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더웠다. 햇살은 따갑고 땀이 났다. 출근길 지하철은 에어컨을 틀었다고 해도 덥고 많은 인파에 몸이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덥고 무력한 상태. 몽롱하고 헤롱헤롱한 상태로 간신히 알바하는 곳에 도착했다. 더운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홍차를 마시기 위한 뜨거운 물을 받았다.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에게 간 전화를 내게 돌린 경우였고 이것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란 뜻이다. 상대방은 서비스를 사용하다가 불편이 생겨 얼마간 짜증이 난 상태였고 나는 상대를 진정시키면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알바하는 곳에서 사용하는 내 컴퓨터는 무척 느리고, 메모리는 1G RAM이 안 된다). 그러며 말을 하다가 메모가 필요해서 손을 움직였다. “앗, 뜨거” 홍차티백이 담겨 있는 컵을 쏟았고 왼쪽 팔과 왼쪽 상의, 왼쪽 다리에 뜨거운 홍차가 쏟아졌다. 당황했고 어쩔 줄 몰라 잠시 수화기에서 손을 놓았다. 마침 티슈가 두 장 있어서 그것으로 대충 책상을 닦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전화 상대가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이후로도 얼마간 이어진 불만을 듣고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야 손과 다리에서 식어가고 있는 홍차를 닦았다. 책상도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지금 하는 일을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둬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그만해야지. 내년부턴 다른 일을 찾아야겠어. 화상을 입을지 어찌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왜 전화부터 처리하는 걸까? 그 문제는 10분 혹은 20분 정도 늦게 처리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 전혀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일을 하는 걸까? 이렇게까지 일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물론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고 했다간 일이 더 골치 아플 수 있다. 일이 더 골치 아프게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몸에 뜨거운 홍차를 쏟고도 전화부터 처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이러고 지내나. 중간에 그만두면 상당한 비용을 물어야 하니 그럴 순 없고, 그냥 올해를 마지막으로 그만해야겠다.
[입장서 ] 우리가 어떻게 애도하고, 저항하고,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는지 보여주자!
서대문구의 판단에 퀴어문화축제와 무지개행동의 입장서가 나왔습니다. 이런 글은 널리 퍼질 수록 좋기에 여기에도 남깁니다. 아울러 하단에 지지서명을 할 수 있는 링크가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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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애도하고 저항하고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는지 보여주자!
– 서대문구청의 부당한 퀴어퍼레이드 행사 승인 취소와 일부 보수 기독교의 혐오에 부쳐
지난 5월 27일, 서대문구 교통행정과는 6월 7일에 개최될 퀴어문화축제 행사 승인 취소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미 4월부터 협의를 하고 진행해 왔었음에도 불과 2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취소를 한 것입니다.
취소의 사유는 ‘세월호 여객선 침몰사고의 국가적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고, 퀴어문화축제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려 불가피하게 취소한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런 서대문구청의 사유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퀴어문화축제가 지금 사회적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대규모 야외 행사로는 ‘서울재즈페스티벌’이 이미 개최되었고, ‘그린플러그드 서울’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이런 축제와 퀴어 퍼레이드는 무엇이 다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까? 더군다나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6월 7일에 서대문구청에서 주최하는 우리동네음악회가 연세대에서 진행됩니다. 그런데도 왜 유독 퀴어문화축제만이 행사 취소 처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축제’라는 형식이 애도 기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축제가 허용되는 애도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진정한 애도와 추모의 기간은 참사가 일어나게 된 모든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정부가 제대로 반성하고 제대로 이 참사를 수습할 때까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이유로라도 모여서 서로의 마음을 끌어안고, 위로하고, 의견도 나누며 이 비극을 잊으려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퀴어문화축제는 그런 마음을 담아 열릴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서대문 구청이 내세운 추모 분위기는 명목상 이유일 뿐, 몇몇 기독교 동성애 혐오 단체들의 압력에 굴복해 행사를 취소했다는 사실입니다. 게시판을 왜곡된 정보와 혐오의 글로 도배하고,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를 거는 것을 며칠도 견디지 못하고 구청은 그들이 원하는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눈치를 본 탓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정치적 거래의 희생양이 될 수 없습니다. 매년 힘겹지만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최되어 온 퀴어 퍼레이드야말로 이렇게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또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서로를 통해 다시 일 년을 살아갈 힘을 받는 자리이지 않았습니까.
올 해 퀴어퍼레이드는 이전과는 또 다른,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퍼레이드가 될 것 같습니다.
6월 7일, 신촌으로 오십시오. 주눅들지도 상처받지도 말고 오십시오. 울분을 터트리는 대신 우리의 자긍심을 터트리고, 저들이 내지르는 혐오에 우리는 더 크고 즐거운 노래 소리로 화답을 해 줘야죠. 우리는 다릅니다. 달라서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다 달라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 “퀴어들”이 어떻게 지금의 이 한국 사회를 기억하고, 애도하고, 저항하고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는지 보여줍시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의 온 몸으로 보여줍시다.
6월 7일, 신촌 연세로에서 분명 우리들은 모두 귀하디 귀한 존재로서 빛날 것입니다.
2014년 5월 29일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무지개 행동> /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현재 퀴어문화축제 개최를 지지하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izB6VqTFEJEgxsgIJWDswmo_f8Mj7ArW-oqJdpFD5Pk/viewform 를 클릭하시면 서명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퀴어문화축제 장소 승인을 뒤늦게 취소한 서대문구 혹은 다른 누군가
서대문구청, ‘퀴어문화축제’ 승인 갑자기 취소
구청 “퀴어 퍼레이드 반대 민원으로 몸살”… 15년간 지속된 축제에 난관
익숙한 많은 집단을 떠올리고 싶지만 그 집단을 특정하진 않겠습니다. 그 집단만 없어지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 집단이 없어서 퀴어문화축제를 예정대로 진행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이미 승인한 것을 취소하도록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금 사회와 분위기를 문제 삼아야겠죠.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행사는 그대로 진행됩니다. 정부가 혹은 정부 기관이 허가한다, 하지 않는다로 행사 자체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축제는 여전히 진행됩니다. 당일 시간 일정만 조금 바뀔 뿐. 아울러 적법하게 진행된다고 하니 행여나 걱정하신 분이 계시면 걱정 마셔요.
축제는 언제나 저항입니다. 퀴어문화축제는 이성애규범, 이성애중심, 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사회에 문제제기하는 행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지금 상황은 축제의 성격과 특징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대문구청이 승인을 취소하지 않았고 행사가 그냥 진행되었다면 망각할 수도 있는 지점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
이번 퍼레이드엔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면 좋겠어요. 아울러 14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퀴어문화축제와 함께 하는 공식 퀴어영화제(http://www.kqff.co.kr/)에도 많은 분이 참가하면 좋겠고요.
즐겁게 6월 7일을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