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실라, 퀴어한 여행

어제 뮤지컬 <프리실라>를 봤다. 오오, 다 보고 나면 머리가 아프다. 두통이 인다. 돈이 아까워서? 시간이 아까워서? 아니. 공연 내내 흥분된 상태, 즐거운 상태로 있다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상의 감정으로 전환하려니 그게 쉽지 않아서. <프리실라>를 보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몸 상태가 별로였다. 나른하고 두통도 좀 있고 어지럽고. <프리실라>를 보는 동안엔 이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냥 즐거웠다.
줄거리는 검색하면 나오니까 생략하고, 작품을 내 방식으로 요약하면 ‘여행은 관계를 퀴어하게 바꾸는 시간’이면 되려나. 드랙퀸이라 아들을 만나지 못 하는 인물이 다른 드랙퀸 친구들과 아들이 사는 곳으로 공연을 하러 가는 과정을 다루는데 그 시간은 관계를 퀴어하게 바꾸는 시간이다. 특히 작품 말미, ‘부자 관계’의 ‘회복’ 혹은 ‘구성’은 이성애규범적 ‘부자관계’가 아니라 매우 퀴어하고 기이한 형태다.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는 짱 멋진 드랙퀸이고 할머니는 음경 제거 수술을 한 드랙퀸/트랜스젠더고 ‘약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고모도 드랙퀸이고. 가족 구조에서 이것을 안정화시키는 작업으로 독해될 수도 있지만 나는 가족 관계를 퀴어하게 비트는 것으로 읽었다.
아니아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재밌고 유쾌하다. 퀴어하게 재밌고 퀴어하게 유쾌하다. 이런 작품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볼거리가 워낙 화려하고 멋져서 그것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는 한 번 더 볼 예정이다.

골골거리는 시간

아침에 눈을 뜨고 바람을 찾은 다음 얼굴을 쓰다듬으면, 기분 좋은 바람은 골골거리며 얼굴을 여기저기 돌린다. 손으로 제 얼굴 구석구석을 쓰다듬어 달라는 뜻이다. 한참을 이렇게 쓰다듬고 또 긁어주면 바람의 얼굴 표정은 한결 더 너그럽고 순하다. 이럴 땐 보리가 올라와서 바람의 머리를 핥거나 킁킁거려도 화를 내지 않는다. 바람이 골골거리는 시간, 세상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 어쩐지 이런저런 근심걱정도 다 별것 아닌 것만 같은 시간. 이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분명 다행이다. 내 다른 삶이 어떻더라도 바람이 골골거리고 보리가 훌쩍 뛰는 찰나를 누릴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티셔츠!

일전에 티셔츠의 앞부분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좋은 공간이라고 적었다. 그 전엔 티셔츠를 간단하게 디자인할 수 있는 앱이 있다는 글도 적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티셔츠를 주문했다. 얼추 열흘 정도 지난 어제 티셔츠가 도착했다.
첫 번째는 이것.

This is AAA. Not Battery.
It’s Transgender Body Politics.
예전에 쓴 적 있다. AAA 사이즈 가슴은 트랜스젠더에게 흥미로운 몸 정치학이라고. 그래서 그것으로 살짝 장난친 티셔츠다. 컵 이미지는 구글링으로 구했고, 그래서 판매용으로 제작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사실 좀 더 재밌게 디자인하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점도 아쉽다.
두 번째는 이것.

그냥 퀴어와 관련한 여러 용어를 나열한 티셔츠다. 테스트 삼아 제작한다면 이것이 딱 좋겠다 싶었다. 색깔을 바꾸고, 용어를 추가해서 원한다면 추가 제작할 의향도 있고. 글씨가 약간 번졌지만 크게 무리는 없으며 프린트지만 세탁으로 지워질 성격의 프린트는 아니라 만족스럽다.
전반적으로 엄청 만족스럽지는 않다. 색깔이 복잡하면 조금 애매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꽤 만족스럽고 몇 벌 더 제작할 듯하다. 아마 앞으로 이곳에서 제작한 옷을 주로 입고 다니지 않을까 한다. 퀴어 용어를 나열한 티셔츠는 토요일에 프리실라 볼 예정인데, 그날 입고 가면 딱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