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장 기술인 성전환? 평균의 의미

근래 몇 번 진행한 강의에서 되풀이한 내용이 있다. 나를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며 주변 지인에게 조금씩 말하던 시절, 한 지인이 내게 말했다. 호르몬은 절대 하지 말라고, 호르몬 하면 몸이 많이 아프고 일찍 죽는다고. 트랜스젠더는 일찍 죽는다는 말을 환기시키는 언설.. 이 언설로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고 강의에선 좀 다르게 풀었는데(그 얘기는 수업 기말페이퍼 아이디어라 블로그엔 나중에 쓰는 걸로..;; ) 여기선 그와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나이듦과 관련한 글을 읽고 있노라면 종종 나오는 얘기가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산다는 구절이다. 이건 인구통계적 평균에도 부합한다. 소위 말하는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게 나오니까. 그렇다면 만약 내가 의료적 조치를 시작한다면 이것은 생명연장의 기술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른바 남자의 몸에서 여성으로 의료적 전환을 겪는 것이며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다면 mtf의 의료적 조치는 생명연장 기술이어야 할 듯한데… 후후후. 그러니 저의 기대수명은 120년에서 의료적 조치를 하는 순간 150년으로 연장될 겁니다. 우후후후후후후.
물론 농담으로 하는 얘기지만 이 농담엔 뼈가 있다. 평균 수명이라는 언설을 밑절미 삼아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특정 여성만을 포함하겠다는 뜻이며, 트랜스여성을 비롯한 트랜스젠더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언설이 단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기에 문제란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인구의 평균적 XX’라는 사고 방식을 비판하는 인식론에서 특정 지점에선 이 평균을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문제란 뜻이다. ‘인간의 평균’으로 논의를 전개할 땐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여성의 평균’은 왜 그냥 넘어가는 것일까? 나이듦과 관련한 책을 읽으며 이런 지점이 불만이다. 그렇다고 이런 가정에서 전개하는 모든 논의가 다 불만인 건 아니고, 특정 지점이 걸린달까.
그러니까.. 생명연장 기술로서 mtf의 성전환수술을 사유의 기본틀로 가져가야 한.. 아, 이건 아닌가..;; 근데 아주 아닌 건 아닌 것 같은데..

음식/채식과 퀴어 범주의 경합

음식은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할까? 혹은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정체성을 어떻게 바꿜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곳에도 적었듯, 내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서사는 매우 간단하다.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고 다른 군것질 같은 건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10대 시절 난 채식을 선택했고 채식이 몸에 안 좋다는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채식을 하는 건 내게 중요한 투쟁의 순간이고 채식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그때부터 확인했다. 20대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채식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했고 많은 것을 채식 경험을 경유해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20대 중반 즈음 트랜스젠더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겐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겐 매우 ‘자연’스러운 정체화 과정. 그리하여 음식은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범주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요즘은 가죽퀴어(leather queer)가 비건채식을 한다면 그의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가죽퀴어는 미국에서 한때 급진적이고 저항적 정치학의 주요 실천 양식 중 하나였다. 가죽퀴어의 역사 자체는 상당하지만,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엔 급진적 퀴어 운동의 실천 방식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달까. 단지 급진적 운동의 방식으로서 가죽퀴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주이자 정체성을 가죽퀴어로 삼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가죽퀴어를 자신의 주요 범주로 삼은 사람이 비건채식을 시작한다면 이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부연하면, 비건채식은 소위 식물성이라고 불리는 것만 먹을 뿐만 아니라 가죽 제품이나 동물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을 입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가죽퀴어 범주와 비건채식 범주는 충돌하는 범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비건채식을 선택할 때 가죽퀴어란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혹은 어떻게 협상할까? 아직은 관련 논문을 찾아 읽은 건 아니고(일부러 안 찾았다) 그냥 머리 속에서 굴리며 상상/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음식이 정체성/범주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확실하겠지라고 가정하지만 이 가정이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겐 옳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으니까.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라즈 온 에어Raz on Air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인천인권영화제의 상영작 <라즈 온 에어>를 설명하는 원고를 썼습니다. 좀 급하게 써서 부끄럽지만…
해설서가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하는데, 상영기간에 보내 줄 여력이 없을 테니 나중에 오겠지요.. 책을 받으면 영화제 홍보와 함께 올리려고 했는데.. 이건 안 될 듯하여 소개글 먼저 올립니다. writing 메뉴엔 나중에 책자를 받으면 그때 추가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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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18회 인천인권영화제, <라즈 온 에어> 인권해설 원고.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runtoruin@gmail.com )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라즈의 팬은 말했다. 라즈는 당신도 당당하게 살라고 맞받아쳤다. 일상에서 비슷한 일화는 수두룩하다. 나는 특강을 간 자리에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어쨌거나 행복하기에 행복하다고 답할 때가 있다. 청중은 감동하고 때때로 박수를 친다. 젠장.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 모두 칭찬이 아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의 범위/한계를 확인하는 언설이자 트랜스젠더는 당당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는 지배 규범을 환기하는 언설이다. 트랜스젠더의 고통과 불행은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하는 규범적 삶의 양식이자 미디어와 ‘대중’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상상력이다. 트랜스젠더가 다양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이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경험으로 강요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은 모두 존재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는 언설이며, 감정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심문하는 언설이다.
이옥섭 감독의 다큐멘터리 <라즈 온 에어>(2012)는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정말 멋진 존재를 알아 기뻤다. 두 번째 봤을 땐 어떤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살며 겪는 어떤 슬픔이나 외로움과의 공명이기도 하다. 몇 번 반복해서 보며 이 작품에 흐르는 정서가 경쾌함과 슬픔, 외로움의 동시적 공존이라고 느꼈다. 즉 <라즈 온 에어>는 트랜스젠더 라즈의 감정과 정동을 다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연예인이나 성판매 업소가 아닌 직업군에서도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특강 후기를 받은 적 있다. 라즈와 라즈의 부모님 역시 이런 상상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네가 갈 데는 그런 데[트랜스젠더 업소] 밖에 없다”는 부모의 말은 이 사회가 공유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업소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의 직업 선택이다. 하지만 업소 선택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트랜스젠더에게 다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는 현재의 삶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 위치하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징표다. 트랜스젠더가 갈 곳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제한된 곳에 가두려는 것이 이 사회의 규범이자 상상력이다. 다른 말로 이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사유하기보다 소비하기만을 원한다. 사유해야 할 수많은 트랜스젠더 이슈가 소비된다. 이런 한계가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외롭고 또 슬프게 만든다. 이토록 빈약하고 빈곤한 상상력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이 사회가 문제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나는 라즈가 아프리카 TV건 다른 방송이건 방송 진행자로 성공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트랜스젠더가 우리 자신의 삶을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타인이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