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마지막 블로깅, 이것저것

올 한 해도 이곳에 오시는 분들 덕분에 무사히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들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올 해 블로깅의 가장 큰 특징은 음식블로깅! 제 생전에 음식 사진을 블로깅하는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먹은 음식을 올리다니.. 놀라운 변화! E느님께 고마움을 표해요. 🙂
이런 저런 글을 쓰느라 2013년이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니키 설리반Nikki Sullivan과 같이 발표도 하고 밥도 먹는 시간을 가졌지요. 꿈만 같은 일이 생기다니.. 아아.. 내년엔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를 만나겠어요. 만나고 말겠어요!
글과 관련해서, 정말 정신 없이 글만 쓴 것 같습니다. 한 편의 글이 끝나면 다음 편이 아니라 두세 편의 원고를 동시에 기획하고 마감 일정 맞춰서 미친 듯이 글을 썼달까요. 이런 기세로 단행본 작업을 했다면 단행본이 한 권 나왔겠지만… 다행이라면 제가 게으르고 또 역량이 부족하여 아직 단독 단행본은 없습니다. 후유… 2014년에도 주어진 일정에 따라 움직이겠지요. 자잘한 바람은 기획하고 있는 글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잘 되려나..
올 한 해도 바람은 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빈혈 판정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요. 아.. 오늘 오후에 병원에 가야 할 수도 있지만요.. 아무려나 바람과 저는 여전히 애정애정하며 잘 지내고 있어요.
올 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그래도 역시나 E느님!
그리고 올해도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준 많은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김비, 그녀의 이야기

수업 때 쓴 쪽글입니다. 나이든 여성과 관련한 글을 써오라고 했는데, 트랜스젠더 중 나이든 여성이 누가 있을까 하니 김비 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김비 님의 실제 나이는 많지 않지만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선 대선배랄까요. 그래서 관련 글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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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11.15. 화. 15:00- 여성, 나이듦, 노동.
김비, 그녀의 이야기
-루인
1971년생, 이제 사십 초반의 그녀를 ‘나이 들었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계시간의 세계에서 나이 마흔인 사람에게 나이들었다는 말은 실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트랜스젠더에게 혹은 나에게 대선배로, 매우 오랜 시간을 산 존재로 인식된다. 거리와 시간 개념이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구성되듯(필립스, 73)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나이 든 존재는 시계시간의 개념으로 얘기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존재의 역사성과 시간성이 나이 개념을 구성한다. 어떤 집단의 사람에겐 일흔 혹은 여든은 되어야 나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 예순인 사람에게 나이 들었다고 얘기하면 역정을 들을 수도 있다. 나이듦이란 그런 거다. 많은 이론가가 지적하듯, 나이듦의 의미와 시계시간의 표지는 일치하지 않는다. 범주에 따라, 집단에 따라 나이의 의미는 달리 구성된다. 그리하여 김비, 그녀는 시계시간으론 여전히 매우 젋지만 mtf/트랜스여성에겐 혹은 트랜스젠더에겐 ‘나이 든’ 존재다.
1990년대부터 그녀는 다양한 글을 쓰며 트랜스젠더를 가시화했다.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트랜스젠더의 삶과 기본 지식을 알렸다. 때론 미디어에 출연해서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야기하며 어떤 인식을 만들고자 했다. 그녀의 삶과 실천은 하리수 씨처럼 이 사회의 광범위한 대중에게 인식론적 전환을 야기하는 충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적잖은 이들에게, 특히 mtf/트랜스여성에게 그녀는 신화다. 지금 시간에 김비를 만난다는 건 신화적 존재를 만난다는 것과 같다.
1990년대부터 LGBT 인권운동이 본격 전개되고 그 유산이자 흐름에서 지금의 LGBT의 삶이 구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LGBT가 기억하는 역사는 1990년대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은 역사 이전의 시대처럼 여전히 막연하고 정확한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지금도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트랜스젠더의 집단이 형성된 시기가 짧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집단의 형성 시기와 무관하다. 집단의 형성 시기가 길어도 나이가 들면 사라져서 특정 나이부터는 만나기 힘든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사라지지 않고 어떤 집단/범주의 선배로 남아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 선배가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한다면 이것은 더 좋은 일이다. 그녀는 신화지만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존재다.
나이 든 mtf/트랜스여성이 할 수 있는 일엔 무엇이 있을까? 업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여성은 업소 마담이나 작은 가게 운영, 혹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사노동만 하는 ‘평범한’ 삶을 얘기한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트랜스젠더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디어에서 유통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와 미래 역시 연예인이거나 성판매 업소의 노동자 정도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기가 힘들다. 나이 들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어떤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지에 있어 모델이 없는 상황(스쿠차 & 버나드, 53-55)일 때 삶은 언제나 막막하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언제나 최초거나 1세대에 해당한다면 이것 자체로 자유로운 만큼이나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김비, 그녀의 현존은 어떤 안도감을 준다. 그냥 살면 되는구나… 일단 살면 되는구나…
한때 영어학원의 강사로, 지금은 소설가이자 작가로 살아가는 김비의 삶은 내게 어떤 희망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곳으로 이주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나는 미디어 혹은 소위 말하는 대중이 요구하거나 이해하는 식으로 살지 않아도 괜찮고 나의 미래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걸 확인한다. 그녀는 내게 그런 안도감을 주고 그런 자신감을 준다. 그녀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을 떠올리며, 나는 트랜스젠더에게 그리고 내게 나이듦의 의미,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의 의미가 기존의 관념에 따를 필요가 없음을 확인한다. 우리-트랜스젠더는 나이 마흔에 조로한다는 뜻이 아니다. 역할 모델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 시점에서 기존의 나이 개념, 일 개념은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우리’에겐 나이 여든의 모델이 없을까,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고 쉰, 예순의 나이를 먹는다는 건 트랜스젠더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질문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굳이 기존의 나이 개념에 따른 모델 관념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겐 나이 마흔의 그녀가, 나이 여든의 누군가처럼 든든하고 또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밑절미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IMF, 꿈을 잃다.

어떤 사람은 여러 번 들었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부산 지역 모의고사를 치면 뒤에서 1-2등을 다투던 곳이었다. 공립이었기에 교사는 학생의 성적에 큰 관심이 없었다. 5년 정도 지나면 다른 학교로 가기 마련이었고, 그러니 어차피 공부 못 하는 학생이 모인 학교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고민하면, 다들 대체로 가난했다. 하지만 모두가 가난했기에 특별히 가난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어쨌거나 밥은 굶지 않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면 잘 산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내가 다닌 초중고등학교가 지금에 와선 어느 정도 가난한 동네에 있었지만 그땐 그런 고민이 없었다. 특별히 누군가가 가난하다고 지목하기에도, 특별히 누군가가 부자라고 지목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곳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있어 특출난 상상력이 없었다. 엄청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 특정 계급에서나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사람들의 상상력에 없었다. 그래, 정확하게 이것이 계급이다. 지금 내가 매달 벌고 있는 수입이 나의 계급이 아니라 내 삶을 상상하고 내 행동 관습을 규율하는 방식이 계급이다. 그럼에도 혹은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많은 동기가 진학하고 싶은 학교와 학과가 있었다. 물론 한국에 대학교는 부산대학교 하나 뿐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보면 저 멀리 수능성적 기준 하위권 대학이 있었는데 누구도 그 대학엔 진학하지 않을 것이란 패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진학하고 싶은 학과, 그리고 이왕이면 가고 싶은 학교가 있었다. 다른 말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대충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IMF가 터지고 난 다음 누구도 원하는 학과, 원하는 학교를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실제 수능시험을 보고 대학교에 진학할 때 IMF의 효과는 확연히 드러났다. 더 좋은 대학교나 학과를 갈 수 있음에도 한 푼이라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지원했다. 그 전까지 하고 싶은 일을 얘기하던 많은 사람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 본가에서 다닐 수 있는 학교, 취업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학과를 선택했다. 내게 IMF는 이 풍경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상상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내가 체감한 IMF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말하지 않았다. 취업을 얘기했고 취업할 수 있는 학과를 선호했고 대학생 시절 내내 취업 준비에 몰입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IMF 때문이라고 할 순 없다. 어떤 사람은 2000년대 자기계발 열풍의 효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식으로 말하리라. 그저 내겐 꿈을 잃고 먹고사니즘이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면피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IMF라고 기억할 뿐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 취직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 모두 정당한 말이다. 맞다. 먹고 살아야 하고 먹고 사는 건 중요하다. 이런 말이 내 삶을 더 옥죄는 체제를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뻔한 질문을 하고 싶진 않다. 그냥 IMF가, 지금의 사회 체제가 꿈 하나 없는 삶을 재생산하고 있는 게 아쉽고 속상할 뿐이다. 그러니 봉기하면 좋겠다. 꿈 꿀 수 있도록,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