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타고남과 선택 논쟁에 붙여

고민의 출처가 있긴 한데요.. 관련 글을 연달아 쓰다보면 부담스럽기 해서 링크는 생략했습니다. 부담스럽다는 건, 어떤 논쟁이 부담스럽다는 게 아니라, 논쟁이 인신공격으로 오독될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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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는 타고난다고 말하는 순간, 이성애자 역시 타고난 범주가 된다. 이성애자가 타고난다고 말하는 순간, 이성애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적 구조 역시 자연스러운 질서가 된다. 이성애가 규범성, 즉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는 순간, 비이성애실천을 향한 혐오 역시 당연한 것이 된다.
이성애자 역시 타고났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가 현재 사회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성애는 타고났고 그래서 자연스럽고 이성애자가 다수니까 다수를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건 당연하고 운운. 이때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관용을 구하는 것 뿐이다. “전 착한 비이성애자니까 제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전 이성애자인 당신과 다를 게 없거든요.”
타고남, 생득설 같은 건(그리하여 타고났느냐 선택하느냐로 양자택일하도록 하는 건) 비이성애-트랜스젠더의 삶을 정당화하는 언설이 아니라 이성애-비트랜스젠더의 삶을 규범화/자연화하는 언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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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을 쓰기 위한 아이디어 메모 성격입니다. 그래서 글의 연결이 거친 편입니다.

타인의 외모는 나의 인식 수준을 알려줄 뿐이다

“찰나의 시간에 마주치는 타인의 외모를 통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라는 문장.
통상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의 젠더, 나이대, 계급, 인종, 출신국가, 직업군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 중 어떤 것(젠더, 인종, 나이?)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당연하다고 여긴다. 또 어떤 것은 타고남은 아니지만 특정 관습을 몸에 익히면서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어떤 추리소설엔 외모 만으로 용의자의 특징을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정보가 상대이 인식하는 상황과 일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은 남자라고 판단했다고 치자. 사실 ‘우리’는 타인을 남자, 여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분과 인식의 영역이 아니다. 구분과 인식의 영역에 포섭되는 존재는 여성 규범과 남성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특질이 있을 때다. (비슷하게 ‘우리’는 어떤 타인을 보며 ‘저 사람은 이성애자야’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비이성애자만 인식하고 뭉뚱거리는 형식으로 분류한다.)혹은 정말 매력적이거나. 하지만 남자로 파악은 그 사람이 자신을 남성/남자로 인지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상대는 자신을 남자로 인식할 수도 있고, 남자로 인식하진 않지만 여자로도 인식하지 않을 수 있고, 여자로 인식할 수도 있고, 이런 식의 분류 기준이 자신에게 적절/적합하지 않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그의 외모는 대개 남자로 통하는 형식이라고 할 때에도 그 외모는 호르몬을 장기간 투여한 남자 형식일 수도 있고, 호르몬일 이제 막 투여해서 별다른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 경우일 수도 있다.
타인의 외모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상대방과 관련한 정보가 아니다. 상대방이 인식하는 형식의 정보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호르몬을 투여한지 일주일된 mtf 트랜스젠더를 낯선 사람으로 마주친다고 할 때 ‘이 사람은 호르몬을 투여한지 일주일 되었네..’라고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데 없다.
타인의 외모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정보는 타인에 관한 정보가 아니다. 내가 타인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식, 즉 나의 수준에 관한 정보만 알려줄 뿐이다. 수준이란 말이 좀 부정적이라면 내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내가 세계를 해석하도록 배운 방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뿐이다.
이것은 또한 공부를 하는 태도에 관한 얘기기도 하다.
+뭔가 갑자기 ‘삘’을 받아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 뻔한 얘기다. 하지만 이 글을 밑절미 삼아 확장해서 나중에 어디 확장할 수 있다.

김조광수-김승환 동성결혼 행사에 붙여

관련기사
결혼식 하객을 모집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결혼을 하려 하느냐고. 사랑하니까요. 더 필요한 게 있나요?” http://goo.gl/Cy7Tix
김조광수-김승환 “누군가는 가야할 길…우리가 먼저 가는 것” http://goo.gl/3EvC9B
김조광수·김승환 “왜 결혼하냐고? 사랑하니까” http://goo.gl/tDaRPl
로맨스와 클리셰는 다른데 클리셰를 나열하면서 로맨스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로맨스도 없고 로망도 없고 진부함과 관습만 있다. 진부함, 관습, 그리하여 규범적 실천만 나열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래, 그것 역시 사랑일 수 있다. 아니, 그것 역시 사랑이다. 사랑이란 규범의 반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사랑이 사회적 변화를 위한 행동이라면 곤란하다. 가장 규범적인 행동만 반복하면서 그 행동이 사회적 변화를 위한 것이라면, 무슨 변화를 위한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벨 훅스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운동이 남성과 동등해지는 운동이라고 얘기할 경우, 도대체 어떤 남성과 동등해지려는 것인가를 질문했다. 중산층-비장애-백인-여성은 하층-비장애-흑인-남성과 동등해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비슷한 계층 혹은 자신보다 좀 더 나은 남성과 동등하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벨 훅스는 중하층 계급의 여성, 비백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님을 처음부터 알았다고 지적한다. 노동계급-흑인-남성은 상당한 피억업자기도 하다. 남성과 동등해진다고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동등해지고 누군가와 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해서 상황이 개선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이럴 때 동성결혼이 동성애자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떤 계급의 이성애결혼 양식과 동등해지려는 것일까?
운동을 통해 평등한 상황을 얘기할 때, 역할 모델은 누구인가? 즉 누구와의 평등/동등을 얘기하는 걸까? 만약 이성애자가 하니까 비이성애자도 누리겠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기존 질서의 문제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억압 제도를 강화하는 행동일 뿐이다. 나는 LGBT 운동이건 퀴어 운동이건 뭐건, 이런 식의 동화주의를 지향하는 방식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행동이 동화주의가 아님에도 동화주의로 독해되는 경우와 대놓고 동화주의를 지향함은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의 ‘당연한’ 결혼 이슈가 정말로 이성애규범적/동성애규범적 행동의 전형이라고 읽고 있다. 김조-김 커플의 행사가 둘만의 ‘사적’ 행사가 아니라 명백한 공적 사건이라면, 꼭 동성결혼이라는 형식이어야 할까? 이번 행사가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위한 쇼라면, 동성결혼이 최선인지 정말 묻고 싶다. 나는 동성결혼 형식은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성결혼 형식이라면, 꼭 지금과 같은 내용이어야 하는지도 묻고 싶다. 이성결혼만을 규범화하는 현재 사회 제도를 문제 삼겠다고 할 때, 동성결혼을 주장해야 하는지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 삼을지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을 구성하고 효과를 야기한다.
김조-김 결혼쇼에서 가장 불쾌한 지점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동성’결혼 혹은 비이성애결혼을 무시하는데 있다. 기혼이반, 결혼하는 바이, 결혼하는 트랜스젠더,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 동성 관계의 공적 결혼, 신문기사에 남아 있는 비트랜스-비트랜스 동성 관계의 결혼은 현존하는 결혼이 이성애-비트랜스젠더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행사는 역사와 복잡한 양상을 모두 무시하고 있다. 이 찰나, 김조-김 커플 혹은 그 지지 집단이 얘기하는 동성결혼에 포섭되는 존재는 누군지 묻고 싶다. 이 행사가 상상하는 ‘동성결혼’에 속하는 이들이 누군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조-김 커플이 얘기하는 동성결혼의 구별짓기엔 이성애-동성애(혹은 게이남성)만 있다는 인상이다. 기혼이반, 트랜스-비트랜스 동성결혼 등은 아예 구별짓기의 틀 바깥으로 추방된다. 현재 이슈 구도에서 기혼이반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못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혼을 얘기하고 싶다면 좀 더 다양한 맥락에서 다르게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을까? 난 이 지점이 가장 불쾌하다.
아우, 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