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도 성실하게, 저항도 성실하게.

내가 기억하는 수준에서 거의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그를 만난다. 물론 그는 길 건너편에 있고 우리가 직접 부딪힌 적 없으니 나를 모를 것이다. 나 역시 서둘러 지하철을 환승하기에 먼 거리에서 일별할 뿐이다. 하지만 거의 매일 아침(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지 한두 번 빠졌을 뿐이다) 전도를 하는 그를 보며, ‘매일 아침 나와서 전도를 하는 힘은 무엇일까’ 궁금함을 느낀다. 그동안 실외로 연결된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전도를 했던 사람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오직 그 사람만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말하고 있다. 이른 아침의 길거리 전도가 그에게 어떤 경제적 이득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짐작하자면 경제적 이득만으로는 매일 아침 전도를 하기 힘들지 않을까? 단지 경제적인 이유로 매일 아침 나온다면,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이나 눈이 많이 내린 겨울, 가장 춥다는 날의 이른 아침에 전도를 하러 나오긴 힘들 것 같다. 그것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으로. 그렇다면 그 힘은 종교적 믿음일까? 그런데 단지 종교적 믿음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종교가 없는 나는 종교의 힘을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교의 힘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머뭇거린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것이기도 하니 큰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이것이 궁금하다.
몇 년 전부터 트랜스젠더 이슈로 활동하고 있는 내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전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퀴어포비아와 동의어로 인식된다. 한국 사회에서 반동성애, 반트랜스젠더 이슈를 가장 열심히 얘기하는 집단은 보수 기독교 집단이며 이들은 대체로 보수 우익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 집단에서 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말한다고 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말하는 사람이 곧 보수 기독교 집단에 속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혹여 그렇다고 해도 그가 전도하는 내용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의 모든 삶을 싸잡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 LGBT 이슈에선 나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겠지만 다른 이슈에선 어떤 공동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공유할 지점이 전혀 없지는 않을 텐데 그럼 우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주목하고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소 엉뚱할 수 있지만 그의 성실성 때문이다. 매일 아침 나와서 전도하는 성실성 말이다.
수업 쪽글의 일부로 작성했으나 제출 2시간을 남기고 쪽글을 새로 작성했고 그렇게 날린 글의 일부. 확실히 나는 성실함에 매료된다. 성실함이 힘이다. 일탈도 성실해야 할 수 있다. 그러니 성실하게 저항하고 성실하게 전복하자. 까짓.

트랜스젠더 / 주변인과 함께하는 티지피로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트랜스젠더 / 주변인과 함께하는 티지피로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사연신청하기 클릭!  http://bit.ly/1dvHp6L
티지 피로연은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진행하는, 트랜스젠더 / 주변인과 함께 트랜스젠더 / 주변인의 삶의 중요한 시간들을 함께 이야기 하고, 서로 축하와 위안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오는 3월 22일에 열리는 티지 피로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꼭 오셔서 함께해주세요 🙂
문의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org),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만들기 기획단(transgender.or.kr 또는 jogakbo1315@naver.com)으로 해주세요.
::프로그램::
-인생 조각보 펼치기:참가자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시간
-사연 조각함: 온라인으로 접수된 사연들을 DJ가 읽어드려요!
-너의 조각을 요~보여줘: 오신 분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아보아
**당신의 사연을 신청해주세요!
프로그램 중, 사연 조각함
트랜스젠더/친구/가족/애인/지인
1. 기뻤지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2. 서글펐지만 위로받지 못한 이야기들
3. 나만의 특별했던 순간
어떤 이야기든지 좋습니다. 참가가 힘들거나, 나와서 이야기하기 어려우신 분은, 신청버튼을 클릭하고 사연을 남겨주시면 당일날 사회자가 대신 사연을 읽어드립니다.
일시: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저녁 7시~
장소: 홍대 근처 공중캠프

테네시 윌리엄스의 아들들: 영어 경연장, 허접한 질문

지난 목요일 저녁 팀 울프Tim Wolf의 다큐멘터리 <테네시 윌리엄스의 아들들>을 아메리칸센터에서 봤습니다. 다큐 자체는 상당히 재밌습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서술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전 이제까지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중심으로 논의하는 퀴어 이슈를 접했는데 뉴올리안즈 지역의 퀴어 이슈를 피상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울러 운동을 지속하고 삶을 지속하는 힘은 고통의 전시나 과격한 행동이 아니라 유쾌함과 쾌락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요. 이 다큐멘터리를 접할 더 많은 기회가 생겨서 더 많은 사람이 이 다큐를 보면 좋겠어요.
영화 상영 후 감독과 대화를 진행했는데 이 시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독의 답변은 훌륭했습니다. 통역자도 대단했고요. 여기엔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감독과 질의응답을 하는 자리는 영어 경연장이었을까요? 영화를 본 다음 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자리인데 마치 영어 경연장인 것처럼, 훌륭한 통역자가 있음에도 저를 포함한 두 명을 빼면 다들 영어로 질문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나름 유창한 영어로 질문했지만 어떤 사람은 영어 듣기가 안 되는 제가 듣기에도 별로다 싶을 수준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곳은 자신의 영어 말하기 실력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감독과 영화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는 자리인데요. 통역을 믿을 수 없었느냐 하면 비교적 꼼꼼하게 통역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영어로 질문하는 내용도 별로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미국 동성애 운동과 한국 동성애 운동을 비교해달라는 것.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비교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한국의 운동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한국에 며칠 머문 백인감독에게 두 나라의 운동을 비교해달라니요. 얼마나 부끄러운 질문인지 본인은 알까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상황을 문외한임에도 단지 미국 시민권자 백인 남성이란 이유로 그에게 묻는다는 게 얼마나 식민지적 사고방식인지 알까요? 어떤 사람은 감독에게 차별을 겪은적 있는지 물었습니다. 절로 ‘헐..’이란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다른 질문도 비슷했습니다. 감독의 답변만 훌륭했습니다. 이런 질문을 굳이 영어로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별 경험과 관련해서 질문하려고 했다면, 차별을 겪은적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 차별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었는지, 차별과 이에 저항하는 행위를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LGBT 이슈를 다룬다고 하면 어디서든 나올 수 있는 뻔한 질문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에게 “두 유 노우 캉남스타일?”, “두 유 노우 싸이?”라고 묻고,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에게 “두 유 노우 캉남스타일?”이라고 묻는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자신이 어떤 주제를 논하는 자리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 하고, 상대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으면서, 그냥 어디서나 대충 할 수 있는(그래서 사실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다른 L/G/B-T 활동가가 질문을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데 도대체 왜 질문을 안 하는 것이냐고!!! 그러다가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LGBT 혹은 퀴어 관련 행사에 참석할 때 저는 가급적 질문을 하지 않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걸 궁금해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하니까요. 아울러 아마도 저보단 다른 사람의 질문이 훨씬 가치있을 텐데 내가 먼저 질문해도 괜찮을까란 고민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하여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시간을 뺏을 필요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어떤 자리에선 이런 저의 태도가 상당히 의미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자리에선 적극 질문을 해야 한다는 고민을, 지난 목요일 처음으로 했습니다. LGBT 혹은 퀴어 이슈를 적극 사유하는 사람이 LGBT 행사에서 적극 질문을 하지 않아서 “두 유 노우 캉남스타일?”과 같은 허접한 질문이 주를 이룬다면 이것은 결국 LGBT나 퀴어에게만 손해니까요. 논의의 수준을 바꿔나가는 작업은 LGBT/퀴어 활동가와 연구자의 주요 활동 중 하나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동성애 운동을 비교해달라”는 따위의 질문이 얼마나 허접한지 깨달아(다른 자리였다면 이 질문이 훌륭할 수 있겠지만)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도 주요 운동이고요. 그러니 LGBT/퀴어 이슈를 둘러싼 논의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적극 질문하는 건 가장 쉽지만 중요한 운동이라는 걸, 지난 목요일에야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