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다르게 상상하는 힘

수업 시간에 쓴 쪽글로 대충.. ^^:
===
2014.04.20.일. 쪽글02
미래를 다르게 상상하는 힘
-루인
사회적 타자 혹은 비규범적 존재로 구성되는 집단은 지배적 재현 체계에서 언제나 특정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를 향한 인상과 성격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간이 흘러도 특정 이미지에 고착된다는 것, 이미지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삶 자체가 그 이미지로 이해된다는 것은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와 시간성의 관계를 질문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성이 존재를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를 구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짐작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질문하기를,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는 자신의 시간성을 갖거나 시간성이 존재하는가? 사회적 타자나 비규범적 존재는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규범과 시간성, 그리고 타자의 ‘발명’ 혹은 재현의 관계를 탐문하도록 한다.
요하네스 파비안(Johannes Fabian)은 시간/성 개념의 변화가 타자를 어떻게 출현시켰는지를 탐문한다. 파비안에 따르면 신에게 의미 있던 시간이 세속화되면서 시간은 측정할 수 있는 것, 중립적인 것으로 변했고 한 사회의 의미 체게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13). 시간이 사회적 의미 체계에서 벗어남은 특정 지역에 따라 시간이 다른 의미를 가짐이 아니라 지역이나 시대에 무관하게 동질한 값을 지님을 뜻한다. 이것은 시간성의 보편화를 뜻하는 동시에 모든 지역의 시간을 등가의 가치로 평가함을 뜻하기도 한다(16-17). 시간이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면 그리하여 가치 중립의 측정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시간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고 시간은 다른 사람/문화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이렇게 발달한 문명에서 살고 있는데 ‘너네’는 왜 그렇게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평가가 식민주의-제국주의 인식론을 함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시간/성을 성찰하지 않을 때 너무도 쉽게 할 수 있는 언설인 동시에 시간성이 타자를 ‘발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간성 개념이 타자를 ‘출현’시킨다는 파비안의 논의는 지금 시점에서도 유의미하다. 지금도 사회적 타자 혹은 비규범적 존재는 시간성 개념에서 타자성이 ‘발명’되고 규정되고 (재)강화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질적 시간성, 단 하나의 시간 가치를 산다고/살아야 한다고 기대할 때, 그 기준에 맞춰 살지 않는 존재는 다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적어도 두 개의 시간, 이 사회가 특정 나이와 젠더에 요구하는 지배 규범적 시간과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하는 시간을 모두 살아야 하는 트랜스젠더는 동시에 두 개의 시간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규범적 시간을 어느 정도 맞추려면 트랜스젠더의 시간을 살기가 어렵고, 트랜스젠더의 시간을 살고자 하면 규범적 시간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두 개의 시간이 모순이기에 결코 병행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비규범적 존재가 아닌 존재라면 지배 규범적 시간을 완벽하게 체화하며 살기 때문도 아니다. 누구도 지배 규범적 시간을 완벽하게 체화하며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 두 개의 시간성이 다른 위계적 가치를 지니면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 규범적 존재가 비규범적 존재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때에 있어서는 지배 규범적 존재는 지배 규범적 시간성을 살아간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트랜스젠더의 시간성 개념에서 트랜스젠더는 비트랜스젠더의 시간 발달 기준에도, 트랜스젠더의 ‘지배적 재현 이미지’에 부합해야 하는 시간 발달 기준에도 모두 부족한 존재다. 시간을 자연화하고 동질의 가치로 여기는 인식론에서 트랜스젠더는 언제나 타자일 수밖에 없고 열악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불행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시간 자체가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등가의 시간 가치로 모두를 판단하는 인식론은 미래를 상상하고 전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빈칸 아담스 등(Vincanne Adams et al.)과 카렌-슈 타우식 등(Karen-Sue Taussig et al.)이 지적하고 있듯, 전망이나 기대, 잠재성이나 가능성과 같이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는 언설은 모두 현재의 가치 체계에 따른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아담스 등은 기대/전망(anticipation)이 미래를 현재의 데이터로 예측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현재 대비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것은 또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담는 것이자 불안을 최소화하고 희망을 최대화하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타우식 등은 잠재성(potentiality)이란 용어가 시대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변화함을 지적하며 잠재성에 내재한 미래 시간이 현재의 가치 판단에 따른 것임을 지적한다. 두 논의의 지적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미래라는 시간을 상상할 때 언제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이다. 또한 기대/예상이나 잠재성이란 용어로 미래를 상상할 때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행동이란 지적이다(Taussig et al., S6). 이 두 지적은 비규범적 존재나 사회적 타자가 제기하는 많은 정치적 논의가 시간성을 둘러싼 논쟁,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을 둘러싼 논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를 둘러싼 일군의 긍적적/정당화 언설은 그것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이란 전망이며, 부정적 반응은 일찍 죽을 수 있다는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예상이다. 아울러 인터섹스 유아에게 외성기 ‘교정’ 수술을 강제하는 의사는 이 수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행복한 이성애자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언설로 부모를 설득한다. 각각의 발언은 모두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의 미래를 ‘걱정’하는 ‘선한’ 마음의 표현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각 발언은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의 행복한 미래의 형식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모두 현재의 가치를 밑절미 삼아 미래를 규정한다. 트랜스젠더가 원해서 의료적 조치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삶을 행복하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터섹스가 수술을 해야만 ‘행복한 이성애자가 된다’는 언설은 미래의 가치가 아니라 철저하게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지배 규범 삼는 현재 상황에 근거한(혹은 의사 개인의 가치 판단에 따른) 판단이다. 그렇기에 미래를 예상하거나 어떤 잠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재의 사회적 가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비규범적 존재나 사회적 타자를 판단하는 인식이 미래 예상이나 잠재성의 내용을 규정한다.
시간성이 ‘타자’를 생산하고 현재 삶을 가치 판단하고 미래를 상상하도록 하는 중요한 논쟁 지대라면, 우리는 시간성을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힘, 그리하여 지금 현재를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시간성을 상상한다고 지금 현재 지배적 힘을 갖는 시간성이 무화되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간성을 상상한다는 건, 지배 규범적 시간성이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고 상대화하는 작업이며 이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어갈 중요한 토대 중 하나기 때문이다.

패션잡지 66100, Fat Studies, 뚱뚱함/비만의 인식론.

경향신문 구글플러스 계정에서 다음의 기사 소개를 읽었다.
“사실 아름다움에 있어서 중요한 건 살이 찌고 안 찌고는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예쁘다는 걸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문제죠.” 큰 체형의 여성을 위한 특별한 패션잡지를 만든 김지양씨 인터뷰. http://goo.gl/DGs0ED
그리고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사이트를 찾아서 잡지를 주문했다.
서구에선 Fat Studies라는 이름으로 비만, 뚱뚱함 등과 관련한 연구가 꽤나 활발하다더라. 여기서 관련 연구라고 하면 비만의 위험이나 감량을 독려하는 종류의 연구가 아니라 비만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탐문하고 뚱뚱함의 인식론으로 세상을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퀴어연구와 밀접하다. 부치가 흔히 말하는 여성적 체형보다 큰 경향, 게이의 베어 몸매, 그리고 뚱뚱함이 그 자체로 유발하는 퀴어함 등이 그 이유다. 이것은 매우 협소하고 빈약한 설명일 수밖에 없는데 아무려나 관련 논의가 많다고 알고 있다.
국내에선 관련 연구를 진행하던 분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중단되었다. 그래서 무척 아쉬웠다.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계속 연구를 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관련 연구를 하는 분이 계실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어제 큰 체형의 여성을 위한 잡지, 혹은 66사이즈 이상인 사람을 위한 패션잡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몇 년 전부터 패션쇼가 있었고 이제 패션잡지다. 물론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인지는 직접 사서 봐야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관련 작업이 나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 기쁜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몸을 더 복잡하게 상상하면서도 이것을 표현할 방법이 잘 없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 나와서 기쁘다. 두근두근.
+
사실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패션잡지가 실질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더 기쁘다!

트래픽 초과, 클라우드 호스팅?

하루에 800MB 트래픽 용량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나처럼 변방의 별볼일 없는 블로거에게 이 정도는 사실 엄청 과한 용량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트래픽 초과가 최근 다시 빈번하다. 예전엔 중국에서 과도하게 접속하며 트래픽 초과를 유발했다면(디도스 연습용이란 얘기가 있다) 지금은 모두 한국 아이피다. 물론 아이피를 우회해서 한국 아이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아이피의 사용 위치를 알려주는 사이트에 따르면, 동일 아이피도 사이트마다 다른 지역을 표시할 때가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서울일 때도 있고 그냥 논 한 가운데일 때도 있다. 그리고 트래픽을 유발하는 정도는 1시간에 1만 건 정도. 1분에 150여 번 정도 접속한달까. 어지간한 꼼수로는 대응이 안 된다. 임시방편으로 과도한 트래픽을 유발하는 아이피를 차단하는 방법 말고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두 가지 정도인데 트래픽 리셋을 신청하거나 기본 트래픽 용량을 늘이는 것이다. 트래픽 리셋의 경우, 윈도우와 인터넷익스플로러에서만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점에서 상시 대응이 안 된다. 아울러 집에 윈도우7이 설치된 노트북이 있는데, 보안을 위해 코모도 방화벽을 사용하고 있다. 근데 코모도 방화벽이 호스팅을 담당하는 업체인 카페24의 홈페이지가 멀웨어에 감염되었다며 접속을 차단… 그래서 집에 있을 때도 대응이 안 된다. -_-; 일일 전송량을 늘이는 기본 트래픽 용량을 늘이는 것은 좀 낭비다. 평소엔 지금의 용량도 많은 편인데,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공격을 대비해서 무작정 늘이는 건 돈이 아깝다. 무엇보다 전에도 이런 일로 용량을 늘였지만 결국 트래픽 초과가 발생하듯, 용량을 두 배로, 세 배로 늘여도 무용지물이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드 호스팅을 고민하고 있다. 기존의 호스팅이 일일 트래픽 한도를 제한하는 방식이라면 클라우드 서비스의 경우 내가 사용한 만큼 지불하는 방식이다. 단, 기존 호스팅 업체는 블로그나 홈페이지 호스팅 지원을 잘 하지만 클라우드 업체는 홈페이지 호스팅이 직접적 목적이 아니라 클라우드 서비스에 호스팅을 하겠다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찾아서 작업해야 한다. 그래서 수월한 방안은 아니다. 또한 현재까진 아마존의 AWS가 유명한데 나로선 구글에서 제공하는 구글클라우드플랫폼(Google Cloud Platform)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내가 구글 서비스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고 구글의 여러 서비스와 연동 등을 감안하면 구글 것이 낫겠다 싶어서. 단점이라면, 이게 꽤나 큰 단점인데 아마존의 AWS에 비해 구글클라우드플랫폼은 노하우와 관련한 한국어 문서가 거의 없다. 내가 관련 지식이 있다면 영어 문서를 읽으며 어떻게 처리하겠지만 관련 지식이 전혀 없으니 영어 문서를 바로 읽기가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정확한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문서는 워드프레스를 호스팅하는 경우지 텍스트큐브는 아니다. 텍스트큐브를 유지하겠다면 정말 삽질의 연속일 테고, 아니면 워드프레스를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끙.
이런 무시무시한 단점에도 클라우드 호스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방학이 되면 이 작업을 우선할까 싶고. 물론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밀리다가 그냥 얼렁뚱땅 넘어갈 수도 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