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혐오, 권력

역사적 기록물을 추적하거나, 역사를 기록한 글을 읽노라면 두 가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혐오의 역사. 혐오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시절 어쩌면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싶은 혐오 발화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발화는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 심한 발화는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는 현재의 것이기도 하다. 혐오는 역사적 사건이고 재생산되는 담론이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발화, 바이를 향한 혐오 발화 모두 역사적 사건이다. 과거의 적나라한 혐오 발화는 지금 이 시기에도 유통되는 내용이다. 또 하나, 역사적 기록물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경우 특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의 의견을 출판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글로 표현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거나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인종적, 계급적 토대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지금 시점에서 접할 수 있는 과거의 많은 기록은 이런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많은 혐오 발화는 출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발화다. 이 발화가 특정 집단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1970대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는 지금까지 물리적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는 기록물을 쓴 사람의 발화다. 기록물을 남기지 못 한 사람의 의견은 지금 전해지지 않거나 간접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러니 역사를 마주한다는 건 혐오의 역사성과 출판물의 특권/권력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어려운 일이고 재밌는 일이다.

*
이브리 님의 바이 강의를 듣고 떠오른 단상.

채식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E는 내가 채식하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그나마 채식을 하니 이 정도로라도 챙겨 먹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육식을 했다면 나의 식사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3분요리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점심은 햄버거 혹은 그 비슷한 종류, 저녁은 안 먹었겠지만 간혹 라면이나 면 종류 음식. 그러니까 나의 일상은 레토르트와 패스트푸드로 가득했을 것이다.
E와 맥도날드나 그와 비슷한 가게에 갈 때가 있다. 가끔 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기분이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다니! 여기서 이런 음식이란 이렇게 맛나 보이는 음식이 있다니가 아니다. 메뉴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음식을 뜻하기도 하고(필리치즈와퍼란 메뉴를 들으며 E에게 무슨 의미인지 몇 번을 되물었다..) 이렇게 편하게 한 끼를 때울 수도 있다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음식은 육식하는 사람에겐 정말 손쉬운 한끼 식사잖아. 육식하는 사람 중 일부가 꼬기꼬기라고 얘기하는 고기도 먹고 배도 채우고. 주문만 하면 배달해주는 치킨으로 한두 끼를 때울 수도 있고. 얼마나 편한가. 특히나 1500원 가량의 기본 햄버거나 샌드위치는 아침이나 저녁으로 정말 적당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양도 아니고 가격도 괜찮고. 그 음식이 특별히 맛나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간편하게 그리고 집 근처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건 내게 최대 매력이다. 그 음식이 건강한가 여부는 나의 관심이 아니다. 내가 건강 생각해서 채식하는 것 아니잖아. 그냥 가볍고 즐겁게 한 끼 때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말로 만약 내가 먹을 수 있는 비건메뉴의 패스트푸드 가게가 집 근처 혹은 알바하는 곳 근처에 있다면 나는 거의 매일 방문해서 먹을 것이다. 2000원 이하로 가벼운 샌드위치나 콩버거가 판다면 아침은 그것으로 해결하겠지?
하지만 내가 사는 곳 근처에도, 알바를 하는 곳 근처에도 그런 가게는 없다. 베지버거를 판매하는 곳은 신촌 러빙헛 뿐이다. 가격이 그렇게 저렴한 편도 아니다. 바로 이런 제약이 나로 하여금 아침에 밥을, 점심에 밥을 먹도록 한다. 따지고 보면 알바를 하지 않는 시기보다 알바를 하는 시기에 밥을 더 잘 챙겨 먹는다. 알바를 하지 않을 때면 종일 집에만 있는 경우가 많고 이런 날은 하루 두 끼 중 한 끼는 면을 먹는다. 하지만 알바를 하는 시기엔 아침도 밥, 점심도 밥이다. 알바하는 곳 근처에 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마땅한 곳이 없으니 별 수 없다.
E는 내가 채식하는 걸 정말 다행으로 여긴다. 채식을 하니 그나마 몸에 좋다고 얘기하는 식단으로 밥을 먹기 때문이다. 육식을 했다면? 일주일에 다섯 번은 햄버거를 먹을 가능성이 높고, 세 번 이상은 라면을 비롯한 면 종류 음식을 먹을 가능성이 높다. 비건 음식을 파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많이 생기면 좋겠다. 후후. 채식이 나의 의도와는 별 상관없이 내 건강과 체력을 지키는 계기인지도 모른다.

인간, 개념

‘우리도 인간입니다’라는 말의 급진성을 고민한다. 일견 기존 인간 개념에 순응하는 듯, 동화주의적 발언인 듯한 이 말은 결코 그렇게만 사유할 수 없도록 한다. 우리도 인간이란 말은 인간이란 개념에 배제된 존재의 발화다. 이 발언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은 존재의 저항적 발화이자 삶의 경험을 응축한 발화다. 나도 인간이라는 발언, 그리하여 네가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그 태도를 나의 인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그래서 ‘우리도 인간입니다’라는 발언은 이 발언을 할 수밖에 없는 맥락을 되새기도록 한다. 지금 2014년에 ‘우리도 인간입니다’라는 발언을 한다는 건 이 사회의 분위기가 어떤지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우리도 인간입니다’는 인간 개념 자체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나도 인간이라면 인간의 개념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가장 보수적이고 순응주의적, 동화주의적 발언이 사실은 기존 인간 개념을 뒤흔드는 발언이기도 하다. ‘그럼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범주의 존재인가?’그래서 ‘우리도 인간입니다’란 발언은 좀 무서운 발언이자 근본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 당신은 지금까지 ‘인간’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누구를 떠올렸나요? 당신이 떠올리는 사람은 장애인인가요 비장애인인가요? 트랜스젠더인가요 비트랜스젠더인가요? 비이성애자인가요 이성애자인가요? 비이성애자라면 동성애자인가요 다른 성적지향의 사람인가요? 그리고 인터섹스인가요 비인터섹스인가요? 당신이 떠올리는 인간의 모습에 누가 자리하고 있나요? … 뭐, 이런 질문을 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