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서 채식한다. 이것은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하는 언설인지도 모른다.
우유나 계란만 먹어도 먹을 게 엄청 늘어날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디 여행을 가도 좀 더 수월하고. 나도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과 계란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식습관을 바꾸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럼 그냥 간단하게 육류도 먹는 잡식을 하면 덜 귀찮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종종 반찬 만들어 먹기가 너무너무너무 귀찮고, 일주일치 반찬을 미리 만들어야 하는데(많은 경우 E가;;; ) 메뉴를 선택하는 일도 보통 번거로운 게 아니다. 육식을 한다면 그냥 참치캔이나 스팸으로 때울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거부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가 지속한 삶의 방식(이른바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정치적 이유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껠바사 터진 내가 그럴 리 없다. 말 그대로 귀찮아서 그런다. 식습관을 바꾼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삶의 양식 자체를 바꾸는 일과 같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신념이나 정치적 판단의 전환이 아니라 엄청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건 채식을 하고 있을 땐, 뭔가 찜찜하다 싶으면 아예 안 먹으면 된다. 그냥 그건 나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제품이나 계란을 추가해보라. 관련 성분이나 그런 걸 또 신경 써야 한다. 이것이 내가 먹기로 한 무언가의 부류에 속하는지, 내가 먹지 않기로 한 무언가의 부류에 속하는지 새롭게 배우고 가늠해야 한다. 이건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귀찮다. 그냥, 지금처럼 이상하다 싶으면 안 먹는 게 가장 쉽다. 그냥 내가 껠바사서 그런 것 뿐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늘어난다는 것, 먹지 않겠다고 선택한 항목이 줄어든다는 것은 덜 신경 쓰거나, 지금처럼 신경 쓰는 일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아예 다르게 신경 쓰는 일이다. 신경 쓰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다. 아, 상상만으로도 귀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