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때리는 시간

뭐랄까, 어쩌면 올해는 그냥 휴학을 하고 좀 많이 쉬는 방향으로 일정을 잡았다면 더 좋았겠다는 고민을 한다. 등록금이 해마다 오르기에 휴학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고민을 종종 한다. 버티는 삶은 정말 숨이 막히고 즐거운 일도 즐겁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슬프다. 하반기엔 한숨 돌릴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좀 숨을 돌리면서 한동안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 결국 내년 상반기에 한숨 돌릴 수 있을까?
그냥 멍때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되어야 좋은 삶이라고 믿는다. 요즘은 멍때리는 시간도 생산성과 연결되어야만 가치를 인정받는데 그런 것 말고, 그냥 정말 멍하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거리는 시간 말이다. 그런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은 되어야 살만한 삶이지 않을까?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정말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다시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냥 좀 갑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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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화요일(2014.04.29.)에 “라벤더 위협과  바이섹슈얼 선택”으로 콜로키움이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 후후후.
그나저나 여이연 홈페이지는 리눅스+크롬웹브라우저에선 오류가 나면서 열리지가 않네요. 왤까요.

김치

2013년 12월 즈음이었나, 러빙헛에서 김치를 구매했다. 러빙헛 자체(라고 추정하는) 김치는 맛있는 편이 아닌데, 다른 곳에서 담은 김치를 판매대행한다고 해서 구매했다. 그 김치가 상당히 맛있었다. 채식김치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음을 알았고, 러빙헛 신촌점의 김치가 별로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 김치를 몇 번 더 사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물만 남았는데 그 국물도 맛나서 라면 끓일 때 같이 넣고 끓이면 맛이 일품이다. 츄릎…(김치 국물로 끓인 라면 먹고 싶다.)
몇 번을 더 사먹었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 상당히 아껴 먹었고, 얼마전 결국 다 먹었다. 그러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맛난 김치로 만드는 음식이었다. 김치전, 김치찌개 같은 것들. 김치의 양이 넉넉해야 만들어 먹을 수 있고 김치가 맛있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양이 부족해서 아쉬웠다. 뭐, 이거야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요즘 김치찌개가 상당히 끌린달까. 어쩐지 따끈하게 맛난 김치찌개를 먹으면 좋겠는데 그걸 파는 곳이 없다. 러빙헛 계의 김밥천국인 신촌점에도 김치찌개는 안 팔고, 러빙헛 계의 전문식당인 티엔당점에도 김치찌개는 없다. 신촌점에서 제공하는 김치로는 맛난 김치찌개를 만들기 힘들 테니 그럴 수 있고, 티엔당점은 밑반찬으로도 김치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라 어쩔 수 없긴 하다. 아무려나 몇 년 만에 다시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서 아쉬워하고 있다.
그나저나 어째서 나는 어떤 시기엔 김치찌개가 유난히 끌리는 걸까. 김치찌개와 관련해서 기억할 만한 사건도 없는데, 어느 순간 김치찌개가 유난히 끌릴 때가 있다. 그래서 열심히 검색하지만 검색으로는 비건 김치찌개를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비건 김치찌개를 파는 곳이 있다면 매일은 아니어도 상당히 자주 갈 텐데, 아쉽네.

정치적 외로움

정치적 외로움.

이곳에 오는 분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떠올리며 공감할 것 같다. 정치적 외로움. 다른 많은 친밀한 관계에서 얻는 사랑이나 힘과는 별개로 정치적 입장에서, 이론적 사유에서 나 혼자 뿐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 이슈로 계속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지는 않을 때 느끼는 어떤 서운함과 외로움, ‘난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감정 말이다.

이를 테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상당한 관심이 있거나 그 자신 트랜스젠더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종종 어떤 기대를 한다.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공부해서 글을 쓰고 떠들면 좋겠다고. 재능도 있어서 그 기대는 더 커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다른 이슈에 더 관심을 가질 때 어쩐지 서운하고 섭섭하다. 그렇다고 또 이 감정을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누군가 특정 주제를 파고 들며 발화를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때때로 나는 어떤 이슈가 매우 문제가 많다고 화를 내는데 이 감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 문제 의식을 갖지 않을 때 당혹스럽기도 하다. 나만 뭔가 이상한 건가, 혹시 내가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정치적 외로움. 이 말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다른 말로 LGBT/퀴어 정치학이라고 해도 어떤 이슈는 많은 사람의 관심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다른 어떤 이슈는 인식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성(애자의) 결혼은 많은 사람의 관심으로, 마치 한국 LGBT 공동체에 속하면 모두가 긍정적으로 관심이 있을 것처럼 얘기된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소수만,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별관심이 없는 사람도 약간 언급은 하는 그런 이슈가 된 것 같기는 하다. 트랜스젠더 정치가 중요하다는 인식 혹은 불쌍한 트랜스젠더를 도와야 한다는 수준의 인식 정도는 생긴 것 겉다. 바이/양성애 정치는 전혀 아니다. 소수가 혹은 소수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 얘기하지만 LGBT/퀴어 공동체에서 회자되는 방식은 ‘문제로서, 논쟁의 대상인 바이’로만 존재한다. 바이가 아니면서 바이를 떠드는 사람의 자기 위치는 안전하다. 아울러 바이는 여전히 비난의 대상으로, 비정치적 존재로 내몰린다. ‘바이/양성애’가 존재함은 아는 것 같지만 바이/양성애 인식론을 사유하는 경우는 사살상 없다(극소수만 얘기할 뿐). 퀴어의 BDSM은? 같이 이야기하기는커녕 어떤 퀴어 모임은 BDSM을 거부한다. 퀴어 정치가 단지 성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째서? 무성애 정치학은? 인터섹스 정치학은? 극소수만 얘기하고 사유할 뿐 대체로 LGBTAIQ라고 하니 궁금한 집단일 뿐이다.

한국엔 어떤 공동체가 있을까? 존재는 있는데 인식론이 없다면 그것은 무슨 공동체고 어떤 정치학인 걸까. 늘 얘기하지만 동성애가 전부는 아니다. 동성애자의 삶이 먼저 좋아지면 BTAIQ도 자연스레 좋아지고 그런 게 아니다. 때론 동성애자와 그렇게만 묶을 수 없는 존재의 이해가 경합하거나 대립할 수도 있다. 퀴어, 퀴어라며 말하지 말고, 정말 퀴어하게 복잡하게 사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정확하게 나를 포함해서 하는 얘기다). 정치적 외로움을 조금은 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