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일, 삶과 생명을 이어가는 일

아는 사람은 아는 이유로 요즘 잘 먹으며 지내고 있다. 그런 일이 반드시 잘 먹고 지내는 이유가 되지는 않지만, 나로선 그러하다. 이를 테면, 지난 주부턴 시험 삼아 알바하는 곳에서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수업이 있어 알바를 오전에만 하는 날엔 점심을 신촌 러빙헛에서 먹고, 수업이 없어 종일 알바를 하는 사흘 동안은 점심을 알바하는 곳에서 먹는다. 일처에서 먹는 건 뻔한데, 짐작대로 비빔밥이었다. 문제는 회사가 많은 지역이기도 해서 점심값이 꽤나 비쌌다. 비빔밥을 대체할 음식이 없어서 작년까진 꽤 비싼 비빔밥을 사먹었다. 올해부터는 알바하는 곳 근처 허름한 식당에서 비빔밥이 1,000원 이상 싸게 팔아서 그곳에서 먹었는데.. 어느날 비빔밥에 뭔가 이상한 게 들어있어서(못 먹을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먹지 않는 이상한 거;; ) 그 다음부터 그냥 안 갔다. 대신 김밥을 사먹기 시작했다. 알바하는 곳 근처에서 김밥을 주문하기엔 애매해서(비싸기도 했고, 점심 시간 즈음 이것저것 빼고 주문할 상황이 아니어서) 집 근처 김밥천국에 들러 김밥을 사서 갔다. 그걸 점심 때 먹었는데…
김밥을 점심에 먹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몇 달을 지냈다. 그런데.. 늘 가던 곳이 내부 공사로 열흘 정도 문을 닫았고 어쩔 수 없이 근처 다른 김밥가게로 갔는데.. 오오, 주문하면 포장까지 1~2분이야! 그냥 바로 나와. 기존에 가던 곳은 주문하면 한참 걸렸는데 새로운 가게는 그렇지 않았고, 이게 확실히 좋았다. 여유가 있으면 천천히 나와도 상관이 없는데 바쁜 아침이라 빨리 포장되는 게 좋으니까. 그래서 김밥 사는 가게를 바꿨는데.. 속에 들어가는 게 너무 부실했다. 밥+단무지+오이+당근. 짭짤한 맛도 없고 닝닝한데다, 이곳 김밥 자체가 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전에 가던 곳에 가고 싶지는 않은 게, 포장이 너무 늦달까..
결국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밥이야 즉석밥을 먹으면 되고 반찬만 있으면 되는데, 그 반찬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반찬이 집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있는 반찬을 통에 담아 도시락을 싸갔고, 이게 훨씬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번 주부터는 도시락 확정! 일요일마다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만드는데(아는 사람은 아는 이유가 있기 전부터 유지했던 습관) 어제는 그게 좀 더 풍성했다.
그 반찬과는 별도로 최근 먹은 것 중엔 다양한 게 있지만.. 아쉽게도 사진은 거의 없다. 감자튀김, 부대찌개, 오일파스타, 칼국수 등등등!
그 중에서 사진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 김치볶음밥! 부대찌개를 하기 위해 러빙헛에서 김치를 샀고 남은 김치로 볶음밥을 했다. 정말 맛났다. 참고로 작은 접시의 반찬은 감자조림과 두부토마토 볶음.

그리고 아래는 양파장아찌. 양파와 여러 고추에 끓인 간장을 넣고 만든 것. 어제 만들었으니 이번 주말 즈음부터 먹을 수 있겠지. 츄릅.

아무려나.. 요즘 이렇게 잘 먹고 살고 있다. 아, 그리고 일전에 만든 사과청은 정말 맛나게 잘 먹고 있다. 히히.

재밌다고 기억하는 강의

어제 성남에서 강의를 했다. 그것도 아침 10시. 뭐, 아침 10시라는 시간 자체는 이르지 않다. 하지만 집에서 성남까지 얼추 세 시간이 걸렸고, 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하려면 아침 5시에 일어나야 했다. 토요일 아침에 늦잠도 아니고 5시에 기상이라니.. 으헉.. 물론 처음부터 성남인 걸 알고 수락했는데, 전화로 처음 들었을 땐 내가 사는 곳 근처 도시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도를 보니 대충 정확하게 반대방향… 서울을 가로질러 있는 곳…

그래서 강의라도 제대로 안 되면 참 우울하거나 안타까울 뻔했는데.. 강의는 하는 내가 재밌다 싶게 나름 재밌게 진행했다. 이야기 흐름이 잘 이어졌고, 교육생인 분들의 적극적 질문에 대응했고. 농담을 못 하니 몸 개그도 좀 했고(..) … 무엇보다 세 시간 동안 진행하는 강의 말미에, 사람들이 기존에 알던 것이 다 혼란스럽고 흔들린다고 해서 기뻤다. 그것이 내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니까. 세세한 내용을 기억하기보다는 ‘내’가 당연하게 여긴 것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길 바랐다. 그리고 이 의도가 나름 성공한 듯하여 기뻤달까.
그런데 혼란을 야기하는 건, 내가 강의를 잘 해서 이룬 성과(?)가 아니다. 철저하게 교육생의 적극적 역할 덕분이다. 강의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것이 있거나 이해가 잘 안 되면 바로바로 질문을 줘서, 혹은 표정으로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수준으로 반응을 줘서, 내가 무엇을 더 설명해야 하는지, 무엇을 더 부연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이 적극 질문했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앎이 흔들린다고 얘기했다. 어쩌면 바로 이 발화가 앎이 가능하도록 하는 힘이 아닐는지… 보통 기존의 자기 지식과 배치되는 얘기를 하면 화를 내거나 내가 잘못되었다고 반응하기 쉽지, 자신의 지식이 흔들린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흔들린다고 말해줘야, 그 흔들림의 의미를 얘기할 수 있고 의미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토록 적극적 청중/교육생은 정말 오랜만이었달까.
그리하여 정말 즐거운 경험이자, 강사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교육생의 반응이 강의의 질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비트랜스젠더화된 장애, 비장애화된 트랜스젠더: 토론문 … 일부

지난 10월 30일, 장애여성공감 15주년 포럼에서 얘기한 토론문의 일부입니다.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글이기도 하고요. 아시겠지만, 전문은 상단의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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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장애여성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이 함께 할 수 있는 지점, 아니 함께 해야 하는 지점은 단지 화장실 정도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특히 몸과 젠더 이슈가 그렇다. 발제문에서도 지적하듯 장애여성은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에서 비/젠더화된다.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 가능성을 박탈하는 사회적 인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장애여성은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의 규제 안에 있지만 그 규범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장애여성의 여성성이나 여성 젠더 실천은 부정된다(아니, 이미 부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부정이 장애여성을 트랜스젠더화하진 않는 듯하다. 장애여성의 여성 젠더는 지배 규범에 부합할 수 없다고 미리 규정되었음에도 여성 젠더 범주 자체를 벗어나도록 하진 않는다.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엔 도달할 수 없지만 트랜스젠더는 아닌 수준, 그 어딘가에 장애여성을 향한 젠더 규범이 자리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의 젠더 실천 역시 언제나 지배적 젠더 규범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염색체 운운하며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되거나 과잉으로 넘쳐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젠더 실천은 많은 경우 사회적 혐오나 해명의 대상이다. 수술 역시 마찬가지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많은 수술은, 때때로 죽음을 각오하고 진행하는 (결연한)행위로 이해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얘기하는 수술의 위험, 성취할 수 없는 지배적 이원 젠더 규범의 실천 등은 모두 비장애 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수술이 잘못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향한 우려는, 때때로 장애 혐오를 밑절미 삼는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의 젠더와 몸 구성은 비장애화된 사회적 규범에 따른다. 이것은 많은 트랜스젠더가 떠올리거나 얘기하는 이상적인 몸이 기본적으로 비장애인의 몸이란 점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몸은 결코 이 사회의 지배 규범적 젠더의 몸일 순 없지만 또한 비장애화된 몸의 수준에서 관리되고 또 논의된다.
장애인의 젠더 규범, 트랜스젠더의 비장애 규범에 관한 얘기는 서로 각자 다른 식으로 젠더 규범과 몸 규범을 겪는다는 뜻이 아니다. 장애-몸-트랜스/젠더가 분리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를 관리하고 우리 삶을 상상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장애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이 많은 공유점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애여성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은 바로 이 지점 어딘가에서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