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기독교는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친화적으로 만났는가.

눈을 뜨니 시간은 6시 25분.. 따악! 늦잠잤다. ㅠㅠㅠ
쪽글로 때웁니다. ㅠㅠㅠ
그리고 이 글의 첫 문단은 전면 비판받고 또 수정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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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월. 15:00- 쪽글
보수기독교는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친화적으로 만났는가.
-루인.
LGBT/퀴어 운동을 하면서 기독교를 보수기독교로 분명하게 구분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기독교는 내게 동질적 집단이었다. 다양한 경로로 접하는 목사나 기독교인의 혐오 발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와 보수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는 공공연한 언설을 기독교의 특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독교를 싸잡아 부르는 언설은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일단 그 자신을 LGBT/퀴어의 어느 범주로 설명하면서 기독교인이기도 한 사람은 기독교인을 싸잡아 비난하는 언설에 곤혹스러움을 느꼈고 종종 싸잡아 부르지 말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LGBT/퀴어 운동에 참여하는 집단엔 그 자신이 LGBT/퀴어건 아니건 상관없이 교회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 있다. 기독교엔 다양한 입장과 구성원이 존재한다는 건, LGBT/퀴어 운동에 있어 흔한 ‘사례’다. 그럼 질문하자. 기독교는 원래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 질서를 지지하는가? 아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보수적이며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떤 정치적, 사상적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와 한 몸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재현되는가? 제이슨 해크워쓰의 책 Faith Based는 바로 이 질문, 기독교와 신자유주의의 (어떤 의미에선 모순적)결합인 종교적 신자유주의를 탐문한다.
해크워쓰에 따르면 보수기독교와 신자유주의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수사 혹은 서사는 ‘정부의 실패’다(9). 정부는 효율적으로 공공자원을 제공하지 못 했고, 비효율적 방법으로 정부를 운영하고, 시장을 왜곡하는 등으로 실패했고, 이에 해답은 사유화라고 세속 경제학은 주장했다. 정부의 실패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 중반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의 재부상, 자유주의 경제학을 근간으로 하는 강력한 세계적 경제기구의 설립 등과 관련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더욱 강력하게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칼뱅주의 윤리 및 복음주의와 만나면서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칼뱅주의는 18-19세기에 이미 고전적 자유주의를 적극 지지했었다(13). 이때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한데, 이것이 빈곤을 이해하는 태도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윤리에 따르면 빈곤은 원죄를 처벌하는 신의 행위며,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 빈곤은 시장 경제의 ‘자연스런’ 특징이다(14). 다른 말로 복음주의 기독교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빈곤을 이해하는 태도는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정책적 함의는 동일하며 이 지점에서 둘은 결합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듯,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만난다는 점에서, 종교적 신자유주의는 내적 모순, 내적 복잡함을 내재한다(14).
물론 모든 복음주의 기독교, 혹은 기독교가 보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보수 기독교 내에서도 다른 의견이 많고, 좌파 지향의 입장이 있으며, 종교 기관 내 ‘다른’ 목소리가 주류 목소리에 흔들리지는 않는다(15-16). 하지만 주류 목소리 혹은 보수 기독교는 1980년대와 2000년대 보수 정권에 주요한 목소리를 내면서(예를 들어 보수 기독교의 주요 목소리 중 한 명인 마빈 올라스키는 2000년대 부시 행정부에 직접 참여했다) 미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보수 기독교는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가. 해크워쓰는 종교적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세 분파를 분석하면서 보수 기독교와 신자유주의가 사상적으로 결합하는 방식과 그 차이를 탐문한다. 첫째, 가장 극단적 형태를 취하는 주권신학(dominionism)은 인간이 신의 명령으로 지구를 지배할 것이라는 창세기를 근간으로 한다(32-36). 신이 재림하기 전 1,000년 간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믿음은 세속 정부를 혐오하도록 하고, 기독교인이 정부를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가 정치에 개입할 근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세속 정부를 반대하는 반국가주의, 개인주의를 찬성할 근거가 된다. 주권신학을 믿는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고 해도, 보수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둘째, 기독 자유주의(christian libertarianism)는 보수기독교와 세속적 자유주의를 병렬적으로 통합하는 조직이다(36-40).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요한 복음서를 근간으로 하는 이 분파의 자유는 엄밀하게 말해 성경 안에서의 자유를 뜻한다.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하기 힘든 정치적 지형을 구성하고 때로 서로는 서로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 종교적 자유, 가족을 파괴하는 복지 체제 반대, 개인화 지지 등을 공유하는 태도는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마빈 올라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이 분파는 운동을 야기하지 않았음에도 공화당의 주요 정치인, 특히 부시 대통령과 직접 교류하고 영향을 주면서 가장 실질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와 기독교를 가징 실질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셋째, 번영 신학(prosperity theology)은 신은 인간의 번영을 원하고 교회에 많은 헌금을 중시한다(40-45). 성서의 몇 개 구절을 주로 인용하는 이 분파는 가장 많은 비판을 듣고 있지만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 세 개가 이 분파를 지지한다. 번영 신학은 부의 축적을 이룬 이들을 위로하고 빈곤을 개선하는데 집중하지 않는 태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깊이와 부의 축적을 비례 관계로 설명하는데 이 입장은 신자유주의, 그리고 칼뱅주의와 가장 잘 만난다. 번영 신학의 맥락에서 빈곤은 신앙의 부족을 뜻하며, 개인 노력의 부족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이나 빈곤은 신의 정당한 처벌로 이해되고, 이 태도는 복지가 필요하지 않다는 신자유주의적 태도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보수 기독교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은 신자유주의가 팽창하고 일상 생활에 깊숙히 스며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크워쓰가 지적하듯, 신자유주의는 그 자체로는 성공하기 힘들며 다른 관념과 결합할 때 성공할 수 있다(46). 그리고 미국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세 분파는 신자유주의를 종교적 정서로 받아들이고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은 정확하게 종교적 신자유주의가 결코 동일한 정치적 지형에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성경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태도는 종교적 신자유주의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며 내적 모순을 야기할 가능성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복음주의와 사회 복지를 둘러싼 태도에서 더 두드러진다.
타인을 보살피는 복지는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일종의 정체성과도 같은 지점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수 신자유주의와 결합할 때 정부의 복지를 없애야 한다는 태도로 변한다. 그렇다면 복지에 정부가 개입하는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크워쓰는 이 두 태도를 미복음주의연합(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과 기독일보(Christianity Today)를 분석하며 설명한다. 미복음주의연합은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고 세속 정부의 개입에 상당한 불편을 느낀다(52). 하지만 FBO(faith-based organization)에서 실제 활동하는 활동가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없다면 안정적 복지 정책을 지속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정부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기독일보의 복지와 관련한 기사는 일관성이 없으며, 대체로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는 복지 실천을 지향하지만 기사에 따라 정부 기금과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복지를 지지하기도 한다(물론 이 기사엔 반론을 제기하는 독자투고가 실린다). 복음주의 기독교 내부의 이런 복잡한 입장과 태도는 피상적으로 작은 정부, 시장 친화적 정책, 개인화 등을 적극 지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와 보수기독교의 결합은 왜 일부 기독교가 보수 정권을 지지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한국처럼 기독교 윤리가 사회적 태도가 아닌 상황에서 둘의 만남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 미국처럼 기독교 윤리가 사회적 태도가 아니란 점은 해쓰워크의 주장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을 만들기도 한다. 보수기독교를 믿는 정치인은 보수기독교 친화적 태도의 발언과 정책을 지지하고(이것은 정당에 상관없다) 많은 ‘네티즌’ 혹은 시민은 이를 비판한다. 즉, 정치인과 (비기독교 혹은 비보수주의기독교)시민 사이엔 어떤 친화적 태도, 정서적 공유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보수기독교의 신자유주의적 태도는 정치와 강하게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보수기독교가 신자유주의, 보수정당과 결탁하는 양상이 미국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암시한다(미국 맥락의 분석이 한국에 그대로 쓰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즉 반동성애와 함께 반북(혹은 북한인권)을 더 자주 주장하는 언설을 통해 북한을 매개로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기독교가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트랜스젠더를 쉽게 설명하기

-3쪽에 걸쳐 트랜스젠더를 정말 쉽게 설명하는 글을 썼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이 글을 공들여 썼지만 폐기하기로 결정해서다. 하지만 그냥 버리긴 또 아쉬운 게 사람의 마음. 그래서 그 글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고 있다. 백과사전에 사용하기엔 그 설명이 너무 쉬워서 곤란하다. 그렇다고 다른 데 추가하기에도 애매하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엔 너무 길다. 😛 그래서 고민, 고민.
-그냥 폐기하진 않겠지만 글을 읽고 논평을 준 사람의 공통 반응은 정말 쉽다였다. 기쁘다. 쉽게, 더 쉽게 쓰면서도 내가 지향하는 정치학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데, 일단 쉽다는 점엔 성공했다. 아, 물론 쉽다고 논평을 준 사람이 트랜스젠더에 어느 정도 감이 있는 사람이고 퀴어 이슈를 공부하는 사람이란 게 함정. 흐흐흐. ㅠㅠㅠ 그래도 이제까지 쓴 글 중에서 가장 쉽다는 평을 들어서 기뻤다.
-그 글을 쓸 때 내가 독자로 상정한 사람이 있다. 이태원 연구를 하며 만난,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트랜스젠더다. 그 당시 나는 내가 공부하는 지식을 공유하지 못 했다. 공유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설명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매우 자주 그때 만난 트랜스젠더를 떠올리며 그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싶어 한다. 물론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때 만난 그들은 나의 환상에나 존재하지 실존이 아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독자로 삼는 사람이 누군지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쉽게 쓰기 위해서 내가 주로 사용하는 언어도 다 버렸다. 내 글에선 거의 반드시 사용하는 핵심 용어가 있기 마련이데 그것을 단 하나도 안 썼다. 우후후. 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험할 가치는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어느 중간 지점을 찾으면 되니까.
-그리고 쉽게 쓰는 작업이 어렵지만 동시에 재밌다. 문제는 다시 학술적 글쓰기를 잊으면 안 되는데… 이 부분이 걱정이다. 끄응.

막판 스퍼트!

헥헥헥…
학기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 내일 페이퍼 마감 하나. 수요일 페이퍼 마감 하나. 목요일(이겠지? ㅠㅠ) 원고 마감 하나. 그리고 방학이다!!! 으하하 방학이다… ㅠㅠㅠ
방학하면, 언제나 그렇듯 방학이 아니지. 또 다른 일을 몰아서 하는 시기지. 그래도 일단 방학을 했으니 일주일 정도는 그냥 놀거야. 놀거야. 놀거라고.
원고 일정만 따지면 작년보다 올해가 훨씬 여유로운데도 이상하지, 올해가 더 버겁다. 더 빠듯하고. 심리적인 문제일까? 뭐,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건 일단 올해 목표는 무사히 살아 남는 것이었고 이번 학기도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