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을 자르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에 사복이었지만 두발은 자율이 아니었다. 너무 짧지 않게, 하지만 1cm였나 3cm였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야 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나는 늘 가던 이발소에 갔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바리깡 기기가 진동하며 머리의 피부 위에서 진동했다. 칼 혹은 기기가 머리 피부에 직접 닿는 순간이었다.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잘렸다. 머리카락이란 이렇게 가냘픈 것이구나. 쉽게 잘리는구나. 거울 너머에서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낯선 사람을 마주하면서 많이 어색했다. 그리고 정말 내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머리카락 길이로 사람을 규율하는 한국 사회, 여전히 중고등학생의 두발 자유화는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일종의 의례이자 상징이다. 머리카락을 다 자르고 물에 풀어서 사용하는 면도크림을 머리와 목 둘레에 발랐다. 면도칼이 머리와 목을 지나갔다. 서늘함. 물론 입학할 때까지도 입학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도 중학생이란 실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머리카락을 자르는 그 순간만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순간이었다.

어제 저녁 뇌수술을 앞둔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야 했다. 뇌수술을 하는 모든 사람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 이발소에 가지 않은지 오래고 이발소가 없어지고 있다는 얘기만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발사의 전형 같은 사람이 왔다. 그리고 복도 한쪽 끝에서 자리를 잡았다. 머리를 이런 곳에서 잘라야 하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그 당시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이발사는 바리깡으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약했다.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바리깡이 머리카락에 걸려 잠시라도 멈추는 일은 없었다. 가볍게 가볍게. 바리깡으로 머리카락을 다 자른 뒤 이발사는 면도크림을 물에 풀었다. 그리고 머리 전체에 면도크림을 발랐다. 이 순간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랬지. 뭔가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내내 어머니는 간신히 참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울진 않으셨다.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면도칼이 짧은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하면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리고 매우 구체적으로 실감하신 듯했다. 병원에 입원할 때도 기운이 없고 눈물을 흘렸지만 머리카락을 자를 때완 다른 느낌인 듯했다. 머리카락이 잘린다는 것은 내일 아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입원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순간이 더 구체적 사건이었다. 수술이 몸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병실의 밤은 어두워가고 있다.

올 한 해 기대하는 연극과 뮤지컬

출처 및 자세한 설명: http://feedly.com/k/1cFOyRR
2014년 공연 전체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구글 알림 서비스로 접한 트랜스젠더 관련 공연 소식입니다.
3월에 M. 버터플라이를 공연한다고 합니다. 2012년에 한 번 상연했는데 이번에 또 하네요. 배우랑 연출 등이 같을지 다를지는 나중에 다시 확인할 사안이지만.. 반갑네요. 만약 연출 등이 다르다면 보러가야겠어요.
6월엔 거미여인의 키스를 공연한다고 합니다. 책과 영화로만 봤는데 연극은 어떨까요. 은근히 기대가 크네요.
7월엔 프리실라가 합니다. 이건 뮤지컬. 프리실라는 1990년대 트랜스젠더 작품으로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용을 알 길이 없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뮤지컬로 상연한다니요! 정말 기대가 커요. 물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요.
11월엔 킹키 부츠가 합니다. 이것도 뮤지컬. 내용은 잘 모르지만 영화가 있고 내용이 퀴어트랜스 이슈와 관련 있다고만 알고 있어요. 그래도 기대는 되네요. 후후후.
관심 있는 분들 참고하셔요. 🙂

죽음의 곁에서

결국 우리는 다 죽는다. 태어나는 순간 죽을 운명으로 살아간다. 허무하단 얘기가 아니다. 인생 덧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존재에겐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다. 우린 언제나 시간을 살아가고 시간을 겪으며 존재한다는 뜻이다. 아무려나 결국 죽는다지만 우리에게 혹은 적어도 내게 죽음은 그리 가깝지 않다. 이제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 내일 아침엔 잠에서 영원히 깨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며 잠들지 않는다. 내일 깨어날 것을 기대하고 이런 기대로 약속을 잡는다. 정말 내일 아침에도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깨어날 거란 기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적어도 내겐 나의 죽음이 다소 먼, 막연한 느낌이다.

어머니가 달라졌다. 수술 결과에 따라 생의 갈림길에서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직접적 가능성에 직면하며 어머니가 변했다. 그전까지 어머니는, 언젠가 죽겠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큰 수술을 앞둔 지금의 어머니는 삶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이를 테면 몇 년 뒤에 사용하려고 여기저기에 쟁여둔 생필품을 모두 털어내고 있다. 언니에게, 내게 그 모든 것을 털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수술의 예후가 괜찮다고 해도 또 다른 병이 있으니 어머니로선 삶에 어떤 미련을 조금씩 털어야겠다는 고민을 하시는 듯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겠다는 기대로 어렵게 구했는데 1년도 안 되어 정리할 마음이 든 듯하다. 당장 무슨 일이 생겨도 놀랍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물론 또 다시,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내가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도 더 강해졌다. 결국 나는 불효를 하겠지만 어머니는 삶의 규범성, 죽음의 규범성을 완수하고 싶은 바람을 더 강하게 품기 시작했다. 서로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기대가 엄청 부딪힐 테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커다란 상처를 주고 받겠지. 어머니는 이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얼른 결혼하라고 할 테고(이미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외면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결국 어머니를 괴롭히는 결과를 야기하겠지. 존재 자체로 불효녀/불효자인 나는 어머니에게 계속 상처를 줄 테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어머니가 느낄 서러움을 강화하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은 또 내가 겪어야 할 일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것이 내가 속해야 한다고 강제된 가족의 문법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