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쪽글입니다. 아직은 수업 쪽글을 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끙..
2014.03.17. 수업 쪽글
상처받는다는 것
-루인
박가분. 『일간베스트의 사상: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파주: 오월의 봄, 2013. 인쇄본.
나는 상처를 견디고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힘이 최소한 다음 두 가지를 전제한다고 믿는다. 내가 상처 받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란 점, 그리고 나는 결코 오류가 없는 존재가 아니란 점, 이 두 가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내가 받은 상처 혹은 내가 겪은 상처와 조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에 “나 상처받았어”라고 즉각 반응하는 행위와 항상 같지는 않다. 모든 사람은 상처를 받지만 모든 상처가 동등한 권력 관계와 의미 체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상처의 권력 구조, 상처의 권력 관계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상처와 조우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상처 혹은 내가 상처라고 주장하거나 인식하는 사건과 조우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상처를 견디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힘은 또한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인정하는 힘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받은 상처를 견디고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해도, 마냥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타인에게 준 상처를 자기연민(‘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다니…’)이 아니라 권력 구조에서 인식하고 사과하고 반성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이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어려워 하는 부분은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나를 방어하지 않으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직도 많이 어린(그러니까 많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거의 항상 나를 먼저 방어하고 싶고 그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갈등한다. 길건 짧건 그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내가 상처를 가해한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 내가 무엇을 사유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려고 애쓴다(하지만 얼마나 ‘진정’으로 반성하는지엔 자신이 없다).
나는 내가 받았거나 주었던 상처와 조우할 수 있는 힘이 급진적 정치학의 주요 토대라고 믿는다. 자신이 받은 상처 및 준 상처와 조우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 정박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적극 개입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이러한 내 믿음과 달리 나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평가한다). 다른 말로 상처를 두려워 하는 마음, 그리하여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자신의 세계를 폐쇄하고 관계를 단절하거나 피상적으로 만든다. 그 자리에 맥락은 사라지고 ‘팩트’라는 숫자만 남는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의 사상을 분석한 박가분은 “‘너도 나도 병신이다’라는 상호인정”(149)이라는 태도가 일베 및 일게이(일베 사용자)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베는 ‘우리는 모두 병신이다’라는 장애혐오적 언어를 밑절미 삼는 사유체계 혹은 상호인정체계를 통해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역을 부정하려 든다고 한다. 그래서 반말이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다. 박가분의 분석처럼 ‘우리는 모두 병신’이라는 태도가 상대를 평등하게 인정하려는 방식이라고 해도, 나는 이것이 상대에게 개입하지 않는 태도, 혹은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는 태도로 읽으려 한다. ‘나도 병신, 너도 병신, 우리는 모두 병신’은 결코 ‘겸손’의 자세가 아니다. 이미 ‘병맛만화’나 ‘기승전병’이 일베 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많은 커뮤니티 및 웹툰 등에서 문화로 향유되는 현재 상황에서 ‘병’ 그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다. 차이라면(차이가 아닐 수도 있다) 일베의 이런 태도는 상호인정이지만 또한 정서적 개입의 단절이기도 하다. 즉, 나는 너로 인해 상처받고 싶지 않으며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리 없다는 태도다.
박가분이 계속 분석하듯, 일베의 구성원은 뉴비가 아닌 이상 일베 커뮤니티 외부에서 자신이 일베란 점을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즉, 일베에서 하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통념 혹은 관습적 가치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될 것을 알기에 일베에서의 태도와 일베 아닌 곳에서의 태도를 철저하게 구분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 태도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는 자기 확신의 태도, 다른 말로 ‘자기 무오류의 신화’로 읽힌다. 일베가 아닌 곳에선 욕먹을 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일베 커뮤니티에서만은 그렇게 한다는 행동은 ‘내가 그런 것도 몰라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학적 행동일 수 있다고 해도 동시에 자신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행위기도 하다. 다른 말로 ‘네가 잘못했다’, ‘네가 틀렸다’와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음이며 또한 ‘네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란 점을 인정하지 않음과 같다. 이것은 정확하게 내가 틀릴 수 있고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자기 무오류의 신화’를 유지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행위(‘어차피 우리는 모두 병신인데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는가’)는 또한 내가 상처받을 수 있음을 부인한다. 대신 ‘나는 상처받지 않지만, 우리는 혹은 나는 박해받고 있다’는가능하다.
일베 사용자가 자신들을 ‘또 다른 의미에서 소수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인권이라는 단어, 권리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한국에서(일례로 나는 전화 음질 불량으로 내 목소리가 상대에게 전달죄 않은 적 있는데, 그때 상대는 “이거 전화한 사람의 인권은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일베는 자신을 소수자라고 주장한다. 만약 미국이었다면 (토마스 프랭크의 분석처럼)자신을 기독교 식의 순교자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상처받지 않지만, 나는 오류가 없지만, 외부에선 우리를 핍박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베는 미국의 보수 우파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박가분은 일게이의 행동을 냉소주의로 해석하면 곤란하다고 여러 번 지적한다. 이것은 냉소주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냉소주의는 기존의 가치 체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상처받고 싶지 않고 개입하고 싶지 않은 태도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내게 일게이의 태도는 냉소주의로 읽힌다. 다른 말로 자신이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지 않고,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리 없다고 믿으며, 내가 일베에서 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자기 무오류의 신화는 냉소주의의 또 다른 판본이란 뜻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상처를 말하고 싶다. 더 정확하게는 상처와 조우할 수 있으냐 그렇지 않으냐가 삶에서 어떻게 다른 정치적 가능성을 야기하는지를 같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