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고양이, 중성화수술

지난 달, 보리 중성화수술을 했다. 중성화수술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나는 득음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ㅠㅠ) 어디서 하느냐가 문제였다. 가급적 집 근처 병원을 고려했다. 보리가 예방접종을 한 병원이기도 하고, 집에서 가깝기도 해서 부담이 없다. 하지만 이 병원에서 중성화수술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중성화수술을 한 걸 보면 하루 정도 입원하거나, 몸에 붕대나 보호대를 감고 있거나, 목에 깔대기를 끼고 있거나. 덜덜덜. 만약 이런 식으로 수술을 한다면, 그래서 수술 후 재방문을 해야 한다면 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계획한 곳은 차지우동물병원이었다. 수술이 간단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기 12시간 전부터 굶기고 병원에 가서 간단한 상담 후 수술 15~20분, 그리고 귀가(사전 예약 필수). 이것이 끝이다. 귀가한 다음 항생제를 주고, 상태가 괜찮으면 굳이 안 줘도 괜찮다. 리카도 바람도 중성화는 모두 차지우동물병원에서 했다. 문제라면 집에서 너무 멀다. 이태원에 살 땐 약수역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고양시에서 약수까지 택시를 타기는 무척 애매했다. 지하철을 탈까? 이동시간이 도합 70-80분 가량이라 걱정이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믿을 수 있는 곳에 가야지.
지하철에서 보리는 의외로 조용했다. 물론 종종 낮게 야옹, 울었지만 지하철을 탈 수 없을 수준으로 울진 않았다. 고맙다, 보리야. ㅠㅠㅠ 하지만 가는 동안 보리에게 너무 미안해서, “가난해서 미안해”라고 중얼거렸다. 차가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 텐데… (가난과 상관없이 차는 안 살 거지만. 😛 ) 암튼 여러 번 미안함을 표현하며 병원에 갔고 수월하게 수술을 했다.
보리를 처음 본 의사의 평: 길쭉하니 늘씬하고, 엄청 발랄하고, 개냥이네.
선생님.. 정답!
보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뛰놀려고 애쓰다가 포기하곤 한참을 푹 쉬었다. 다만 의사가 6시간이 지난 다음에 밥을 주라고 했음에도 배고프다고 어찌나 울던지, 심지어 원망의 표정을 지어서 일찍 밥을 줬다. 그리곤 무척 잘 지내고 있다.
(오랜 만의 중성화라 의사가 설명해주길, 한두 번 토할 수도 있고 안 토할 수도 있다, 대략 1/3은 6시간 정도 지나면 밥을 먹고 1/3은 12시간 정도 지나면 밥을 먹고 나머지 1/3은 24시간 정도 지나면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보리는 5시간 정도 지났을 때 까득까드득 밥을 먹었다. 그것도 내가 일부러 늦게 줘서 그렇지 그보다 훨씬 빨리 밥을 먹었을 수도 있다. 토하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사소한 문제라면, 바람이 마치 처음 보는 고양이를 대하듯 보리를 대해서 당황했다. 냄새가 바뀌었나… 며칠 매우 적대적으로 대하더니 이젠 예전으로 돌아왔다.
큰 일도 치렀으니 무난하게 잘 지내는 일만 남았다. 늘 캐발랄하게!

티셔츠, 페디큐어

옷에다 온갖 변태 이야기를 적어봐야 가시성을 획득하거나 주변의 시선을 낚아채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페디큐어다. 지난 몇 년간 내가 퀴어(거나 퀴어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밝히는 옷을 입고 다니곤 했다. 그것이 아는 사람만 아는 기호여서 그런지 몰라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주변 사람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옷에다 내가 퀴어 혹은 트랜스젠더임을 확실하게 밝히는 문구를 적었다.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인지하는 수준에서 그렇다.
얼추 열흘 정도 전부터 페디큐어를 하고 조리를 신고 다녔다.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면 반응이 바로 왔다. 째려 보는 사람, 뭔가 낯선 것을 봤다는 듯 당황하는 사람, 이상한 걸 봤다는 듯 반응하는 사람 등. 반응은 무척 빠르게 그리고 자주 왔다.
재밌는 일이다. 티셔츠 전면에 적혀 있는 글씨는 안 읽지만 페디큐어는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 문자는 효과적인 매체가 아니란 뜻일까? 문자보다는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뜻일까? 문자보다, 티셔츠에 적은 문자보다 몸에 새긴 것이 더 효과적인 메시지라면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몸을 재현하는 방법은 나와 관련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메시지는 종종 나를 배신하지만 그럼에도 그 메시지를 어떻게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앞으로 매니큐어를 바를까 보다. 귀찮으니 조금만 더 고민하고 난 다음에.

번거로운 삶이야

비염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축복받은 삶이라고 고민하는 요즘이다. 혹은 비염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불편하고 또 불쌍한 삶이라고 구시렁거리는 요즘이다. 질병은 삶과 세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질병은 또한 고단하다. 피곤하다. 드러누워선 진정되길 바라는 것만이 거의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이건 좀 너무하잖아. 그렇다고 드러누워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잖아. 무언가는 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늘 충분하다. 시간이 부족할 뿐이고 내가 게으를 뿐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몸을 훈련하는데 맑은 코는 계속 줄줄 흐른다. 콧물꼭지가 터졌습니다… 불편해. 귀찮아. 번거로워.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비염은 그래서 예측할 수 없지만 언제든 터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 것을 요구한다. 번거로워. 정말 번거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