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자세, 글을 쓰는 자세

얼추 20년 만에 <소설 동의보감>을 읽었다. 어릴 때 재밌게 읽고 가끔 다시 읽고 싶었는데 어떻게 시간을 만들어 읽었다.

한 번 손에 잡으면 쭉 읽힌다는 점에서 일단 재밌다. 오래 전 읽었을 때와 같은 재미를 느낄까 싶었지만 이런저런 불만과 불편에도 이야기로서 재미가 있다. 허준이란 인간, 혹은 ‘사내대장부의 큰 뜻을 품은 인간’은 집안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조선시대 성별분업을 확인하는 재미도 있고.
하지만 읽으면서 허준의 태도를 글쓰는 사람의 태도,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로 생각하며 읽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때때로 좌절하고 손을 놓더라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 태도는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닌가. 비록 그것이 가사노동, 생계부양이라는 측면을 모두 면제받은 자의 행동이라고 해도, 기본 정신상태는 그렇다. 그러니까 허준에게 혹은 소설 속 허준에겐 ‘오늘 점심은 뭐 먹지?’라거나 ‘아우, 저녁에 청소하는 거 진짜 귀찮아’라거나 ‘내일 공과금 내야 하는데 통장 잔고가 괜찮나?’라는 식의 고민은 없다. 그냥 이런 모든 삶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단지 자신이 원하는 의학에만 힘을 쏟으면 된다. 하지만 또한 바로 그 태도, 의학이라는 학문, 자신이 원하는 영역을 애정하고 더 많이 알기 위해 탐문하는 태도는 분명 배워야 할 자세다.
특히 소설 후반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다른 무엇보다 기록물을 지고 가겠다는 태도는 퀴어락의 운영위원으로서도 배울 점이다.
그래서 (정확하게는 한 선생님과의 얘기를 나눈 뒤) 나는 당분간, 지금까지 약속한 원고를 제외하면 추가로 글을 더 쓰지 않기로 했다. 글을 쓴다 함은 안 쌓인 게 있어야 하는데 뭔가 텅빈 상태에서 관습적으로 쓰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재미가 없다. 아마 몇 년 간은 추가로 글을 더 쓰지 않겠지. 블로그도 당분간 천천히 글을 쓸까 했다. 하지만 블로그는 그냥 내 일상이니 사진 한두 장으로 때우더라도 유지하기로 했다.
어쩐지 부끄럽다.

뮤지컬 헤드윅에 헤드윅은 없고 김다현의 드립만 난무한다

뮤지컬 [헤드윅]을 어제 봤다. 영화 [헤드윅]은 무척 좋아하는데 어쩐지 뮤지컬은 관심을 안 두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뮤지컬을 봤다. 음…
그러니까 뮤지컬 [헤드윅]을 기대하고 갔는데 그냥 김다현쇼를 보고 왔다. 헤드윅이 경계에서 살아가는 복잡한 삶은 모두 휘발되고 내용과 아무 상관없는 애드립만 난무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헤드윅은 대학에 들어가는데 김다현이 나 대학 들어갔다고 하니까, 무슨 이유에선지 관객에선 ‘와아~’가 나왔고 이에 김다현은 ‘나 유니버서티..’라면서 뻘 드립을 날렸다. 그런데 이게 뭐가 재밌는지 관객의 일부는 좋아했고 이 뻘 드립으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면 영화에서 헤드윅이 칸트를 비판했다가 제적되는 일화가 나오는데, 뮤지컬에서 김다현은 MT 가서 선배에게 입을 맞추려는데 실패하고 그때 실패해서 6년 동안 키스를 못 한다는 식으로 때우고 만다. 도대체 왜 이런 뜬금없는 애드립이 나와야 하지?
이것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헤드윅이 등장할 부분. 헤드윅이 등장해야 할 그때, 배우 김다현이 등장해선 관객 일부와 적당한 농담따먹기를 했다. 딱 이 부분, 뮤지컬 도입부부터 벙쪘던 찰나다. 그리곤 계속 김다현쇼를 진행했다. 노래하다 말고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는데 어제 너무 더워서 모기에 피를 빨려 그렀다는 드립에.. 이런 모든 드립이 헤드윅의 범주를 세밀하게 설명해야 하는 그 찰나에 집중된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여준 헤드윅의 복잡한 삶은 뮤지컬에서 쓸데 없는 애드립으로 모두 휘발된다. 그냥 내용과 아무런 상관없는 애드립만 난무하고 그것으로 시간을 때운다.
그나마 위로는 이츠학 연기를 했던 서문탁. 영화에서 보던 이츠학의 표정을 서문탁은 체화해서 보여줬다. 그리고 노래는 정말 최고였다. 이츠학의 서문탁이 모든 노래를 다 살렸고 서문탁이 김다현을 철저하게 압도했다. 김다현의 유명세와 달리 노래가 별로였고 서문탁과 화음도 못 살려서 그냥 서문탁이 노래를 이끌고 가는 상황. 서문탁의 이츠학 보러 갔다는 느낌이다.
아무려나 다시는 [헤드윅] 뮤지컬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가사가 매우 중요한 데도 가사 전달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퀴어 작품을 보러 갔는데 퀴어인 관객이 소외당하는 이 상황을, 퀴어 관객이 봉변당하는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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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온전히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