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한 문장: 퀴어문화축제, 한겨레21

루인, “춤추고 노래하는, 이것이 우리의 투쟁” 한겨레21 1018호.
나로선 놀랍게도 아직 한겨레21에 6주에 한 번 글을 연재하고 있다. 왜 놀랍냐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기획 자체는 무척 좋지만, 이것을 주간지에서 계속 끌고가느냐 중간에 자르느냐는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제한된 지면에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때론 좋은 기획도 금방 끝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보다 주간지 연재 혹은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삼는 잡지에 글을 쓰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은 내가, 심지어 글쓰기도 많이 서툰 내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처음엔 3회, 그 다음엔 5회를 한계로 잡았다. 그 정도가 되면 필진에서 짤릴 거라고 예상했다. 어찌된 일인지 아직은 글을 쓰고 있다. 이러다 1년을 채우나?
그럼에도 나는 처음 한두 번을 빼면 블로그에 연재와 관련한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남겨야 한다. 이번주 월요일에 출판된 글의 경우, 담당 기자에게 보낸 판본과 인쇄본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원고를 담당 기자에게 보낼 때부터 좀 불안했던 구절이 있었다. 그 구절이 나온다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그럴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나로선 정당한 구절이라고 믿지만 그럼에도 단지 그 한 구절로 인해 고소를 당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담당자에게 보냈다. 답장이 왔다. 그 구절과 관련한 내용을 자신이 모르고 있으며, 아무래도 문제가 될 것이라 수정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줬다.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처음엔 이름 정도만 수정했다. 담당자는 전체적으로 ‘수위’를 조절한 의견을 보내왔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은 주류 매체가 취해야 하는 조심스러움일 수도 있고, 어떤 한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담당자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수위를 조절한 내용으로 출판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이것은 잡지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판단이란 뜻이며 온전히 나의 책임이란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공적 문서에 기록되고 출판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음은 수정된 문장이다.
일부가 축제 및 영화제 전체 구성원과 논의도 없이 이름과 역사적 성과를 전유해 만든 서울LGBT영화제는 그냥 올해 처음 생긴 영화제다.
다음은 내가 처음에 보낸 문장이다.
김조광수 씨를 비롯한 일부가 축제 및 영화제 전체 구성원과의 논의도 없이 이름과 역사적 성과를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탈취해서 만든 서울LGBT영화제는 그냥 올해 처음 생긴 영화제다.
아시겠지만, 나로선 최대한 조심스럽고 또 수위를 낮춘 문장이다.

머리카락

머리를 자르지 않은 듯 자른 듯 자르지 않은 듯하게 머리를 잘랐다. 오랜 만에 머리카락을 자르러 갔다. 몇 년 간 한 군데를 다녔는데 너무 불친절했고 머리카락 모양에 일관성이 없었다. 지난 번처럼 잘라주세요, 했는데 지난 번과 다른 모양이다. 더군다나 같은 최근까지 내 머리카락을 잘라 준 미용사는 계속 내 머리카락을 ‘남자’스타일로 바꾸려고 했다. 같은 미용실의 이전 미용사(일이 있어 그만뒀다)는 딱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깔끔하게 잘라줬는데. 그래서 집 근처로 바꿨다. 그리고 만난 미용사는 어쩐지 부치 같은 느낌이지만 부치는 아닌 것 같은 그런 포스로 섬세하게 머리카락을 잘라줬다. 단발머리 느낌으로 잘라달라고 했지만 좀 과감하게 머리카락을 자른 것 빼면 괜찮았다. 그리고 어제 다시 그곳엘 갔는데, 에? 구성원이 달라서 가게는 두고 주인이 바뀌었나 싶었다. 나중에야 미용사만 바뀌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새로운 미용사에게 단발머리 스타일로 커트를 해달라고 했다. “이미 단발머리인데요?”하더니, 여기 조금 깨작, 저기 조금 깨작 자르더니 다 되었단다. 엥? 앞머리 좀 치고 옆머리랑 뒷머리 조금 친 것 말고 뭘 하셨지? 이런저런 머리모양을 테스트하기에 좋을 것 같아 그냥 넘어갔다. 그래봐야 결국 익숙한 루인 머리겠지만. 크. ;ㅅ;

그리고 나는 남자커트가 좋다. 더 싸다. 휴우.. 여자커트와 남자커트에 가격 차이가 있으니 앞으로도 더 남자커트를 할 거다. 머리카락 길이가 아니라 남바와 여자로 구분하다니 웃기지만 일단은 가격이 중요하다. 크.

퀴어를 진부하고 태만하게 전시하기

어제 입은 면티엔 “I AM QUEER. SO WHAT?”이 적혀 있다. 팔엔 “LOVE conquers HATE”이라고 적힌, 올해 퀴어문화축제에서 판매한 팔찌를 두르고 있다. 보조가방은 작년 퀴어영화제 가방이고, 그 가방엔 무지개를 든 안드로이드 뺏지(올해 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마련한 구글이 나눠준 것)가 달려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면티는 올해 구매한, 혹은 예전에 구매한 퀴어문화축제의 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아보는 사람은 이 물품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거나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 뿐이다. 아직 길에서 이것을 알아보고 시비를 건다거나 뭐라고 한 사람은 없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의 이런 물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해서 꼼꼼하게 읽는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알바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제까지 이것으로 질문한 사람은 없었다. (아, 태블릿에 끼우고 다니는 무지개는 알바하는 곳에서 한두 명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막 티내려고 애쓴다고 해도 이것은 충분히 의미있게 작용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이 입는 티나 물품에 크게 신경쓰지 않듯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나는 면티의 앞부분, 그 광활한 앞부분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좋은 공간이라고 믿는다. 디자인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공공연히 전시하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가. 나는 늘 개인이 소량으로 티를 손쉽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입금될 금액이 입금되면 나는 곧 스냅티에서 티셔츠를 주문할 예정이다.) 때론 이런 행동이 참 옛스럽기도 하다. 그냥 좀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느낄 때도 많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고리타분해도 이렇게 진부하고 태만한 방식이 나의 감성인 걸. 뭔가 폼나는 사람처럼 급진적이고 싶고 세련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태만함은 나의 감성이고, 그러니 결국 태만하게 살아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