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입니다. 퀴어문화축제 자체는 6월 3일부터 6월 15일까지고요. 네, 행여나 깜빡했거나 날짜를 헷갈리신 분 중에 이 글을 미리 보셨다면 얼른 참가하러 오시길 바라면서 이 글을 씁니다. 올해는 더욱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바라거든요.
장소는 서울 신촌 연세로입니다.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진행하며 퍼레이드는 5시 30분 즈음부터 진행한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주소를 참고하세요. http://www.kqcf.org/xe/parade
늘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바라지만 올해는 이 바람이 더 큽니다.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보수기독교와 정치권이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거나 방해라려는 움직임을 본격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퀴어 행사에 부정적 반응은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행사 승인 자체를 취소시키고 당일 방해공작을 벌일 거라는 얘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해에 좀 불안하고 두려울 듯합니다. 적어도 저는 두렵습니다. 네, 두려워요.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면 무척 두렵고 무서워요. 그래서 저는 더욱더 참가하려고 합니다. 두려워서 참가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축제니까요. 그리고 함께 하면 제가 느끼는 두려움이 그리 큰 것도, 엄청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님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만약 염려가 된다면 바로 이런 이유로 참가하시면 좋겠어요.
물론 퀴어문화축제의 행사가 퍼레이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퀴어문화축제 공식 영화제, 퀴어영화제가 있습니다. http://kqff.co.kr/
아울러 다양한 이벤트가 있습니다. http://kqcf.org/xe/event 찾아보시고 어느 하나라도 참가하시면 정말 좋겠어요.

공유하는 시간을 개별적으로 살아가기, 개별적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기: 트랜스젠더의 시간

바람과 보리가 신나게 놀고 저는 이제 기말 기간.
수업 쪽글입니다. 시간성 관련 수업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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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일. 쪽글01
공유하는 시간을 개별적으로 살아가기, 개별적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기: 트랜스젠더의 시간
-루인.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지는 현재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두 가지가 전혀 별개의 사건 혹은 경험이란 뜻은 아니다. 지금 내 삶은 과거, 내 몸에 침전된 역사를 통해 미래로 향하고, 또 내가 살고 싶은 미래 전망이 내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구성한다. 즉, 이것은 거의 동시적 경험이다. 이를 테면 누군가가 내게 제공하는 정당한 서비스가 아직도 편하지 않고 몸둘바를 모르는 내가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거창’하지 않다. 이것은 나의 계급 경험, 내가 주로 만난 사람과의 경험을 반영한다. 내 과거, 내 몸에 침전되고 체화된 경험이 지금 내가 살아가며 세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내 미래는 현재화를 거쳐 과거화된다(내 미래의 일부는 내 과거에 있다). 그리고 내 미래,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로 살아가고 싶은 나의 바람은 지금 내 삶을 조율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함이 아니다. 즐겁고 경쾌한 지금과 더 신나고 유쾌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 과거도 미래와의 관계로 재해석하곤 한다. 나는 주류 미디어가 트랜스젠더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다. 내 과거는 내가 지향하는 가치, 내가 사랑하는 정치학을 통해 재구성되고 선별적으로 구성되며 그리하여 특정 의미를 갖는다. 다른 말로 내 과거는 현재화를 통해 미래화된다(내 과거의 일부는 내 미래에 있다). 그러니까 내겐 과거에서 흐르는 시간과 미래에서 흐르는 시간이 공존한다. 나는 이것을 늘 동시적 사건으로 겪는다.
나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지금’이라는 추상적이고 구체적 찰나에 함께 겪지만,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나 혼자만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또한 타인도 살아가는 시간이다. 나는 과거를 나만의 방식으로 회고하지만 내가 회고하는 과거는 그 시기를 겪은 동년배와 특정 정서 및 사건을 공유하며 회고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2002년 월드컵의 길거리 응원전을 직간접으로 겪은 이들,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할 당시 십대였던 이들은 각자 그들만의 정서를 공유한다. 특정 시기를 특정한 정서로 공유하면서 ‘우리’는 시간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겪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다. 개인에게 의미가 다름에도 특정 시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사회적 시간 관념/지식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시간,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특정 집단이나 범주에 투사하는 시간의 관계는 삶 그리고 시간 경험을 복잡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의 삶과 시간은 이런 복잡함의 한 측면을 재현한다. 이 사회가 상상하는 수준에서 트랜스젠더는 mtf라면 충분히 여성스럽고, ftm이라면 충분히 남성스럽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이미 (mtf라면)여성이거나 (ftm이라면)남성이다. 혹은 mtf라면 과거부터 여성스러운 모습을 꾸준히 그리고 충분히 재현해야 했고, ftm이라면 과거부터 남성스러운 모습을 꾸준히 그리고 충분히 재현해야 한다. 트랜스젠더에게 ‘클로젯’의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 편이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가 지배 규범적 지식체계, 지배적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설명하기 위해선 규범적 상상력과 협상할 수 있는 몸을 재현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에서 상상하는 트랜스젠더는 이미 트랜스젠더(혹은 비트랜스젠더로 통할 외모를 갖춘 존재)다. 까끌한 수염 흔적이 있으면서 자신을 mtf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는 것은, 적어도 이 사회의 상상력에선 통용되지 않는 행위/지식이다.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로 존재하기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지금 내가 트랜스젠더라고 설득하기 위해 과거를 ‘지배 규범적 상상력’에 맞춰 재구성할 수는 있다. 이럴 때의 시간은 허여된다. 하지만 지금부터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 위한 시간은 별로 허여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로 등장한다는 것은 어느 날 “쨘!”하고 변한 모습으로 나타남이지 매일 조금씩 변하는 모습으로 나타남은 아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조치를 선택했다면, 그래서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고 해서 몸이 “쨘!”하고 변하지는 않는다. 몸은 천천히 변하고 원하는 몸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내가 원하는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한다. 이미 여기서 트랜스젠더에게 시간은 ‘불가능한 기획’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을 기획한다고 해서 그가 몸이 변하는 시간에만 집중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트랜스젠더는 또한 이 사회의 시간성 기획, 동년배에게 요구하는 지배 규범적 시간도 살아야 한다. 27살의 트랜스젠더가 자신이 원하는 몸으로 얼추 변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성공’이며 ‘충분’하냐면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사회의 나이 체제에서 요구하는 27살의 삶도 살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획이지만, 혹은 불가능하진 않다고 해도 양립하기가 쉽지 않은 기획이지만 그럼에도 이 기획에 부합해야 한다. 지배 규범적 생애주기(시간성)의 기획에 맞추지 못 했을 때의 사회적 평가는 냉정하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현대 사회의 상상력에서 트랜스젠더가 몸 변형을 끝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취직할 준비, 먹고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트랜스젠더의 특정 경험은 무시되거나 삭제된다. 의료적 조치를 하느라 다른 준비를 못 했다는 것, 혹은 통상의 사회적 관념에 부합하지 못 했다는 것은 ‘납득할 만한 사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든 개인을 투명한 주체로 가정하며 단일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우리 사회의 지식체계에서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느라 다른 준비를 소홀히 했어도, 다른 준비를 하느라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았어도 잘못 산 것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청소년은 의료적 조치를 거부당한다, 성인 트랜스젠더도 청소년에겐 공부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상상하는 방식은 삶을 평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나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또한 타인과 공유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이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지배 규범은 존재 각각에게, 특히나 규범적 존재와 비규범적 존재에게 다른 시간/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또한 존재의 규범성과 비규범성은 어떤 의미에서 각각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나눠질 수도 있다. 그리고 비규범적 존재의 시간은 어떻게 해서든 이미 ‘실패’한 시간이며 ‘실패’를 예정한 시간이다. 그런데 규범적이라고 분류되는 존재도 이 사회의 시간 기획에서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며 언제나 ‘실패’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시간적 삶의 기본값이다. 그 어떤 시간적 삶도 규범적 기획에서 ‘실패’를 가정할 수밖에 없다면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시간의 ‘실패’를 어느 정도는 공유하며 살아간다면, 도대체 무엇이 ‘실패’고 누가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간/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규범과 비규범을 다시 사유할 길을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