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국가의 의무

시간이 지날 수록 울화가 더 크게 차오른다.
나는 재난 상황에서 국민을 구조하는 등 적극 나서는 것, 체계적 움직임으로 실종자 가족이나 유족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국가/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 행위이자 애도 행위라고 믿는다. 물론 날씨 등의 상황에 따라 구조원이 적극 투입되지 못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총괄본부는 정확한 사실과 적절하고 신속한 판단으로 움직여야 한다. 구조작업자의 안전과 함께 사고 상황에 처한 사람을 신속하게 구하도록 적절하고 때론 과감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이자, 위로 행위다. 그런데 이런 게 없다. 구조 작업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해야 하는 이들은 자신의 밥그릇만 챙기기 바빴고 책임을 회피하기만 바빴다. 이것이 국가인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도 하지 않는 게 국가인가. 대통령은 정부 탓을 하는 황당한 상황에서, 단 한 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땅에 국가가, 정부가 존재하는가. ‘우리’에겐 그런 게 없다. 공권력으로 국민을, 시민을 진압하는 집단은 있어도 국가는 없다.
최소한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는 이 땅에서, 고인과 실종자와 그 가족과 주변 사람만 서럽다. 부디, 좋은 곳에 있기를, 그리고 다음 생이 있다면 부디 한국에선 태어나지 않기를.

여이연 제66차 콜로키움. [라벤더 위협과 바이섹슈얼 선택]

많은 분이 참가하시면 좋겠습니다! 히히히.
여이연 제66차 콜로키움. [라벤더 위협과 바이섹슈얼 선택]
발표: 이브리
장소: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발표자 소개: 바이섹슈얼, 퀴어, 페미니즘 관련 글을 읽고 번역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연구원 중 하나이며 「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운영위원입니다.
발표 내용:
1969년은 전미여성협회의 초대 회장 베티 프리단이 ‘라벤더 위협 Lavender Menace’ 라는 유명한 문구가 들어간 연설을 한 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벤더 위협”이란 게이/레즈비언/비이성애자를 상징하던 라벤더 색을 빗대어 비이성애를 위협으로 인식한 표현입니다. 프리단을 비롯한 몇몇 페미니스트는 여성협회의 레즈비언과 그들이 제기하는 의제를 여성운동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거나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심지어 협회 내 레즈비언 활동가의 존재까지 부인하며 레즈비언 운동과 거리를 두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시위를 하고, 선언문을 발표하며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바야흐로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1990년, 미국 메사추세츠 노샘프턴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자긍심 행진(pride parade)에서 1989년에는 표기했던 바이 섹슈얼을 제외하고 “레즈비언 & 게이 퍼레이드”로 재개명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커뮤니티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이 논쟁은 단순한 행진의 이름만을 둔 의견 나눔이 아니라 커뮤니티에 바이섹슈 얼을 포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분쟁이었습니다. 바이섹슈얼을 둘러싼 유사한 논쟁과 분쟁이 비슷한 시기에 영국/미국의 여성이반 커뮤니티에서 발생했으며, BDSM 및 레 즈비언 에로티카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의 레즈비언 커뮤 니티에서 ‘바이섹슈얼’은 분쟁의 불씨를 소환하는 키워드 였습니다.
최근 커뮤니티 안팎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바이 섹슈얼로 정체화하는 인구가 증가 중이라는 사실은 종종 동성결혼권리를 성취해 낸 서구의 ‘동성애자 운동의 종말’을 보여주는 증상으로 독해되곤 합니다. 바이섹슈얼 정체성은 운동과 정치에 대한 위협으로 재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현재 한국의 성적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그 열기는 덜할지 모르지만 비슷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듯 합니다. 관련된 운동과 연구의 지형까지 포함해서 바이섹슈얼은 대략 두 가지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하나는 곧 커뮤니티를 떠날 비윤리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존재, 기꺼이 결혼으로 이성애 정상성을 구현하며 그것을 열망하기까지 하는 존재, 필연적으로 성적소수자의 권리투쟁에의 헌신과 열의가 동성애자보다 못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횡단하는 존재, 이성애규범 뿐 아니라 동성애규범성까지 깨버리는 문제적이고 전복적인 존재로서의 바이섹슈얼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두 이미지는 서로를 지탱하는 동전의 양면이며, 그 뿌리가 되는 인식론은 서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필요한 맥락에서 편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연구자의 구미에 맞게 바이섹슈얼을 재단한 다음 소환할 뿐입니다. 그렇게 소환된 바이섹슈얼리티가 무언가에 대한 욕망인지, 실천인지, 정체성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누구의 욕망이고 어떤 실천이며 무엇 과의 동일시인지, 가장 중요하게는 이러저러한 개념으로 바이섹슈얼을 규정하고자 하는 연구자 자신의 의도와 욕망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아직 충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이번 콜로키움에서, 평소에는 별 필요 없지만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으로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 등장할 때에 한해서 편리하게 불러냈다가 다시 비가시의 영역으로 추방할 수 있는 양순한 바이섹슈얼이 아니라, 게이/레즈비언 정치와 불화하고 충돌함으로써 퀴어 인식론에 자신을 기 입하고자 하는 바이섹슈얼 이론 중 일부를 같이 검토하고 토론해보는 시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Man vs. Wild 베어그릴스

약간의 심리적 여유가 생겨서, E가 관심이 많은 베어그릴스(Man vs. Wild)를 몇 편 봤다. 경기버스를 타면 단편적 모습만 볼 수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국내 방영분 몇 편을 머리 식히고 싶을 때 조금씩 봤는데… 아아, 나는 결코 저런 삶을 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 정도는 저런 경험을 해봐도 재밌지 않을까라는 다소 진부한 감상.
그러니까 이를 테면 물뱀을 잡아서 이빨로 머리를 떼어 낸 후 꿈틀거리는 몸을 날로 야금야금 먹고 난 다음, 아침을 먹었으니 걷겠다고 한다거나. 고목을 해체하며 벌레를 찾다가 안 나오니까 밥을 먹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거나. 죽은 동물의 몸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를 보며 좋은 단백질이라고 먹는다거나. 이미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그런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떠들고 싶은 감정으로 봤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카메라촬영인을 가장 많이 의식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주인공과 동일한 환경을 다닌다는 점에서 더 대단하기도 하다. 때론 더 고생이기도 하고. 그래서 베어그릴스보다 카메라촬영인이 더 대단하고 카메라를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카메라촬영인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베어그릴스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도 든다. 이유는 단 하나. 이 프로그램은 방송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구마구 떠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속사포처럼 얘기하는 노홍철처럼. 흐흐흐. 베어그릴스 역시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 셀프 카멜라를 켜고 떠드는 식으로 현재 상황을 적절히 설명하고 긴장감을 줄 말을 끊임없이 한다. 방송이란 측면에선 이것이 중요하다. 베어그릴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많지는 않아도 분명 여럿일 테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도 방송을 위해 적절한 대화를 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이 카메라촬영인과 베어그릴스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베어그릴스는 생존 방식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겠지만, 방송의 역할이나 방송 구조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꽤나 재밌다. 어릴 땐 늘 집을 나가서 떠도는 상상을 하며 살았기에, 그 시절의 상상을 자극하기도 해서 흥미롭기도 하고. 물론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는 삶이 결코 편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진 않는다. 그럼에도 언젠가 한 번 정도는 너무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베어그릴스의 가벼운 판본으로 비슷한 경험을 해보고 싶기는 하다. 물론 몇 시간 안 지나 후회하겠지만.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