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특강, 가난,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행사가 있어 홍보합니다. 흐
가난은 많은 사람이 직접적 관심을 표하진 않지만 ‘우리’의 삶을 흔들기도 하는 중요한 주제기도 하고, 그냥 ‘내’가 살고 있는 삶이기도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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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봄학기 문화학과 외부강사 초청 콜로키엄>
제목: 가난,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부제: 사당동 22, 25, 28, 33 …
강사: 조은(동국대 명예교수)
일시: 2014년 5월 26일 월요일 저녁 6시 30분
장소: 연세대학교 논지당 세미나실
주최: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젠더연구소
문의: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culture@yonsei.ac.kr / 02-2123-6221)
* 당일 약간의 다과가 준비될 예정입니다!  

바람과 보리 고양이, 사진

D님께서 블로그에도 사진을 올려달라고 요청하시어, 구플에 올린 것 중 몇 가지만 추려서 올려요~

촬영은 타이밍!

*이 사진은 E가 찍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자는 모습.

집사는 자신의 고양이를 이렇게도 만듭니다. 😛

사진 찍는데 들이밀면 참 예쁜 장면이 나오죠. 흐

비닐봉투에 들어가서 노는 모습

들이밀자!

극적인 풍경!
… 사실 스팀청소기로 청소를 하는데 그 소리를 싫어하는 보리가 기어이 바람 곁에서 버티는 모습. 흐흐흐.



오랜 만에 바람 단독!

몸으로 사는가

몸으로 산다는 말을 고민하고 있다. 몸으로 산다는 것, 나는 내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몸은 중요한 정치학이다. 하지만 몸으로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지? 알듯 하던 이 말을 요즘은 전혀 모르겠다. 이 세상에 나는 내 몸뚱어리로 존재하지만 사실 몸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몸을 매개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상상하거나 안다고 여기는 내 몸의 형태,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내 몸의 형태,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부유하는 몸으로 살고는 있다. 최소한 세 가지 축의 몸으로 살고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내 몸을 살고는 있을까? 만약 내가 내 몸을 살고 있다면 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만약 내가 내 몸을 살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면, 이때 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질문의 핵심은 여기다. 내가 내 몸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럴 때 몸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짧은 메모에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몸으로 이 세상을 살지만 내가 내 몸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