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생득과 선택/양육에 관하여, 두 번째

발아점: 모두에게 완자가 “148화 왼손잡이에 대한 고찰”
하지만 이 이슈는 예전에도 쓴 적이 있어서 딱히 이 글을 발아점이라고 하기엔…;;; 그리고 이것이 완자와 모완을 비난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트랜스젠더가, 바이/양성애자가, 동성애자가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종종 받는 질문은 제목과 같다. “넌 타고난 거냐 선택한 거냐..” 이 무례한 질문을 받으면, 사실 선택인지 선천인지 고민에 빠지기 쉽다. 이런 식의 질문이 양자택일을 선택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질문에 워낙 많이 노출되다보니 질문 받은 내가 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드는 기분은 뭔가 막막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분 아닐까? 왜냐면 늘 얘기하듯, 우리는 타고나기도 했고 선택하기도 했으며 타고난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 선천과 선택의 양자택일 자체가 누가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누구에게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를 증명하도록 요구하는가? 선택과 선천이라는 양자택일은 적어도 내가 아는 수준/한계에서 퀴어의 경험은 아니다. 선천-선택이란 선택지 자체가 퀴어의 경험이 아니며 양자택일 형식이 퀴어의 경험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의 핵심 문제는 이성애-이원 젠더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데 있다. 이성애-이원젠더를 질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 타고난 것, 그리하여 당연한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하여 이성애-이원젠더는 기준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안전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왜 선천과 선택 사이에서 고르도록 요구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왜 선천이냐 선택이냐가 궁금한지를 되물어야 한다. 또한, 내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 알면 뭐하려고 묻는 건지를 따져야 한다. 그거 알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로 타고났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뭔가를 더 잘 알게 된 것인가? 내가 트랜스젠더 범주를 선택했다는 걸 알면 나에 대해 뭔가를 더 많이 알게 된 것인가? 이런 걸 알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인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면 도대체 무얼 이해한 건가? 이 질문은 나의 삶을 묻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자의 불안과 위기감을 잠재우고 안정화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러니 내가 타고났는지 선택했는지 알려고 하지 말고, 도대체 나로 인해 당신의 무엇이 불안한지를 살피면 좋겠다.
*여기서 선천-선택을 양자택일로 여기며 고르는 것이 곧 퀴어가 아니란 뜻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퀴어정치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

글쓰기 세미나

다음주에 (반드시 학과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학과 사람 뿐일 거라)학과 사람과 함께 하는 글쓰기 세미나를 하기로 했다. 학과 사람들과 무엇을 나눌까 고민하다가(여기엔 많은 다른 배경이 있지만, 훈훈한 에피소드로 조작하기 위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글쓰기와 자료찾기’를 키워드로 2시간 가량의 세미나 자리를 열겠다고 했다. 이 세미나를 기획했을 때 내가 떠올린 집단은 이제 1학기이거나 2학기인 분들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어떻게 기말페이퍼/논문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자료를 찾아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되는 분들을 위한 팁을 제공하는 자리랄까. 딱 이 정도 상상으로 자리를 기획했는데.. 논문학기생이 더 좋아한다. 지금 논문 쓰는 분들이 더 열렬하게 반응한다. 흠…
하지만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닌데, 글쓰기 문제에서 어려움을 가장 많이 겪고 있는 사람은 학위논문을 쓰면서 헤매는 사람이다. 나는 글쓰기의 어려움이, 이제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 가장 크게 겪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더 크게 겪는 문제란 걸 잊고 있었다. 즉 글쓰기가 지금 당면한 문제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란 걸, 나는 왜 깜빡했을까…
단지 다음주에 할 글쓰기와 자료찾기 세미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구나,라고 느낀 건 지난 9월이었다. 학과에 글쓰기 수업이 개설되었는데(결국은 글‘쓰기’ 수업이 아니라 사유하기 수업이지만) 수업 첫날 29명이 들어왔다. 대학원 수업에서 29명이면, 수업이 불가능한 인원. 이때 정말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어려워한다는 걸 체감했달까. 그러고 보면 대학원에 입학하면 글쓰기와 강의하기는 거의 필수인데도, 이를 가르쳐주는 수업은 거의 없다. 글쓰기와 강의는 그냥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느낌이다. 혹은 글쓰기 수업을 통해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고 싶은데 인식론만 말한다거나(인식론 없이 글쓰기가 불가능하지만, 글을 쓰다보면 정말 기술적인 부분에서 막힐 때가 있다)…
그나저나 내가 할 얘기는 논문 쓰기의 기술적인 부분이라, 사람들의 기대가 어떤지에 따라 많이 실망하겠지.. 물론 출판하면서 야매로 배운 기술이나 노하우를 약간 공유하긴 하겠지만 이건 워낙 개인차가 심해서 마냥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더 큰 문제는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실제 내가 공유하는 정보가 좋은 정보는 아닐 수 있다.
암튼 완전 비공개 세미나는 아니라고 알고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알아서 정보를 찾아서 오셔요.. 설마 쫓아내겠어요.. ^^; 그럼에도 학과 사람을 우선 대상으로 하기에 자리가 부족하다면 못 들으실 수도.. ^^;;;;;;
+그리고 여러 번 강조하지만, 내가 글쓰기를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라 야매로 알려드립니다.

트랜스젠더 인식론을 위하여


트랜스젠더를 설명의 대상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트랜스젠더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론의 토대다. 또한 트랜스젠더는 인식론의 토대여야 한다. 어떤 얘기를 할 때 트랜스젠더는 이렇게 겪는다란 얘기도 중요하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기존 경험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아니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 이것은 나의 강렬한 믿음이다. 그러니 트랜스젠더 인식론을 써야겠다. 트랜스젠더 인식론으로 얘기하고 글을 써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