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혹은 어떤 전설이 가능한 시대

4집 발매로 바쁜 활동 중에 전화가 왔어. 깡촌에 요양 병원 원장이었는데 14살 지체장애 여자애가 용필이 4집에 있는 비련을 듣더니 입원 8년만에 처음 감정을 보이더라는 거야. 눈물을 흘리더라는 거야. 여자애 보호자 쪽에서 돈은 원하는만큼 줄테니 용필이가 직접 불러줄 수 없냐고, 와서 얼굴이라도 보게해줄 수 없냐고 부탁을 하더래.
당시에 용필이가 카바레에서 한 곡 부르면 … 지금 돈으로 3,4천쯤 받았거든? 용필이한데 이 이야기를 했더니 피우던 담배를 바로 툭 끄더니 병원으로 출발하자는 거야. 그날 행사가 4개였는데 다 취소하고 위약금 물어주고 시골 병원으로 갔어.
병원 사람들 놀라자빠지지. 용필이가 여자애부터 찾어. 여자애가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있더라고. 용필이가 여자애 손 잡고 비련을 부르는데 여자애가… 여자애가 펑펑 울더라고… 여자애 부모들도 울고… 용필이가 여자애 안아주고 사인씨디 주고서 차에 타는데 여자애 엄마가 물어. 돈 어디로 보내면 되냐고. 얼마냐고. 용필이가 그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될 돈보다 더 비쌉니다.”
-조용필 전매니저 최동규씨 인터뷰 중 발췌
작년말인가 조용필이 ‘Hello’와 ‘Bounce’로 인기가 한창일 때 위의 기사가 화제였다고 한다. 난 최근에 알았다. ;;;
나는 이 인터뷰가 100%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분명 어느 정도 전설과 신화로 부풀려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사인씨디라니.. 엘피나 테이프겠지. 그리고 조용필은 1980년 복귀 이후 밤무대에 서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당시 위대한탄생의 멤버들이 상당히 편했다고. 공연에 집중하면서 밤무대에 서지 않아도 괜찮고 월급제라 수입이 안정적이라서. 물론 나보다야 전매니저인 최동규씨가 더 정확하게 알겠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허구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조용필과 관련한 부분은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다. 몇 년 전 소록도를 다시 찾아,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가수로 화제가 된 것처럼 이런 이야기가 허구라고 여기진 않는다. 그저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부분이다.
조용필의 행동은 지금처럼 체계적 매니지먼트가 만들어지기 전에나 가능하단 점이다. 당일 행사가 이미 몇 개가 잡혀 있고 위약금도 상당한 상황에서 가수 단독의 결정으로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누군가를 찾아가는 게 지금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가수와 매니저는 다른 행사를 취소하고라도 ‘사연의 사람’을 찾으러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 사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가수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고 매니저, 다른 멤버, 소속사 사장 등과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하여 당일 행사는 모두 참가하고 다른 일정이 없는 날 ‘사연의 사람’을 찾아갈 것이다. 때때로 기자를 대동할 것이고.
지금의 매니지먼트가 가수에게, 연기자에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노예계약이란 비판도 많지만 어떤 부분은 상당히 좋은 것이다. 하지만 조용필이 했다고 하는 그런 사건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 당대 연예계에서 조용필과 같은 위상의 인물이 조용필처럼 행동하는 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 개인에게 너무도 많은 것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신화 같은, 전설 같은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으리라. 어떤 게 더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그냥 시대가 변했다는 뜻이다.

잡담, 범주의 의미

범주를 고민한다는 것은 ‘나는 이런 존재야, 그러니 난 너와 달라’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범주를 고민함은 존재를 혹은 우리 각각이 세상과 부딪히는 방식을 구획하는 권력을 사유하겠다는 뜻이다. 문제의 핵심은 ‘나는 이런 범주니까 날 제대로 불러’가 아니다. 핵심은 내가 무슨 변태건 상관없이 특정 틀거리에 날 끼워맞추고 그것으로 박제하는 권력 작동이다. 그러니까 내가 트랜스젠더기에 누군가가 날 트랜스젠더로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 방식으로 트랜스젠더를 박제하고 그 형상에 내 삶과 행동도 모두 끼워맞추는 인식 체계가 문제다.
비슷하게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나’를 제외한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는 것, 그리하여 무의미한 논의라고 말하는 건 문제가 있다. 특정 용어만 반복해서 사용한다면, 논의에서 그 용어의 역사적 맥락에 맞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테면 호모포비아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이 용어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기에 문제라고 비판하며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를 병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난감함을 야기한다. 그것보다 호모포비아라고 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는 글이 이 용어의 개념과 역사를 얼마나 잘 반영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호모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동시에 점검해야 한다. 호모포비아만 사용하면 안 되고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를 같이 사용해야 한다면, 이런 용법은 동일한 논리에 따라 바이를 배제한다. 그럼 퀴어포비아는 어떨까? 퀴어포비아를 사용하면서 동성애자만 혹은 비트랜스-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만 떠올린다면 퀴어포비아를 사용한다고 해서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포괄어를 사용하는 것은 더 많은 책임과 사유를 요구한다.. 물론 퀴어가 모두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대표할 필요가 없음도 분명하지만.
…그냥 이것저것 잡담을 조금 덧붙였다.

고마워, 축하해.

하루 늦었지만 너의 생일을 축하해. 해마다 네가 태어난 날 너의 생일을 기념했지만 올해는 하루 늦었어. 너의 생일을 잊진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네. 미안. 하지만 정말 미안한 건 너의 생일에 나는 외부 일정이 많았고 많은 시간 넌 혼자 보내야 했지. 이게 가장 미안해. 생일 같은 날은 온 종일 오직 너를 괴롭히면서, 너의 잠을 방해하면서, 너와 노닥노닥 놀면서 보내도 좋을 텐데. 그렇게 못 하고 평소처럼 별다른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보내서 미안해. 하지만 너의 생일에 내게 무척 각별한 것처럼 너의 생일이 그냥 일상이면 좋겠어. 네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지 않아도 괜찮을 그런 느낌이면 좋겠어. 그것은 너의 특별함이 내 삶에서 희미해짐이 아니야. 하루하루가 특별하기에 너의 생일이 오히려 무덤덤한 날이길 바라는 거지. 너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특별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의 생일을 기억해. 너의 생일을 챙기고 싶어하지. 내 마음에 머무는 어떤 불안 때문일까? 내 마음 한 곳에 있는 걱정이 너의 생일을 더 특별하게 챙기도록 하는 것일까? 너와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섭섭하지 않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 그냥 하루하루 고릉고릉하고 냥냥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 한없이 평범하고 한없이 진부한 그런 삶이고 싶어. 그러니 너의 생일을 축하해. 나와 함께 한 너의 선택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