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르기 비염, 혹은 시간성과 기온의 관계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날입니다. 그리고 비염이 터지는 계절이고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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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1.일. 쪽글-03
알레르기 비염, 혹은 시간성과 기온의 관계
-루인
비록 지금은 한국이 사계절의 기온 변화와 자연 풍경 변화가 뚜렷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뚜렷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오랜 시간 한국은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였(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생일 땐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그런 지식을 밑절미 삼아 계절 변화를 인식했고 지금은 기온이 ‘이상’하다고 예전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계절의 변화,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움직이는 시간은 일년이라는 시간 단위를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기도 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의 타종행사가 달력 시간의 단위를 맺고 새로 시작함의 지표라면 계절의 순환은 어쩐지 몸에 익은 삶의 1년 주기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1년이라는 단위, 혹은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나는 내 몸의 반응으로 이것을 인식한다.
알레르기 비염을 만성병으로 분류할 것인지, 그저 알레르기 증상으로 분류할 것인지는 내게 애매한 영역이다. 만성병과 관련한 글을 읽을 때면 종종 내가 겪는 알레르기 비염을 떠올리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다른 말로 비염을 만성병의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어떤 병을 겪은 ‘생존’의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레르기 비염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적(시간적) 인간되기를 ‘방해’하는 요소란 점이다. 알레르기 비염이 터진다면, 이미 터진 상황에선 약도 소용없고 사실상 할 수 있는 건 드러누워 있는 것 뿐이다. 비염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지만 비염으로 인한 피로와 에너지 소모로 잠에 드는 것이 유일한 임시방편이다. 하지만 비염은 정해진 시간에 나를 찾지 않는다. 비염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불쑥 찾아온다. 오랜 만에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날 아침 찾아올 수도 있고, 할일이 엄청 많고 판단해야 할 일이 많은 날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늘 신경써야 하고 코의 미묘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론 비염이 터질 것만 같은 예감이 반드시 적중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터지지만 안 터질 때도 있다. 비염이 터지지 않을 거란 기대 역시 언제나 배신을 동반하다. 이것이 문제다. 비염이 터지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비염이 터져도 생계형 알바를 쉴 수 없고 학교 수업에 빠질 수 없다(만약 빠져야 한다면 봄과 여름 동안 나는 집에만 있어야 한다). 내 경험에서 비염은 “힘들겠다”란 반응을 접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증상이다. 많은 경우 “감기예요?” “비염이에요” “아…” 이것이 전부다. 그리하여 비염으로 알바를 쉬겠다고? 애당초 근로 조건에 공휴일을 제외하면 쉬는 날이 없는데 ‘고작’ 알레르기 비염으로 쉬겠다고? 하지만 알레르기 비염은 이른바 시간 대비 생산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알바하는 곳에서 나는 정말 최소한의 일만 하고 수업엔 참가하는데 의의를 둔다. 그리하여 알레르기 비염은 시간규범적(temporal-normative) 존재 되기를 ‘방해’한다. 이른바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없도록 만들진 않지만 그것이 요구하는 시간 생산성엔 부족한 존재로 만든다.
비염이 시간규범적 존재로 사는 삶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시간성 개념을 갖는 것만은 아니다. 비염은 크게 두 가지, 통년성 알레르기 비염(Perennial allergic rhinitis)과 계절성 알레르기 비염(Seasonal allergic rhinitis)으로 나뉜다. 비염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많은 글이 비염을 알레르겐과 치료를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비염은 그 자체로 이미 시간적 증상이다. 어떤 경우건 둘 다 평생을 함께 하거나 몇 십 년을 함께 할 동반자다. 계절과 무관하게 수시로 발생하느냐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게 있어 비염이란 시간은 단순히 통년성으로 오지도 않고 계절성으로 오지도 않는다. 통년성, 어떤 알레르겐을 통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어서 환경을 가리는 방식으로 비염을 겪지는 않는다. 물론 낯선 곳에 가거나 먼지가 유난하거나 냄새가 강한 곳에 가면 그 즉시 혹은 이튼날 거의 반드시 비염을 겪는다. 계절성, 봄이나 환절기에 꽃가루와 같은 요인으로 비염을 겪지도 않는다. 물론 나는 봄이나 여름, 특히 이 즈음의 환절기에 비염을 심하게 겪는다. 내가 봄이나 여름을 싫어하고 가을이나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을이나 겨울에 비염을 겪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현저하게 낮지, 없지는 않다. 한겨울에도 비염이 터지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얼추 20년 가까이 비염을 앓으며 깨달은 바, 내가 비염을 겪는 시기는 대체로 분명하다. 날이 따뜻할 때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특정 기온, 아침 최저 기온이 12도 이상이라거나 낮 최고 기온이 19도 이상이면 비염이 터진다는 식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기온차에 더 민감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며 기온이 0도면 비염이 터질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어제까지 일주일 가량 영하 15도였다가 오늘 영하 5도 정도여서 날이 ‘따뜻’하다면 비염이 터진다. 영상 10도는 되어야 따뜻해서 비염 발생 요인이 작동하는 게 아니다. 기온차가 크고 날이 상대적으로 ‘따뜻’할 때 비염이 터진다. 나의 비염 알레르겐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온이다. 다른 말로 내게 비염이라는 시간은 기온과 함께 한다. 그리하여 나는 계절 변화를 비염이 터지는 빈도로 겪는다. 비염이 터지기 시작하면 ‘아, 이제 봄이구나’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 시간은 또한 기온 변화의 시간성이다. 내게 시간성은 기온 변화의 형태로 인지된다. 이것은 계절에 따른 기온 변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기온을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느냐와 관련 있는 시간성이다. 그리하여 내게 시간성은 또한 기온의 변화가 몸의 상태를 바꾸는 방식으로 체화된다.

성실하게 일탈하는

수업 쪽글로 넘어갑니다..;;
2014.03.10. 월. 15:00- 쪽글. “왜 성실한 사람은 조롱받는가”
성실하게 일탈하는
-루인
약속한 일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는 나는 흔히 말하는 ‘일탈’을 싫어하는 편이다. 원고 마감이 오늘 밤 10시까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을 지켜서 제출해야 한다. 내일 알바하러 가야 한다면, 오늘 밤 갑자기 동해의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도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서 잠들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바를 하며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 없다. 미리 약속한 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바로 그 일정을 지키기 위해 일상을 재조정할 때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종종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게 산다”, “재미없는 삶을 산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끔은 내 정치학과 삶이 다르다는 얘기도 듣는다. 트랜스젠더 맥락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이라면,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내 의사와 무관하게 내가 진보로 분류된다면, 일탈이나 방종이 자유로움의 표상이며 진보적 삶의 상징이라고 ‘오인’된다는 점에서 나는 일탈이나 방종을 즐겨야 할까? 다른 말로 어찌하여 일탈적 행동이나 방종이 자유로움과 급진성의 상징을 획득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행위는 보수성의 의미를 취득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를 테면, 의외로 많은 비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면 삶을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종종 규범도 위반하면서 살 것이라고 믿는다. 트랜스젠더라는 범주 자체가 이미 규범 위반이란 언설도 있다. 물론 무언가를 위반하는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이원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것인지 이원 젠더 규범이 인간의 다양한 삶을 위반하는지는 더 논의할 사항이다. 무엇보다 의료적 조치를 선택한 많은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정말 성실하게 일상을 유지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호르몬을 투여하기 위해 일상을 관리하고, 혹시나 호르몬의 효과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봐 음식을 조절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 자체는 (본인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일탈’일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까지 ‘일탈’이거나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료적 조치를 하는 많은 트랜스젠더는 ‘일탈’ 혹은 ‘자유’롭다고 얘기하는 바로 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정말 성실하게 살아간다.
혹은 1960-70년대 미국 사회에서 반전운동과 히피 문화가 유행일 때 많은 ‘남성’이 긴 머리카락에 하늘하늘한 남방을 입고 다녔다. 그 당시 그런 복장은 진보의 상징이거나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 시기 트랜스젠더, 특히 mtf 트랜스젠더는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혹은 그런 문화와 무관하게 ‘여성’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녔다. 히피 문화의 유행은 mtf 트랜스젠더의 삶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했다. 하지만 히피 문화의 유행이 끝나자 트랜스젠더 혐오는 더욱 심해졌다. 이제 mtf의 삶은 철지난 유행이 되거나 ‘어색한 몸에 걸친 과잉 여성성’이 되었다. 트랜스젠더는 당대 급진적 정치학을 전유하던 이들에게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수호하는 보수 집단으로 찍혔고 상당한 혐오 발화를 들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1990년대가 되었을 때 트랜스젠더는 다시 급진적 정치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지금은? 트랜스젠더는 급진적 젠더 정치의 최전선에 있다는 언설과 기존 젠더 규범의 수호자라는 언설을 동시에 들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태도, 성실한 삶의 자세가 당대의 문화적 의미 체계에 따라 급진적 정치가 되기도 하고 반동적 실천이 되기도 한다. (때론 반동인 동시에 진보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프랭크가 설명했듯 캔자스에서 미국의 ‘평균적’ 삶을 살아온 사람, 혹은 한국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하는 사람 역시 비슷할 것이다. 과거 어떤 시기엔 자신의 삶이 매우 급진적이거나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다른 어떤 시기엔 보수적이라고 평가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성실한 태도는 고리타분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꼰대같거나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는 보수 기독교 혹은 근본주의 기독교가 경제 개념을 누락하는 문화 정치를 통해 캔자스의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프랭크가 설명하는 문화 정치는 단순히 낙태 반대 운동, 반동성애 운동이라는 대의명분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대의명분 속에 ‘평범’한 삶을 위로하는 어떤 지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성실한 삶이 고리타분한 옛것으로 취급된다면, 퀴어는 비전통적 수입품이란 언설이 팽배하다면, 혐오가 전통이며 가치있는 삶의 양식이란 언설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다면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할까? 다른 말로 ‘내’ 삶을 위로하는 언어가 보수 우파의 언설에 녹아있는 것은 아닌지. 예를 들면 ‘당신은 잘 살아왔다, 그런데 저들이 당신의 삶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반드시 이렇게 이항대립의 형식은 아니겠지만.
프랭크는 보수 우파 활동가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말을 걸고 설득한다고 얘기한다. 트랜스젠더 이론, 퀴어 이론을 하는 나는 사람들이 퀴어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데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그리고 트랜스젠더가 차별받고 있다는 식의 언설말고, LGBT는 차별받고 있다는 언설말고, 비트랜스젠더 혹은 LGBT가 아닌 사람의 정동을 건드리면서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 단지 퀴어 이론에 문외한이란 이유로, 혹은 얼마간의 혐오 발화를 했다고 해서 한 개인의 삶을 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성실하다는 이유로 내가, 혹은 트랜스젠더가 일방적으로 평가받는 것엔 흥분하면서 다른 상황에선 내가 타인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리 고양이의 적응기

ㄱ.

거칠 것 없는 보리 고양이는 밤에 잠들 때면 꼭 제 몸 위에서 우다다를 합니다. 꾸에. 침대에서 하면 양호한다, 어차피 침대는 1인용이라 침대에서 하나 몸에서 하나 거기서 거기지만, 주로 몸 위에서 날뛴다는 게 문제. 그래서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보리가 발뛰어서 잠에서 깰 때가 많다. 자주 깬다. 그리하여 다음날이면 헤롱헤롱.

ㄴ.

보리와 바람이 서로 어느 정도 적응한 다음 새벽마다 생기는 현상은 우다다. 우다다 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깨면 어김없이 5시 20분.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거침없이 보리는 달리고, 보리가 달리니 당황하거나 도망가느라 바람도 우다다 달린다. 물론 바람은 좀 살살 달리지만 보리는 정말이지 거칠 것이 없다. 어딜 부딪히건 말건 달린다. 너무 날뛰에서 결국은 보리를 붙잡고 “님, 자제염!”을 외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자제를 요구하는 게 괜찮은 것만은 아니니까. 고양이는 집사의 성격을 닮는다는 말이 있던데, 날뛰던 보리가 어느 날 하루 종일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이것도 기쁘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예정보다 40분 정도 더 일찍 일어나니, 하루 종일 헤롱헤롱.

ㄷ.

화장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보리 고양이를 그렇게 혼을 내도(혼을 내서 버릇을 고친 집사님, 도대체 어느 정도 혼을 내야 바뀌나요? 노하우 좀 전수해주세요.. ㅠㅠ) 뻔뻔하게 들어간다. 결국 내가 취한 방법은 화장실 청소 세재를 베이킹소다로 바꾸는 것. 검색하면 청소하는 방법이 후두둑 쏟아지겠지만, 뭔가 꿍쳐둔 노하우 있나요?

ㄹ.

화장실과 함께 주방 싱크대에도 마구마구올라갈 궁리를 하고 있다. 이것 역시 혼내지만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아서 아예 방해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싱크대 끝에 종이를 덧대어서 올라가기 난감하고 올라가도 바로 떨어지도록 한 것. 이것으로 버릇을 고칠 수 있어야 할 텐데.

ㅁ.

며칠 전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보리를 접한 병원 의사와 간호사 모두 예쁘다고 난리였다. 한 분은 보리의 배 무늬가 뱅갈고양이 같다고. 우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