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 3년, 그리고

어쩐지 너를 떠나보낸지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아. 아득한 옛날, 그 무더운 여름 너와 인사를 했다고 기억해. 그 날은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를 진행하던 날이었고 뜨거운 여름이라고 기억하지. 하지만 이제 3년이야. 아직은 봄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기분이고. 뭔가 이상해. 그땐 무척 더웠고 그 날 땡볕에 있었던 나는 그 이후 한동안 긴팔을 입고 다녔어.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의 시간, 전혀 다른 느낌의 계절. 그리고 3년이란 시간이 지났어.
안녕, 나의 리카.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인사가 무색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궁금해. 그리고 나의 게으름을 부끄러워해.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했다면 오늘을 전혀 다르게 기억할 텐데. 3년이란 시간을 조금 다르게 기억할 텐데. 나는 게으르고 그래서 오늘도 그냥 이렇게 글만 써. 바람을 보면서 너의 흔적을 떠올리고, 바람의 얼굴에서 너와 함께한 시간, 네가 짓던 표정을 떠올려. 너는 여전히 내 곁에 있고, 나와 같이 살아가고 있어. 너는 바람의 표정에 살아 있고 내 기억에 살아 있고 또 내 삶 곳곳에 있지.
안녕, 나의 리카.
내년엔 오늘을 다르게 기억할 수 있길 바라. 누군가는 너의 이야기를 써서 글로 나오면 좋겠어. 너를 기억하는 글, 너와 내가 겪은 일이 좀 더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일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

LGBT/퀴어 운동의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LGBT/퀴어는 지금 이 사회의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중심주의로 차별과 억압을 겪고 있다는 방식의 언설로는 더 이상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없다. 벌써 몇 년 전부터 그런 시대로 변했다. LGBT/퀴어가 겪는 차별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글쓰기, 강연, 캠페인과 같은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기 힘든 시대다. 슬프게도 이것은 이미 많은 활동가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이를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고). 운동의 방식이, 발화의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너와 내가 겪는 차별이나 억압이 어떻게 공통의 경험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공통의 경험, 모든 개인은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복잡한 범주로 삶과 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언설은 무척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정치학은 지금 이 새대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체화되지 않았다. 삶에서 나온 이 성찰은 많은 경우 이론적 언어일 뿐 구체적 삶과 무관하다고 잘못 이해되기도 하다. 문제는 개인 범주의 복잡성이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맥락은 상당히 다르다. 과거엔 어땠는지 몰라도 오늘날, “LGBT/퀴어는 차별을 겪는다”란 언설엔 “이성애자인 나도 차별을 겪는다”라고 반응한다. 이런 식의 반응에 동조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지금은 대충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사회에서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차별받고 있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는 이를 고민해야 한다”란 언설은 큰 효과를 갖기 힘들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문제 삼는다고 이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점은 견고하게 유지하되,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바꿔야 한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겪는 억압이나 차별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살면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 억압 혹은 차별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경험을 유사한 서사로 재구성해서 상당한 접점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구조적 맥락(혹은 최소한 ‘너도 나도 다 차별 받으니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 방향)에 초점을 전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이것은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믿는 이유는 지난 4월에 했던 특강에서 이것의 초기 판본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건 차별을 겪는다. 그렇기에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하는 차별 경험을 유사한 사건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설명 방식, 혹은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렇게 믿는다.

바람, 보리, 두 고양이의 적응기

ㄱ.
보리는 어째서 사료 한 알갱이로 축구를 하다가 와구와구 먹는 걸 좋아하는 걸까? 처음엔 뭐하는 걸까 싶어서 중간에 중단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두고보니 사료 한 알갱이로 잠깐 놀다가 열심히 먹는 걸 봐선 그냥 이런 것 자체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깽이 시절엔 모든 것이 장난감이지. 모든 것이. 매우 위험한 것도 일단 장난감으로 다루지.
ㄴ.
바람은 은근히 보리와 놀아주고 있다. 첨엔 싸움에 가깝다고 봤는데, 좀 더 살펴보니 어떤 순간엔 놀고 있다. 자려고 이불을 펴면 매트리스를 덥고 그래서 이불과 매트리스 사이에 숨기 좋은 공간이 생긴다. 보리가 이 공간에 숨으면 바람이 보리를 찾으러 가고 보리가 튀어 나오면 바람이 후다닥 도망가는 놀이를 반복한다. 물론 놀이가 과열되거나 보리가 과하게 바람에게 붙으면 바람이 좀 싫어한다. 아직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은근 슬쩍 놀기도 하니 조금은 더 안심하고 있다.
물론 보리도 3개월령을 넘기고 덩치도 조금은 더 커지면서, 둘이 싸우는 정도가 더 심해진 문제도 있지만.. -_-;
ㄷ.
E의 말에 따르면 바람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보리가 오기 전 바람이 E를 대하는 표정과 지금 바람이 E를 대할 때의 표정을 비교하면 훨씬 부드럽다고. 그 말을 듣고 바람의 얼굴을 보면 정말 그렇다. 처음부터 바람 외에 다른 고양이가 있었다면 사람이 올 때 바람이 숨지 않았을 거란 뜻은 아니다. 여전히 사람을 경계했을 것이다. 바람이 E를 비교적 자주 만나면서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경계를 조금씩 풀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런 시기에 보리가 왔다. 다른 사람과 달리 보리와는 어떻게든 더 많이 부대껴야 했고 이것이 어떤 식의 경계를 허문 듯하다. 예상하지 못 했지만 때가 좋았나보다.
ㄹ.
보리가 바람에게 덤비면 바람은 적당히 봐주면서 피해준다. 물론 종종 화도 내지만. 하지만 이를 통해 기고만장하고 겁없는 녀석인 보리는 다른 것에도 겁이 없다. 이를 테면 내가 청소할 때 청소대를 밀어도 피할 생각을 안 하고 버틴다. 이 녀석!
ㅁ.
주말이라 계속 집에서 수업준비를 했는데, 바람도 보리도 안정을 찾았다. 바람은 내가 있는 곳 근처에서 잠들거나 뒹굴었다. 보리는 책상 위에서 자거나 내 다리 위에서 늘어지게 잤다. 잠을 늘어지게 많이 잤다는 뜻이 아니라 몸을 늘어지게 펼치고 잤다. 사진을 찍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자체 검열을 했기에 공개는 못하고. 크크크.
바람이 발라당 드러누워서 자는 걸 좋아한다면, 보리는 발라당 눕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듯하다. 대신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자는 걸 좋아한다. 베개가 있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