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피로연

트랜스젠더 본인의 글을 모은 책이 나오면 좋겠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부모의 글을 모은 책도 나오면 좋겠다. 트랜스젠더 본인의 글보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가 트랜스젠더여서 부모의 글이 더 궁금한 것일 수도 있지만. 1차로 세 종류의 책이 나오면 좋겠다. 트랜스젠더 본인의 글을 모은 책, 트랜스젠더 부모의 글을 모은 책, 트랜스젠더 애인의 글을 모은 책. 일단 이렇게 세 종류의 책이 나오면 좋겠다. 그 다음엔 또 여러 가지 주제로 다양한 사람의 글을 모으면 좋겠고.
어제 있은 트랜스젠더 피로연(티지 피로연)은 정말 멋진 자리였다. 트랜스젠더가 나와 자신의 삶을 축하하는 자리란 점에서도 좋았지만 어머니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얘기가 정말 좋았다. 아직 정리가 다 안 되는 많은 배움이 있었다. 아이가 일반 여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는 말, 자식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시간의 괴로움 등을 그저 피상적으로 알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이건 배움의 자리기도 했다.
다음엔 더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기를(앞으로 두 번 관련 행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렇게 깰바사서야 혹은 껠바사서야.

이렇게 깰바사 혹은 껠바사서야 어떡하나 싶다. 너무도 껠바슨/깰바슨 인간이라, 매일 아침 나는 내가 어쩜 이렇게도 깰바슨지/껠바슨지를 탓한다. 아침마다 겪는 자학의 시간. 혹은 내 껠바슴/깰바슴이 야기하는 촉박한 삶.
주중 5일, 알바를 가는 매일 아침 5시 50분 즈음 눈을 뜬다. 이제 나는 8시 10분 즈음엔 집에서 나서야 여유롭게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눈을 뜨면 10분 정도 눈을 뜬 것도 감은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있는다. 그런 다음 자리에 앉아선 5분 정도 바람을 쓰다듬으며 골골거리는 시간을 갖는다. (각각의 시간은 알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이불에서 빠져나와 아침을 준비한다. 반찬은 이미 만들어뒀으니 경우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뜨사주기만 하면 된다. 밥은 퍼서 그릇에 담거나 햇반을 데파주면 된다. 어떤 날은 라면을 끓이니 대충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거나 라면이끓는 동안 도시락을 대충 챙긴다(도시락 역시 얼추 준비되어 있다). 아침을 후루룩 먹고 나면 이제 전날 먹은 도시락통, 몇 개의 컵, 그리고 아침에 사용한 그릇을 설거지한다. 다만 수요일이나 목요일이면 세탁기를 돌린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서 이제 씻는다.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화장실에서 나와 ㅅㅈㅊㅇ을 하고 나면 도시락을 챙기고, 물을 챙긴다. 이제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긴다. 수요일 혹은 목요일이라면 이 즈음 빨래를 넌다. 그리고 바람과 인사를 하고 출발한다.
아침에 많은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밥 먹고, 설거지 하고, 경우에 따라 빨래를 하고, 샤워하고, 준비해서 나온다. 그냥 누구나 할 법한 일이다. 그런데 이걸 얼추 두 시간에 다 못 한다. 그래서 가방을 챙길 즈음이면 늘 8시 5분이거나 그 즈음이다. 제대로 나가려면 이 즈음 가방을 다 챙겼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가방을 챙긴다. 그러니 8시 15분에야 간신히 집에서 나간다. 물론 바람과 인사하는데 2-3분은 걸린다. 이젠 정말 미친 듯이 걷는 수밖에 없다.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를 속도로 걸으면(뛰지는 않는다) 한숨 돌리고 나서 지하철을 탈 수 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 이렇게 깰바슨/껠바슨 내가 원망스럽다. 딱 5분만 더 일찍 움직여도 헥헥거리며 걷지 않을테고 그렇게 조급하지 않을테고 바람과 더 길게 인사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 하고 껠바사서/깰바사서 문제다. 계속 늦으니 마음은 조급하고 짜증도 나고 나의 껠바슴/깰바슴을 탓한다.
나는 왜 이렇게 깰바슨/껠바슨 걸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
어제 아침, 내가 너무 껠바사서/깰바사서 문제라고 E에게 행아웃을 했더니, 이게 뭐냐고 물었다. 구글링하니 구글에도 없다. 물론 좀 더 검색하면 나오긴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이렇게 안 쓴다니 이게 더 충격이다. 난 ‘껠바사서’/‘깰바사서’란 말을 ‘뜨사주다’, ‘데파주다’ 정도로 널리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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깰바사와 껠바사를 병기하는 이유는 정확한 표기법을 모르겠어서..;;

정치학은 범주가 아니라 삶이 만든다.

어느 글을 읽었다. 게이는 끔찍하게 혐오받는 존재며 우리 트랜스젠더는 그런 게이와는 다르니까, 둘이 엮이지 않도록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커밍아웃 같은 용어는 게이의 용어며, 커밍아웃이란 용어는 자신을 동성연애자(!)로 밝힌다는 뜻이니 트랜스젠더는 커밍아웃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좀 심하게 말하는 것 같다고? 지금 이건 매우매우 순화한 표현이다.
한 명이 이런 글을 쓰고 몇 명이 댓글로 동의를 하는 구조다. 물론 모두가 이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의 잘못된 지식을 비판하고 어떤 사람은 불편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의학과 관련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졌고, 그래서 커뮤니티에서 어느 정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그의 말에 대체로 호의적이며 강한 반박은 없다.
처음엔 뭐라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같은 내용을 변주하며 게시판에 남기는 걸 읽으면서, 계속해서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 계속해서 반박 댓글을 달아야 할까? 아님 그냥 무시해야 할까? 고민이다. 게시판에선 가급적 눈팅만 하고 싶기에 이럴 때마다, 그러니까 명백하게 잘못된 지식을 중요한 말처럼 얘기하는 걸 들을 때마다 눈팅 이상을 해야 할까를 고민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고민이다. 왜 자신에게 가해지는 혐오를 줄이기 위해 다른 존재를 배제하려고 할까? 게이를, 혹은 LGB와 T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LGB는 혐오의 대상이어도 T는 아니어야 한다는 믿음은 어떤 삶의 경험으로 구성된 것일까?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람이 트랜스젠더는 혐오하지 않을까? LGB포비아에게 T는 LGB와 다르니 혐오하지 말라고 말하면 흔쾌히 그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것은 어떤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경험이 만든 인식체계일까?
내가 트랜스젠더를 급진적 존재로 이해하길 거부하는 이유면서 보수적 존재로 이해하길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랜스젠더는 존재 자체로 젠더를 다시 사유하도록 하기에 급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를 추상화할 뿐 개인의 삶을 부정한다. 그냥 다양한 정치학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진보적이다, 급진적이다, 보수적이다와 같은 평가를 범주에게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나는 급진적 정치학을 지속하고 싶지만 과연 이 기조를 평생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평생 급진적 정치학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그리하여 내가 죽을 때에야 내가 진보정치학이나 급진정치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보수정치학일 수밖에 없다.)
아무려나 답답하다. 갑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