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거리며

어제는 종일 빈둥거렸다. 아침에 늦잠을 잤다. 전날 만들어둔 파스타를 데워서 아침으로 먹고 식물과좀비를 잠깐 했다. 일정 레벨로 올라가자 더 이상 쉽게 진행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나는 그냥 게임을 중단했다. 같은 판을 서너 번 이상 하는 수준으로 바뀌면 게임을 중단한다. 그리고 급 흥미가 떨어진다. 아마 다시 안 하거나 다시 한다면 새 이름을 만들어서 1판부터 하겠지? 끝장을 보려고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긴장을 풀고 시간을 때우려고 게임을 하는데 애써 머리를 쓰고 싶진 않다. 그리곤 만화책을 읽었다. 일본 만화 라면/라멘(어쩐지 일본 라면은 라멘으로 불러야 할 것 같아, 라면은 한국의 봉지면 이미지가 엄청 강해서 구분하고 싶거든)인데, 아아, 역시 라면은 진리야. 내가 만약 채식을 안 했다면 난 정말 라멘 먹으러 일본에 갔거나 일주일에 두끼 이상은 일본 라멘을 먹었을 거야. E가 그랬지, 내가 채식을 해서 다행이라고. 크크크. 일요일이고 오랜 만에 휴식이라 점심도 면을 먹었다. 어제 점심부터 세 끼 연속 면이지만 괜찮아. 아니, 참 좋아. 내 위가 더 튼튼하다면 난 면을 좀 더 자주 먹겠지? 부가 수입이 생길 듯한데 입금되면 아이허브에서 마누카꿀이라도 사먹을까 하고 있다. 위에 그렇게 좋다는 말이 있어서. 마누카꿀 먹고 라면을 더 열심히 먹어야지. 우후후. 라면 좋아, 라면. 점심을 먹고 두통에 졸음으로 낮잠을 잤다. 얼마만의 낮잠이냐. 달고 또 개운했다. 일어나서 적당히 빈둥거리면서 어제 방영한 무도를 그냥 대충 넘겨만 봤다. 응원편은 재미가 없어서 그냥 대충 넘기고 있다. 그냥 멍때리면서 빈둥거리다가 저녁엔 대청소를 했다.

빈둥빈둥. 무슨 이런 걸 블로깅하나 싶지만 이런 생활이 필요하다. 확 풀어져선 그냥 멍때리며 지내는 삶이 내겐 중요하다. 퀴어 이론보다, 트랜스젠더 정치학보다 때론 멍때리며 빈둥거리고 대충 노닥거리는 시간,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하고 지냈냐고 물으면 어물어물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지만 그런 빈둥거림이 중요하다. 이것이 삶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힘이니까. 살면서 빈둥거리는 시간이 없다면 그건 무척 고단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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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제목을 ‘빈둥거림이 정치학’으로 썼는데 이게 뭔가 싶다. 그냥 빈둥거리면 그만이지 무슨 의미를 굳이 부여하려고 애쓰나 싶어서. 그저, 어제 하루 빈둥거렸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멋진 글을 썼다거나 흔히 말하는 생산적인 일을 했다는 것 말고, 그냥 빈둥거렸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무척 슬픈 일이지만 난 이게 자랑이다.



휴식

기말 끝내고 조금 정신 없는, 아니 일부러 정신줄을 좀 놓고 지내고 있다. 내 방식으로 쉬는 것이기도 하고 며칠 이렇게 쉬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정신줄을 놓고 헤벌레하고 지낸다. 몸 한 곳은 불안하다. 그래, 불안이 몸 한 곳에서 꿈틀거리면서 나를 압박하려 든다. 이렇게 쉬어도 괜찮은 걸까? 얼른 다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바로 이 불안을 그냥 품고 통과하기로 했다. 쉬기로 계획했는데, 그런데도 쉬는 시간이 불안하다면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것이란 느낌이다. 나는 왜 쉴 때도 불안할까. 할 일이 쌓여 있어서? 하지만 충분히 쉬지 않으면 나중엔 일 하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 그러니 일단은 그냥 쉬기로 했다. 그리고 E에게서 식물과좀비를 배웠다. PC 판 계정이 E에게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도록 이름을 하나 더 만들었다. 오늘도 나는 좀비와 놀러 가련다. 그냥 놀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근데 오늘 할 일이 좀 있는데?

바람, 더 보살 고양이. 보리, 더 개그냥.

보리와 바람의 관계는 참 재밌다.
며칠 전 밤을 새면서 글을 써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보리가 좀 많이 혼났다. 저녁에 간단하게 음식을 먹고 아침에 설거지하려고 물에 담궈만 뒀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는 사이 보리가 싱크대로 폴짝, 양념이 남아 있는 냄비에서 물을 할짝할짝.
보리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이~!!!!!!!!!
겁나게 혼나고 나서 보리는 기가 죽어있었지, 않았다. 보리, 더 개그냥 혹은 보리, 더 쿨냥은 혼나도 그방 또 우다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번 혼이 났다. 그런데 재밌는 건, 보리가 가까이 오면 그렇게 싫어하는 바람인데, 내가 보리를 많이 혼내자 보리 다독인다고 열심히 놀아주더라. 평소라면 놀아주지 않을 시간이디/ 일전에도 밤을 샜을 때 바람은 보리와 새벽에 놀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보리가 혼이 엄청 나자 챙겨주고 우다다 같이 놀아주고 그러더라.
아아, 바람은 보살이야. 바람, 더 보살. 바람이 비록 누굴 곁에 두는 성격이 아니라고 해도 보살은 보살이야.
그리고 여전히 싫어하고 피하고 그러지만, 놀 땐 둘이서 엄청 잘 논다. 보리가 바람을 쫓아가며 놀고 나면 그 다음엔 바람이 보리를 쫓아가며 노는 식이다. 다정한 바람,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도시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