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책임감..

블로그엔 유입검색어를 확인하는 기능이 있다. 추출할 수 있는 검색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지금도 블로그 유입 검색어 상위에 한무지가 있다. 어떤 땐 1위를 차지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땐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한다. 1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찾는 사람이 있는 삶, 1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애도하는 사람이 있는 삶,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한무지인지도 모르겠다. 사후라서 가능한 넉넉한 평가가 아니다. 살아 생전의 삶이 그렇기도 했다. 적어도 가시적 차원에서, 방송에 출연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다양한 활동을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는 정말 열심히 움직였고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그래서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이 충격받았다.
그를, 그의 삶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흔적을 내 블로그에서 확인하며, 나는 한무지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그토록 열심히 움직인 무지니까, 1년이 지난 지금도 애도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거다. 별볼일 없이 살고 있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나 같은 존재야, 지금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랴.. 주변의 친밀한 사람, 소중한 사람을 제외하면 나의 사라짐이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줄 수나 있으랴. 사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다. 그냥 당연한 얘기기 때문이다. 나 하나 사라지는 게 소중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무슨 상관있으랴. 나의 사라짐이 내가 모르는 이들, 단 한 번도 조우한 적 없는 이들에게도 어떤 식으로건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많은 책임감을 요구할까. 그러니 이런 책임감이 없는 내 삶이 참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오해하기 쉬운 말이긴 하다. 오해는 말아줬으면 한다. 어떤 존재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책임감을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게 때론 삶을 정말 고단하게 만들고, 삶에 많은 제약을 준다. 누구나 그 삶을 재단할 수 있다는 착각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이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재단하기도 한다. 책임감이란 것, 의무라는 것,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타인은 내게 부여한 이 속성. 이것이 주는 삶의 무게를 종종 떠올린다(이와 비슷한 얘기를 언젠가 무지가 한 적 있다). 가벼운 삶, 언제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해도 큰 문제가 없는 삶…

푸념

그러니까 글로 쓰고 싶고, 쓰려고 여러 번 문장을 만들지만 결국 공개하기에 앞서 지우는 글이 있다. 어떤 복잡한 감정에 관한 것인데, 그걸 어떻게 이곳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고 정말 많은 부연설명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찜찜해서 결국 비공개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야기라서 몇 번을 썼지만 그때마디 지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부터 비슷한 고민을 몇 번인가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
그 중 한 부분을 떼어내면 이러하다.
굳이 글을 출판해서 뭐하나.. 그냥 쓴 글 혼자 읽고 말지..

사라지는 전자문자의 시간성

오랜 만에 수업 쪽글입니다.. 하하.
글에선 트위터의 흥미로운 점을 분석했지만 그렇다고 트위터가 끌린다는 건 아니고요..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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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화. 15:00- 수업쪽글
사라지는 전자문자의 시간성
-루인
말은 변하지 않지만 글은 변할 수 있으니 글을 믿을 수 없다는 플라톤 혹은 구술성의 영향이 강했던 시대의 우려는, 지금에 와서 단순한 기우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인쇄된 문자, 출판된 문자는 문자성의 특징에서 분명 매우 고집스러운 속성을 지니며 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쇄기술이 발달하고 인쇄가 우리 삶의 양식에 영향을 끼치면서 인쇄한 문자는 변하지 않기에 구술보다 더 믿을 수 있다는 인식 또한 널리퍼져 있다. 실제, 종이에 인쇄되었거나 책으로 출판된 내용은 추후 수정하기 쉽지 않다. 수정하는 방법은, 새로운 쇄를 찍거나 정정 알림 정도다. 다른 말로 이미 출판된/인쇄된 문자는 그 상태 그대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사물”(147)이다. 하지만 전자 출판 시대, 웹 출판 시대에 글은 쉽게 수정/변형될 수 있다. 때때로 수정되었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변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가장 단단하고 고집스럽다고 여긴 텍스트/문자(129)에 언제 접근했는지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혹은 내가 읽은 그 찰나에 캡쳐하는 것이 필수다). 대표적 참고문헌 작성법인 MLA가 웹에서 다운로드했거나 접근한 논문의 경우, 접근 날짜를 쓰도록 요구하는 건 바로 문자의 위상이 변했음을 시사한다(또한 웹 판본일 경우에만 별도의 표기를 요구했던 6판과 달리, 7판부터 웹이면 웹, 인쇄본이면 인쇄본으로 표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 역시, 문자의 의미와 위상이 달라졌음을 나타낸다). 문자로 생산된 출판물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문자성은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해당 문자/기록물의 생성 시기와 그 문자에 접근한 시기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즉 문자는, 구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간성을 지니는 듯하다.
월터 J. 옹은 일차적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차이는 단순히 진화론적 차이가 아니라 사유체계와 생활양식 자체를 다르게 구조화하는 차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 세계에 나를 위치짓는 방식과 관련있다. 그리하여 이 차이는 권력이 배치되는 방식의 차이기도 하다. 옹이 지적하듯, 문자 문화를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구술 문화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손가락 없인 사유를 전개할 수 없는 내게, 밀턴의 『실락원』처럼 구술로 서사시를 완성했다는 얘기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니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다른 시대, 다른 문화”(154)다.
하지만 전자문자 시대에 구술성과 문자성은 혼종한다. 옹이 자세하게 설명했듯 일차적 구술성과는 다른 방식으로(217) 전자문자는 구술성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하지만 이때 구술은 문자 문화 이후의 구술이다. 전자문자 시대의 구술, 쓰기를 체득한 이후의 구술은 문자를 염두에 둔 구술이며 문장을 염두에 둔 구술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즉흥 연설이나 말은, 그 말을 문자로 옮기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경우다. 비록 말하기에서의 글과 쓰기에서의 글이 같은 문장이 아니라고 해도, 구술은 문자의 자장에 존재한다. 그리고 전자문자는 바로 이런 이차적 구술성을 밑절미 삼아 문자의 새로운 속성을 만든다.
전자문자의 속성은 트위터와 같이 현재 유행하는 소통체계(SNS라고도 부르는 그것)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트위터의 140자, 사유와 표현의 한계를 설정하는 140자는 단행본 혹은 블로그의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사유와 말하기 방식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글쓰기가 맥락이 상실된 형식이라면(164), 널리 사용하는 트위터 등은 더욱더 맥락을 찾기 어려운 전자 출판/문자 형식이다. 140자의 한계 내에서 말은 개별 트윗으로 분절되고 소통의 가능성 역시 더욱더 줄어든다. 그리하여 대화가 형성된 특정 순간에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대화를 온전히 추적하기 힘들고, 때론 얼개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이 지점에서 트위터는 흥미롭다. 글쓰기로서, 문자문화로서 트위터는 맥락을 찾을 수 없는 대화 방식이자 이미 기록된 그리하여 사물로 존재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트위터는 늘 ‘지금’이라는 시간에 존재한다. 재잘거리는 그 찰나에만 이해할 수 있고 트윗이 발행되는 그 순간에만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 순간이 지난 뒤, 타인이 그 트윗 문자를 접한다면 뒤늦은 그 시간에 알 수 있는 건 매우 적다. 이것은 사라지면서 의미를 갖는 구술의 속성(53-54)을 문자가 공유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트위터만이 아니라 스냅챗, 샤틀리와 같이 5~10초 뒤 자동으로 삭제되어 그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캡쳐도 할 수 없는 SNS의 등장은 문자도 “시간과 특수한 관계”(54)를 맺기 시작했음을 알린다. 이러한 전자문자는, 물론 소리나 구술보단 매우 긴 시간이지만, 약간의 지연과 함께 “그것이 막 사라져갈 때만 존재”(54)한다. 구술과 달리 동시에 열 개의 단어와 쉰 아홉 개의 알파벳을 표현할 순 있지만, 이것은 제한된 시간에만 존재한다. 그 문자는 그 시간, 그 공간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알고 싶다면, 누군가의 기억(력)에 의존해야 한다.
전자문자 시대의 문자는 소리와 매우 비슷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물론 찰나에 존재하는 문자가 소리와 같지는 않다. 구술성이 공유하고 외면적, 외부의 시간성을 지닌다면, 전자문자성은 공유하되 내면적이고 폐쇄적 시간성을 지닌다. 전자문자성은 물리적 옆자리에 있는 사람과 얘기하기보단 네트워크 상에 함께 있는 사람과 얘기한다. 이것이 예전에 비해 더 좋다, 더 나쁘다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전자문자성은 그저, 구술에서 문자로 이행하며 세계를 이해하고 사유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변했듯, 또 한 번 이 모든 것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현재의 지배적 형태는 아니다. 여전히 종이에 인쇄한 책이 출판되고, 장문에 고집스런 형태의 문자가 상당히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샤틀리나 트위터와 같은 전자문자는 어떤 변화의 흐름을 징후하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시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공유하되 폐쇄적인 이 전자문자의 성격을 탐구해야 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