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끄러운 정치학을 메모하다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1970년대 초, 뉴욕 등 미국 동부 지역에서 LGBT로만 얘기할 수는 없는 일군의 집단이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것이 현재 미국 퀴어/LGBT 기록에 남아 있는 첫 자긍심 행진이다. 그 행진은 어쨌거나 진행되었지만 이듬해엔 두 개의 다른 행사로 나뉘었다. 기존의 행사를 이어간 집단, 그리고 일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와 그 정치학을 지지하는 집단으로. 첫 행사에서 일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와 게이 진행자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그 결과 일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는 트랜스젠더와 드랙퀸 등을 배제하는 별도의 행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행사가 분리된 사건, 그리고 특정 집단을 배제하며 일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중심으로 열린 행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이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렇게 행사가 나뉘거나 행사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 최소한 정치학은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정치학이 비록 트랜스혐오를 밑절미 삼고 있다고 해도 공개적 주장과 논쟁은 존재했다. 하나로 시작하여 두 개로 나뉠 땐 정치적 해석과 입장이 있었다. 이 해석과 입장이 그 당시 그리고 지금 얼마나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인지는 별개로 해도 어쨌거나 정치학은 있었다. 다른 말로 최소한의 품위가 있었다. 최소한의 논의, 생산적 정치학으로서의 논의라는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느 중요한 행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관련한 일을 들을 때면 그냥 부끄럽다. 그저 자신의 권력욕 혹은 과시욕, 명예 등을 위해서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욕하는 행태를 접하노라면 정말 부끄럽다. 권력과 명예가 필요하면 그냥 그걸 원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깔끔하다. 이 좁은 바닥에서 어떤 거창한 명예와 대표성을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가 부여할 수 있다면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아는 수준에서 퀴어/LGBT 바닥에 있는 그 누구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여할 권한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자신의 성실성, 자신의 헌신과 노력이 자신의 가치를 형성하고 구성할 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누군가가 대표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지목해서 맹비난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행태, 이런 행태는 그냥 추하다. 아무런 품위가 없다. 간단하게 절차만 지키면 될 일을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취하는 행태는 정말이지, 내가 그와 같은 지면에서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마저 부끄럽게 만든다.
인권의 최전선에 있다고 타인이 말해주길 바라는 그 욕망, 그리고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마음, 바로 이런 마음의 정치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정말 부끄럽다. 여기에도 남성성, LGBT 권력 정치 등으로 정말 많은 것을 논할 수 있다. 사실 이 욕망과 마음에 엄청난게 많은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부끄럽다.
김조광수 관련 글입니다.

2013년 12월 22일 바이모임~

일주일 뒤에 바이모임이 열린다고 합니다. 많은 참여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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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모임이 바이섹슈얼 로드트립 다큐 Bi the Way 와 함께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어 먹으면서 즐겁게 놀고, 상영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다큐 소개
Bi the Way, a Documentary on Bisexuality  (영어 대사/한글 자막)
감독 Brittany Blockman & Josephine Decker, 상영시간 약 93분
가족, 종교, 인종, 결혼과 연애…, 우리들 바이섹슈얼은 삶의 길에서 만나는 도전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길을 따라 만난 미국의 젊은 바이섹슈얼 5명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우리의 이야기를 나눠보자!
 
신청 & 문의
: 누구나 참여 가능
: 참가비 5000원(음료, 다과, 대관료로 사용) 혹시나 수익이 발생하면 2014년 퀴어문화축제 준비단에 후원금을 보냅니다. 샌드위치에 꼭 넣고 싶은 재료가 있다면 가져와서 나눠 보아요.
(기본 재료와 간단한 음료 제공, 채식식빵 별도 준비됨)
: 12월 20일까지 트위터 @bi_moim 으로 쪽지나 멘션, 또는  bi.moim.kr@gmail.com 으로 이메일을 주세요.
:  참가인원을 꼭 명시해주세요.
 
시간 & 장소
: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오후 2시
: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62-14
: 홍대입구역 9번 출구 근처입니다. 9번 출구에서 왓슨스 쪽으로 바로 좌회전하셔서 조금만 오시면 던킨도너츠가 나와요. 던킨 쪽으로 우회전 하신 다음 고양이 까페와 ‘까페 아래’가 있는 건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3층 고양이 까페에서 쭉쭉 위로 더 올라오세요. 문은 항상 열어 두니까 커다란 철문에 겁먹지 말고 힘차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와 주세요.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KSCRC가 18일날 이사할 예정이지만, 센터에서 바이모임을 위해 애써주신 덕분에 22일날 구 센터 건물을 대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센터 이사 일정을 알고 계신 분들, 헷갈려서 망원으로 가지 마시고 홍대입구역 구 센터로 와주세요!
한국에서 보기 힘든 다큐이고, 소규모이지만 아마도 최초로 바이섹슈얼 다큐가 상영되는 날입니다. 오셔서 재미있게 영화 보고 놀다 가세요 🙂
다양한 경로로 홍보도 많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으흐흐

트랜스젠더 연구자, 어떤 기대

지금 추세로 추정한다면 그러니까 최소 5년 정도만 지나면 나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끝내주는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가가 여러 명 나올 것 같다. 학제에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공부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 정말 기쁜 일이다. 보잘 것 없는 얘기를 하는 나 따위 뭉개버리라고! ..라기엔 뭉갤 것도 없이 그냥 각자 관심 분야에서 꾸준히 자기 연구를 하겠지. 흐흐.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잊히겠지. 꺄르르.
이 와중에 흥미로운 점은 학제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분, 다수가 기존의 트랜스젠더 사사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얘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mtf/트랜스여성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여성으로 자신을 인식했고 운운하는 전형적 서사. 이 서사에 갈등하는 분들이 상당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갈등이 공부를 하는 동력을 만들고 있다. 공부를 하는 동력이 반드시 이런 갈등의 언어화는 아니겠지만 좋은 자극제인 것 같긴 하다. 그러니 이를 통해 다양한 트랜스젠더 이론이 등장하고 트랜스젠더 이론의 논쟁이 가능하겠지.
그러면서 든 고민은 학제에서 공부하겠다는 분 중에 기존의 트랜스젠더 서사에 부합하는 분은 별로 없다는 것. 물론 이것은 당연히 내가 아는 수준의 경향이다. 내가 아는 수준의 경향을 일반화하면 곤란한 건, 내가 주장하는 바가 있고 그 주장에 공명하는 분이 나와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와 공명하는 점이 별로 없다면 내게 말을 걸거나 연락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하여 내가 아는 수준에서, 기존의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 트랜스젠더가 학제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목소리, 바로 그 경험이 트랜스젠더 논의를 대표한다고 오인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경향이 불편을 느끼는 또 다른 트랜스젠더와 어떤 식의 논쟁이 생기기도 하겠지. 이렇게 된다면, 그래서 만약 생산적 논쟁으로 이어진다면 정말 즐거울 듯하다. 물론 바로 그 순간엔 괴롭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 즐겁겠지. 하지만 만약 이 논란이 논란으로 끝나고, ‘너희는 책만 파고 현실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반응한다면? 이것이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런 식의 논쟁은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를 두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나는 트랜스젠더를 정의할 때, ‘정신적/사회문화적 성(소위 젠더)과 육체적 성(소위 섹스)이 다르거나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란 정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이런 정의는 모든 문제를 트랜스젠더 개인의 것으로 돌린다. 이 사회는 변할 필요 없다. 개인의 갈등, 개인의 불일치만 의료로 해소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트랜스젠더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젠더를 인식하는 사람이며 섹스는 각자의 해석에 따른다’로 설명하길 선호한다. 나는 젠더가 태어날 때 사회문화적 해석에 따라 지정받은 것이지 섹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아울러 젠더가 사회문화적 해석에 따른 지정이란 점에서, 문제는 이 사회의 변화란 것을 강조하려 한다. 개인의 불일치가 갈등 경험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정치학과 달리, 적잖은 트랜스젠더가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이 일치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란 설명을 선호한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자신의 경험을 잘 설명한다고 느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논쟁을 할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 논쟁을 통해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경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핵심이고.
아무려나 지금은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다. 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날 테니까. 정말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