 하는 얘기인데, 퀴어 이슈를 주로 공부하는 나의 입장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미국이다. 상상적 지리, 익숙함의 지리로 이야기할 때 가장 가까운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을 지나가면 프랑스랑 영국이랑 독일이 살짝 보일듯 말듯 존재한다. 물리적 지리의 관점에서 매우 가까운 일본은 역사 이슈를 이야기할 때 주로 등장할 뿐이고 그외 다른 나라, 중국, 홍콩, 대만 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참, 웃긴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고. 미국에서 일어난 혐오폭력 사건이나 최근 퀴어 이슈, 트랜스젠더 이슈는 어렵지 않게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 현재 논의하고 있는 트랜스퀴어 이슈, 홍콩, 대만, 중국에서의 트랜스퀴어 이슈는 아예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 초,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전지구적 사건으로서 퀴어 혐오폭력을 다뤘는데 그때야 중국 등 미국 아닌 지역의 상황을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나의 상상력에서 한국은 지리적으로 어디에 존재할까? 왜 나는 홍콩이 나의 퀴어한 삶과 퀴어 실천에 있어 중요한 지역임을 뒤늦게 엉뚱한 일로 깨달은 것일까?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재현하기, 그 어려움

기사 링크: http://goo.gl/QVBKsD
탄압받는 이슬람권 트랜스젠더 “생지옥”
2014-09-30 10:54
[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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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구글플러스에 이슬람 문화권의 말레이시아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를 링크했다. 별다른 언급 없이 기사만 링크했는데 복잡한 마음이 들어 메모를 남기기 어려웠다.
그래, 세계 곳곳의 트랜스젠더는 어렵게 살고 있다. 어렵게 살고 있고 다양한 폭력을 겪으며 살고 있다. 폭력 피해 경험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기사는 어쩐지 쓸쓸하고 슬프고 분노를 야기한다. 하지만 또한 이 기사는 한국의 상황과 등치할 수 없고 나의 상황과도 등치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다. 나와 매우 밀접하면서도 또 나와 매우 다른 그런 관계를 나는 기사로, 접한다.
그런데 나는 이 기사가 편하지 않다. 어쩐지 이 기사는 ‘가난하고 덜 발달된’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반인권적 이슬람 문화’라는 인식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이슬람 문화의 말레이시아를 기술하는 방식은 고통과 폭력 피해, 인권 침해로 제한된 형태다. 이른바 제3세계를 재현하는 전형적 태도랄까. 단순히 이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 글엔 한국의 상황, 한국의 트랜스젠더와 말레이시아의 트랜스젠더 간 연결성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저 ‘야만적 이슬람 문화의 불쌍한 트랜스젠더’가 있을 뿐이다.
기사의 내용은 말레이시아의 트랜스젠더가 살아가는 삶의 극히 일부만을 포착했을 것이다. 여러 의미에서 그러한데, 폭력 피해 경험의 극히 일부만을 포착한 것이자, 말레이시아 트랜스젠더의 삶엔 폭력 피해가 전부가 아닌데도 마치 그것 뿐이란 것처럼 단편적 묘사만 존재한다. 물론 짧은 기사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까? 기사는 특징을 고려하면 일견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싶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있거나 납득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이 기사에 나타나는 태도는 한국의 트랜스젠더를 묘사할 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법과 제도에 있어 아무런 장치가 없어서 피해 받고 불쌍한 트랜스젠더라는 묘사는 한국에서도 매우 흔하다. 젠장. 법과 제도가 없는 것은 고통이나 피해의 이유가 아니다. 법과 제도가 삶을 구해주지도 않는다. 삶은, 특히 트랜스젠더의 삶의 많은 부분은 트랜스젠더 이슈에 특정한 법과 제도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여러 법이 있음에도 트랜스젠더에게 제대로 적용되지 않거나 트랜스젠더가 그 법의 예외로 구성되기 때문에 문제다.
타인의 삶, 고통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는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인데, 그래서 링크한 기사는 참 마음 복잡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기사의 기자보다 잘 쓸 수 있느냐면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다. 아마, 나 역시 이 기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글을 쓸 것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 이 기사를 읽으며 내가 불편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