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부산에 갈 때마다 듣는 말이 있다. 살이 지난 번보다 더 빠졌다, 큰일이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살이 빠졌는지 어떤지. 나의 체감에 살이 빠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몸무게는 대충 비슷한 것 같은데도 그런 말을 듣는다. 물론 집에 체중계가 없어서 정확한 몸무게는 나도 모른다. 대충 비슷하겠거니 하면서 얼추 20년 가까이 비슷한 몸무게겠거니 하며 지낼 뿐이다.
부산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 알바에 출근하기 위해선 첫 기차를 타야 하는 건 아니지만 5시 30분 기차는 타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게 알바하는 곳에 출근할 수 있다. 5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선 3시 30분엔 일어나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씻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차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최소 두 시간 전엔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한다. 3시 30분이란 시간은 평소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다. 새벽, 고양이가 우다다 혹은 야아아아아아아옹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일어날 일도 없다. 하지만 일어나야 하고, 차를 놓치면 큰일일 땐 또 절로 일어난다. 알람 소리에 몸이 벌떡. 물론 요즘은 많이 피곤하니 약간의 뒤척임도 있다. 어쩌겠는가. 살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원하지 않은 일정을 치뤄야 하는 날도 있으니까.
피곤하지만, 사실 이렇게 새벽 기차를 타고 오가는 일을 하면 그 주는 주말까지 계속 피로와 졸엄에 시달린다. 그리고 적응은 안 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살다보면 다른 날도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밑반찬 몇 개 얻었으니 다 괜찮다. 으흐흐. ;;;

버스44: 옛날 이야기, 윤리

01
어릴 때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할머니는 내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시기부터 노인성 치매였고, 그 전의 일은 정말 단편적 기억 뿐이다. 그럼에도 그때 이야기는 기억난다. 내용이 별것 아니기 때문일까.

버스정류장이 아닌 도로 한 곳에서(1990년대 초중반까지도 시골에선 버스정류장 개념이 희박했다) 오랜 시간 버스를 기다린 사람을 버스에 태우는데, 그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치고 피를 보면 그를 제외하고 그 버스에 탄 사람 모두 죽는다는 간단한 얘기였다. 그 사람은 저승사자라고 했나 삶을 시험하는 존재라고 했나.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구석도 많다. 버스와 저승사자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니다. 하지만 많은 옛날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는 그럴 듯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시골에서 버스를 탈 때면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다 잊었는데 며칠 전 갑자기 떠올랐다.


02
구글플러스의 경향신문 계정에 [버스44]와 관련한 글이 올라왔다.
1차 출처: https://plus.google.com/102809260248109943090/posts/eoNBMkp4i5b
관련 전문: http://goo.gl/TL6dkj

간단하게 요약하면, 버스에 강도가 들어 승객 모두 돈이 뺏기고 운전수는 성폭력피해를 겪는다. 이 와중에 단 한 명만 운전수를 도왔고, 운전수는 그를 버스에서 쫓아 낸 다음 버스를 타고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위 링크엔 더 자세한 얘기가 나와있다. 암묵적 동의, 관망 등의 윤리를 같이 논하는 영화인가 싶어 보고싶었는데 마침 누가 구글플러스의 댓글에 링크 주소를 남겨줬고 유튜브에서 볼 수 있었다.

Bus 44 – Award-Winning Short Film: http://youtu.be/CK4TUP0VKLY
(영어자막이지만 위에 주소를 남긴 전문을 읽고 단편영화를 본다면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강도와 성폭력, 주변의 침묵과 방관을 고민할 수 있을까 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다른 이유로 섬뜩했다. 성폭력 피해를 겪는 운전수를 도와 주려고 애쓴 유일한 사람이자 버스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승객의 마지막 표정때문이다. 승객은 운전수가 고의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다른 승객과 함께 죽은 것(혹은 운전수가 자신을 돕지 않고 방관한 승객을 모두 죽인 것)을 알아채곤 씨익 웃는다. 그 웃음이 무서웠다. 운전수가 자신은 살려줬다는 걸 깨달았다면 그런 웃음을 짓긴 쉽지 않을 것이다. 사고의 애통함과 살아 남았음의 안도라는 복잡한 감정이 얼굴에 떠오를 것 같은데 씨익 웃는 웃음이라니. 나는 그 웃음이 ‘성공했어’의 의미 같았다. 자신의 계획대로 다 죽었다는 성공의 의미 말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사건이 그 승객의 의도이자 기획이란 것처럼. 그리하여 이 영화가 공포인 진짜 이유는 누군가 피해를 겪고 있어도 방관하는 사람들의 태도, 방관한 사람과 같이 죽거나 그들을 죽이는 방식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웃는 표정의 미묘함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잊고 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03
그런데 나의 가치판단으로 운전수의 표정을 재단할 때, 운전수의 표정과 나의 가치판단은 또 다른 윤리적 이슈를 제기한다. 사고,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라는 안도 사이에서 규정된 윤리적 태도란 어떤 것일까? 그러니까 나의 가치판단은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특정한 감정과 표정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상황에선 살아남았다는, 누군가 나를 살려줬거나 구해줬다는 안도감의 기쁜이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글의 메모를 작성하는 시간에, 이건희가 삼성병원에서 심장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는 기사이 제목을 읽었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만약 수술에 실패하여 이건희가 삼성병원에서 삼성병원에서 죽는다면 삼성병원은 어떤 식으로 보도자료를 낼까? 이건희를 살렸다면 이것은 좋은 홍보자료가 된다. 하지만 못 살렸다면? 내게 이건희의 죽음은 딱 이 정도의 가치다. 이건희 자신이 만든 가치기도 하다. 다른 말로 모든 죽음이 반드시 애통한 사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버스44]의 마지막 장면을 섬뜩하다고 분석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 아닐 수도 있다. 도덕과 윤리의 상대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특정 관계망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바람과 보리, 두 고양이의 일주일

이제 얼추 일주일 지난 바람과 보리의 관계는 애매합니다.
이를 테면 어제 저녁 바람과 보리는 얼결인지 얼굴을 부비부비하며 뽀뽀를 했습니다. 하지만 곧 뭔가 어색한지 서로에게서 떨어졌죠. 보리는 간혹 바람의 엉덩이 냄새를 킁킁 맡을 때가 있고, 바람에게 하악하며 앞발로 공격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바람은 보리가 곁에 오면 하악하지만, 어떤 순간엔 하악하다가 바람의 냄새를 킁킁 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둘의 관계는 오락가락.
하지만 정말 재밌는 것은, 밤에 잘 때가 아니라면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점입니다. 구플에 사진과 움짤을 공유했으니 확인할 수 있겠지만 초기만 해도(사실 지금도 초기지만) 둘이 저 정도 거리에 있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훨씬 먼 거리에서도 하악을 시전했죠. 하지만 지금은 직접 부딪히지 않는 이상, 그리고 매우 가까이 서로 마주보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는 수준입니다. 다행이지요.
보리의 행동을 보면, 보리는 바람과 놀고 싶고 바람의 그루밍을 받고 싶어 하는 느낌입니다. 바람의 행동을 보면, 바람은 보리가 귀여운 것 같고 하는 짓이 걱정은 되지만 아직 그렇게 가까이 있고 싶지는 않은 느낌입니다. 바람의 입장에서, 영역 동물인 고양이의 입장으로 추정한다면, 보리는 바람의 영역에 침입한 존재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려나 조금씩 안정감을 찾는 것도 같으니 다행입니다. 물론 아직 더 지나야 알 수 있지만요.
그나저나 어쩐지 제가 없으면 둘이 애정애정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이건 저의 망상이자 바람이자 추정. 근거는 없습니다.
+
가급적 매일 보리(와 때때로 바람)의 사진을 구글플러스에 올리고 있으니 사진이 궁금한 분은 참고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