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다고 기억하는 강의

어제 성남에서 강의를 했다. 그것도 아침 10시. 뭐, 아침 10시라는 시간 자체는 이르지 않다. 하지만 집에서 성남까지 얼추 세 시간이 걸렸고, 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하려면 아침 5시에 일어나야 했다. 토요일 아침에 늦잠도 아니고 5시에 기상이라니.. 으헉.. 물론 처음부터 성남인 걸 알고 수락했는데, 전화로 처음 들었을 땐 내가 사는 곳 근처 도시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도를 보니 대충 정확하게 반대방향… 서울을 가로질러 있는 곳…

그래서 강의라도 제대로 안 되면 참 우울하거나 안타까울 뻔했는데.. 강의는 하는 내가 재밌다 싶게 나름 재밌게 진행했다. 이야기 흐름이 잘 이어졌고, 교육생인 분들의 적극적 질문에 대응했고. 농담을 못 하니 몸 개그도 좀 했고(..) … 무엇보다 세 시간 동안 진행하는 강의 말미에, 사람들이 기존에 알던 것이 다 혼란스럽고 흔들린다고 해서 기뻤다. 그것이 내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니까. 세세한 내용을 기억하기보다는 ‘내’가 당연하게 여긴 것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길 바랐다. 그리고 이 의도가 나름 성공한 듯하여 기뻤달까.
그런데 혼란을 야기하는 건, 내가 강의를 잘 해서 이룬 성과(?)가 아니다. 철저하게 교육생의 적극적 역할 덕분이다. 강의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것이 있거나 이해가 잘 안 되면 바로바로 질문을 줘서, 혹은 표정으로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수준으로 반응을 줘서, 내가 무엇을 더 설명해야 하는지, 무엇을 더 부연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이 적극 질문했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앎이 흔들린다고 얘기했다. 어쩌면 바로 이 발화가 앎이 가능하도록 하는 힘이 아닐는지… 보통 기존의 자기 지식과 배치되는 얘기를 하면 화를 내거나 내가 잘못되었다고 반응하기 쉽지, 자신의 지식이 흔들린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흔들린다고 말해줘야, 그 흔들림의 의미를 얘기할 수 있고 의미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토록 적극적 청중/교육생은 정말 오랜만이었달까.
그리하여 정말 즐거운 경험이자, 강사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교육생의 반응이 강의의 질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비트랜스젠더화된 장애, 비장애화된 트랜스젠더: 토론문 … 일부

지난 10월 30일, 장애여성공감 15주년 포럼에서 얘기한 토론문의 일부입니다.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글이기도 하고요. 아시겠지만, 전문은 상단의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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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장애여성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이 함께 할 수 있는 지점, 아니 함께 해야 하는 지점은 단지 화장실 정도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특히 몸과 젠더 이슈가 그렇다. 발제문에서도 지적하듯 장애여성은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에서 비/젠더화된다.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 가능성을 박탈하는 사회적 인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장애여성은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의 규제 안에 있지만 그 규범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장애여성의 여성성이나 여성 젠더 실천은 부정된다(아니, 이미 부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부정이 장애여성을 트랜스젠더화하진 않는 듯하다. 장애여성의 여성 젠더는 지배 규범에 부합할 수 없다고 미리 규정되었음에도 여성 젠더 범주 자체를 벗어나도록 하진 않는다.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엔 도달할 수 없지만 트랜스젠더는 아닌 수준, 그 어딘가에 장애여성을 향한 젠더 규범이 자리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의 젠더 실천 역시 언제나 지배적 젠더 규범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염색체 운운하며 도달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되거나 과잉으로 넘쳐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젠더 실천은 많은 경우 사회적 혐오나 해명의 대상이다. 수술 역시 마찬가지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많은 수술은, 때때로 죽음을 각오하고 진행하는 (결연한)행위로 이해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얘기하는 수술의 위험, 성취할 수 없는 지배적 이원 젠더 규범의 실천 등은 모두 비장애 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수술이 잘못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향한 우려는, 때때로 장애 혐오를 밑절미 삼는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의 젠더와 몸 구성은 비장애화된 사회적 규범에 따른다. 이것은 많은 트랜스젠더가 떠올리거나 얘기하는 이상적인 몸이 기본적으로 비장애인의 몸이란 점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몸은 결코 이 사회의 지배 규범적 젠더의 몸일 순 없지만 또한 비장애화된 몸의 수준에서 관리되고 또 논의된다.
장애인의 젠더 규범, 트랜스젠더의 비장애 규범에 관한 얘기는 서로 각자 다른 식으로 젠더 규범과 몸 규범을 겪는다는 뜻이 아니다. 장애-몸-트랜스/젠더가 분리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를 관리하고 우리 삶을 상상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장애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이 많은 공유점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애여성 운동과 트랜스젠더 운동은 바로 이 지점 어딘가에서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뒤늦은 모욕감: 메모

지난 화요일 수업에서, 수업 당시엔 그냥 불쾌한 느낌과 함께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말을 들었다. 정확하게 나만 지칭하진 않았지만 그 말엔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파악했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엔 꽤나 불쾌한 기분이자 정확하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는가 했다.
그런데 어제 저녁,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고, 그 찰나 나는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랬다. 그 말은 적어도 내겐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그것이 단지 내게 모욕적이지 않다고 해도 그 말은 매우 불쾌하고 문제적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당시엔 그냥 넘어갔다. 그 당시 바로 문제제기를 해야 했음에도 그냥 넘어가는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그 발언에 화가났다.
그 발언이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는 지금 밝히지 않는다. 이 모욕감을 정확하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 충분히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이 찰나를 기록해야겠다 싶어 적을 뿐이다.
아울러, 나는 늘, 모욕감과 분노를 느껴야 하는 바로 그 찰나가 아니라 뒤늦게 분노와 모욕감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분노하며 그냥 넘어가면 안 되었다는 걸 늘 뒤늦게 깨닫는다. 뒤늦게 발을 동동 굴리며, 정작 어떤 감정을 표출해야 할 어떤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화를 낸다.
나는 나중에 이 일을 소재로 글을 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지 않은가. 글을 쓴다는 건 뒤늦게 깨닫는 감정을 철지나지 않은 것으로, 때를 놓치지 않은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지 않은가. 그래서 글을 쓴다는 건, 내 삶의 시간을 깨닫고 또 그 의미를 달리 만드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