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안도의 비용, 걱정의 비용, 불안의 비용: 바람, 병원

바람 병원에 다녀왔다. 일요일 저녁에, 내일은 바람 병원에 꼭 데려가야겠다고 다짐했고 다행스럽게도 월요일 날씨가 좋았다. 굳이 하루 굶길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습관을 쉬 못 버리는 나의 태도로 인해 결국 바람은 하루 굶었다. 아침에 알바 가느라 나가려고 하자, 바람의 표정이 ‘야, 너 어디가! 어디가냐고! 나랑 같이 있든 밥을 주든 하라고!’다. 미안하지만 어쩔 텐데.. 바람아, 미안…
저녁 5시에 알바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람을 억지로 데리고 병원에 갔다. 걸어서 15-20분 거리. 어쩌면 조금 덜 걸릴 수도 있다. 이동장과 바람의 무게가 무겁고 바람을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평소 속도로 걸을 수 없어 좀 더 걸리지 않았나 싶다. 평소 발걸음이라면 10-15분 정도 거리? 역시나 우와앙 울었지만 지난 동네에 비해 주변 사람은 관심을 주지 않는다. 보광동에선 “아이고 고양이네”라며 재밌어 하는 반응이 있었는데 이 동네에선 없다. 아울러 도로가 있으니 바람의 울음이 자동차 소리에 묻힌다. 그래도 바람은 끝까지 울었다. 간신히 병원(헬릭스동물메디컬센터)에 도착했다. 미리 찾아본 것처럼 병원은 깨끗했고 모든 것이 유리여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짧은 메시지 하나 쓸 정도의 시간만 기다렸다가 의사를 만났다. 일단 내가 요구하는 사항을 모두 말했다. 첫째, 눈이 요상하다. 왼쪽 눈이 오른쪽 눈에 비해 좀 덜 뜨는 경향이 있다. 둘째, 일상적으로 하는(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일 년도 더 안 했;;;) 건강검진 즉 피검사를 하겠다. 의사는, 알았다. 피검사는 이런저런 종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하는 것과 선택지 중에서 골라라. 눈은 세 가지 정도 조사할 것이다. 이것을 다 합하면 비용은 이정도다. 피검사에서 그건 너무 비싸고 항목은 좀 적지만 싼 것으로 하겠다. 이야기는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의사는 상담실에서 진찰실 혹은 검사실로 바람을 데려갔다.
피를 뽑고 눈에서 눈물을 채취하고 청진기로 심장 박동 등을 재고 하는데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우아앙 울던 바람도 이내 잠잠했다. 필요한 조치를 하고 나서, 바람은 상담실로 돌아왔고 둘이 앉아 가만히 있다. 나는 바람을 쓰다듬으며 야옹야옹했고 바람은 내 손길이 닿아야 안심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참 오래 걸린다 싶었다. 의사 한 명이 진료하던 병원에선 기다리고 있으면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기도 하던데, 수술실도 갖춘 대형병원인 이곳에선 검사하기에 바쁘다. 어느 것도 더 좋고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불안했다는 뜻이다. 건강에 아무 문제 없다는 답을 듣길 기대하면서도 행여나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한참을 기다려서 결과가 나왔다.
총 여섯 가지 검사를 하기로 했지만(피와 관련해서 세 개, 눈과 관련해서 세 개) 최종 네 개만 검사했다.
(여기서 “2부에서 계속”이라고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ㄱ. 눈: 안과: 눈물분비량검사Schirmer Tear Test, STT
병원을 찾은 이유다. 눈을 작게 뜨는 건 특별하게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의사는 이 부분은 신경쓰지 않았다. 눈물을 채취해서 검사했고 상세 검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눈에서 약간의 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의 농도가 진하지 않았다. 있어도 되는 일은 아니다. 약간 있다고 해서 그럼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건강하다면 균이 없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닌 듯한 반응이었다. 나중에 약을 처방할 때도 그랬다. 항생제를 받아가겠냐고 물었다. 이 말의 농도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처방할 수준은 아닌 느낌이었다. 그래서 처방받았다. 물약을 눈에 주면 바람이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때 취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난 눈 문제로 병원에 갔는데 눈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슈가 되었다. 그나저나 안약을 어떻게 주지?
ㄴ. 혈액: 혈청 Chemistry(기본6종)
ALKP 49 (14-111) NORMAL
ALT 88 (12-130) NORMAL
BUN 22 (16-36) NORMAL
Creatinine 2.4 (0.8-2.4) NORMAL
Glucose 103 (76-145) NORMAL
Protein-Total 7.2 (5.7-8.9) NORMAL
단백질을 걱정했다. 마지막 검사 때 단백질 수치가 낮았고 신경을 써주라고 했다. 단백질 수치가 낮으면 평소엔 문제가 없지만 상처가 났을 때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단백질 보충제를 먹였다. 마침 채식사료 파는 곳에서 단백질 보충제도 팔고 있어서 잘 되었다 싶어 먹였다. 맛있는지 꾸준히 잘 먹었고, 사료와 섞어 먹였다. 그리고 결과는 소위 정상치 범위에 속한다. 다행이다.
리카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간수치가 안 좋았고 이것이 신경 쓰였기에 간수치가 평균에 속하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ㄷ. 혈액: 혈청 Electroly tes. Blood gas analysis
Na+ 150 (150-165) NORMAL
K+ 3.82 (3.7-5.9) NORMAL
Cl- 109 (115-126) NORAL
PH 7.309 (7.240-7.400) NORMAL
PCO2 40.6 (34.0-38.0) HIGH
PO2 44.9 (34.0-45.0) NORMAL
HCO3 19.9 (22-24) LOW
Anion Gap 25.5 (13-27) NORMAL
tHb 15.9 (8.0-15.0) HIGH
이번에 처음 받은 검사다.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를 본 의사는 괜찮다고 했다. Cl-보다는 Na+, K+가 더 중요하고 이 수치가 좋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래. 걱정할 것 없다는 해석이 중요하다. 건강하다는 해석을 듣기 위해 이 비용과 시간을 부담하고 있는 거니까.
ㄹ. 혈액: 혈구 CBC2 (Laser cyte)
WBC 4.99 (5.5-19.5) LOW
WBC-Lymph(#) 3.21 (0.4-6.8) NORMAL
WBC-Mono(#) 0.29 (0.15-1.5) NORMAL
WBC-Neut(#) 1.05 (2.5-12.5) LOW
WBC-Eos(#) 0.42 (0.1-0.79) NORMAL
WBC-Baso(#) 0.03 (0-0.1) NORMAL
WBC-Lymph(%) 64.3 (20-55) HIGH
WBC-Mono(%) 5.7 (1-4) HIGH
WBC-Neut(%) 20.9 (35-76) LOW
WBC-Eos(%) 8.4 (2-12) NORMAL
WBC-Baso(%) 0.7 (0-1) NORMAL
Hematocrit[Hct] 16 (30-45) LOW
RBC 3.43 (5-10) LOW
Hemoglobin[Hb] 14 (9-15.1) NORMAL
Reticulocyte(#) 13 (0-50) NORMAL
Reticulocyte(%) 0.4
MCV 46.7 (41-58) NORMAL
RDW-CV 20.6 (17.3-22) NORMAL
MCHC –.– (29-37.5)
MCH 40.9 (12-20) HIGH
Platelet 1087 (175-600) HIGH
MPV 9.1
PCT 0.99
PDW-CV 24.4
뜻모를 말이 가득한 결과. 이 결과가 문제였다. 우연히 검사한, 그저 건강 결과를 알기 위한 검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WBC 4.99 피를 뽑는 과정에서 응고 현상이 생기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응고 현상은 없었던 듯하고 심장박동도 좋고 기본 검사는 괜찮은 듯하니 낮은 수치는 실험기기의 오차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이 부분부터 설명이 길었기에 좀 긴장했지만 어쨌거나 의사는 날 안심시키려 했다. 여기까지는…
두 개의 유난히 낮은 결과 Hematocrit 16, RBC 3.43
두 개의 유난히 높은 결과 MCH 40.9, Platelet 1087.
해석해주기 전에 최근 활력이 좀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근래 좀 그렇다고 답했다. 빈혈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건강하지만 빈혈이며 원인을 선뜻 짚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저런 검사를 했지만(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 ) 급성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바이러스가 원인일 수도 있고 어릴 때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며 검은색 혈변을 누느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아니라고 했다. 빈혈이 심하거나 위험하면 입술(잇몸인가? ;; )과 귀가 하얗다고 했다. 그러며 직접 확인하더니 입술은 분홍색이고 귀는 약간 하얗다고 했다. 얘기를 한참 듣다가 최근 일주일 사이에 활력이 좀 떨어졌는지 자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의사는 고민을 하며, 일단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한 달 뒤에 다시 검사를 하자고 했다. 보통의 건강검진이면 3-6개월이지만 현재 상태로는 한 달 뒤에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덜컥..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문제가 있는 듯하면 바로 데려오라고 했다. 다만 당장 특별한 약을 처방하지는 않았다.
그래, 색깔을 물었을 때 슬펐다. 바람의 눈이 확실히 이상한 듯하다고 확인한 건 내가 아니다. E가 바람의 눈을 보더니 투명도가 다르다고 말해줬다. 그제서야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이곳에도 여러 번 적었지만 난 소위 색약이다. 색약 아닌 사람이 색을 구분하듯 그렇게 색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사가 변이 검은색이냐고 물었을 때 선뜻 답할 수 없었다.변이 검은 적 없다고 확신하지만(어제 저녁에도 검은색이 아님을 확인했지만… 검은색 정도는 인지할 수 있으니까) 내가 정말 확신해도 괜찮은지 확신이 없다. 그래서 선뜻 답을 못한다. 입술(잇몸?)과 귀가 하얀지 분홍색인지도 구분이 잘 안 된다. 의사는 귀를 자세히 보더니 좀 하얗다고 했다. 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이런 나, 괜찮은 걸까? 덜컥 겁이 났다. 아니,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곤 믿지 않지만 바람이 아픈데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할 때, 과연 내게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귀 색깔이 하얀편인지 건강한 분홍색인지 구분 못하면서, 나 괜찮은 걸까?
그리고 채식사료가 다시 한 번 걱정이었다. 의사에겐 말하지 않았다. 채식사료가 원인이 아닌데도 채식사료를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원인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바람의 건강 추이를 확인할 수 없으니 채식사료가 원인인지 예방접종을 하지 않아 생길 수 있는 바이러스가 원인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괜히 신경이 쓰인다. 내가 유난을 떠는 걸까? 그냥 다른 집 고양이 키우듯 그렇게 키우면 되는 걸 괜히 유난 떠는 걸까? 채식사료란 얘길 하지 않았을 때(채식사료여도 기본 영양분은 다 포함하고 있으니), 의사는 기본 사료만 잘 먹어도 빈혈에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서 영양제라도 먹여야 할까를 물었을 때 기본 사료만 먹여도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눈엔 항생제를, 면역을 위해(빈혈과는 별개로) 엘라이신을 처방 받아 왔다. 병원 가는 길은 정말 멀던데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빈혈 고민에 언제 왔는지 모르게 왔다.
사료를 블렌딩 해야 할지 어떨지 고민이다. 다른 건강식이 있으면 좋겠는데… 걱정이 늘었지만 미리 알고 어떻게든 대비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내가 무엇을 대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안도의 비용, 걱정의 비용, 불안의 비용은 최종 172,700원이 나왔다. 이 비용이 순수하게 안도의 비용이었다면 기분이 좋았을 텐데.. 또 다른 고민이 늘고 있다.

피곤, 알바 다시 시작, 개강

그러니까 세 가지가 겹쳤습니다.

8월 한 달 쉬었던(무급) 알바를 9월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원래 이렇게 계약한 것이니 특별한 건 없는데요… 아아아..,. 누가 절 부양해주면 좋겠어요.. ;ㅅ; 알바하는 거 정말 귀찮아요…
정확하게는 알바가 귀찮은 게 아닙니다. 너무너무너무 피곤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상하게 자고 일어나도 계속 피곤해요. 정신을 차리기 힘든 수준이랄까요.. 몇 시간을 자건 낮에 다시 한 번 자고 얼어나야 간신히 정신이 들까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요. 몸에 피곤만 남은 느낌이랄까요. 카페인이라도 투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찰나기도 합니다. 여름이 지나면 좀 괜찮아지려나요? 아침에도 간신히 일어나는 상황이라 신경이 쓰이긴 합니다만…
이 와중에 내일은 또한 개강입니다! 꺄아! 이건 좋아요. 피곤하다는 것 빼곤 좋아요. 후후후.
피곤한 게 문제네요. 끄응..

[영화] 숨바꼭질: 계급 공포

01

며칠 전 영화 <숨바꼭질>을 봤다. 평은 그럭저럭.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진 재밌었다. 범인이 밝혀진 다음엔 긴장감이 떨어졌고 평이했다. 하지만 이건 취향을 탈 듯.
*어쨌거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범인은 트랜스젠더 형상이었다. 주인공이 형의 집에서 여성용 속옷을 발견했을 때, 나는 여성동거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보다 형이 여장을 하거나 트랜스젠더거나, 대충 그런 가능성을 기대했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 형상을 어떻게 범죄 형상으로 재현하는지 궁금했다. 뭔가 꽤나 재밌거나 한없이 진부하거나, 뭐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아니었다. 범인은 이웃의 다른 사람이었고 범인을 추리하는 측면에선 그저그런 가능성이었다. 이 찰나, 좀 김이 빠졌다. 그렇다면 형의 방에 깨끗한 여성용 속옷이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범인이 일부러 가져다 두었다고 해도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범인은 집이 중요하지 집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어떤 혐의를 씌우는 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영화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야 하는 건 이해한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부실하게 처리하나, 싶기도 했다. 주인공이 공격 당하기 전까지, 범인은 사람을 죽인 다음 랩 혹은 비닐로 포장했다. 그래서 무기로 죽이진 못 해도 질식사는 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을 공격한 다음엔 그냥 방치했다. 다른 시체와 함께 방에 방치했고, 그 방을 집 안에서 그리고 집 밖에서 열 수 없도록 하지도 않았다. 그냥 깨어나면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방치했다. 이전 행동 특징과 연결이 안 된다. 물론 억지로 합리화할 순 있다. 이를 테면 이전 피해자는 제대로 숨겨야 그 집을 차지할 수 있지만, 주인공은 전혀 다른 동네에 살기에 대충 처리해도 된다는 것. 억지로 이해하려면 할 순 있지만 글쎄…
02
그렇다고 영화를 다 보고 아까웠냐면 그렇지 않았다.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다. 집을 가진 자의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피해자 혹은 주인공 집단은, 동네를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상당히 넓고 고급스런 집을 소유하고 있으며 카페를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윤택하다. 가해자 혹은 범인은 매우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으며 마땅한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 정도면 쉽게 포착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택 문제가 영화의 배경이다. 어떤 사람은 주택 1,000채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 살만한 집에서 살아보지도 못한다. 현재 한국의 주택공급율은 한 명이 한 채 이상 소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세대란이다. 집값 잡는다고 쇼를 한다. 그래, 쇼를 한다. 솔직하게 말해 주택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공무원이 한국의 주택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의지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고위 공무원은 어느 정도 괜찮은 자가 주택이 있을 것이며 집값이 오르면 이득이다. 그들이 집값을 안정시키거나 낮춘다는 건 곧 스스로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는 정책을 추진함과 같다. 전세대란과 주택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책입안자 및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자의 계급 이해가 해결할 수 없도록 한다고 의심한다.
안락하고 드넓은 집을 소유한 이들에게, 집이 없어서 작은 집이나마 구매하거나 전세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결코 좋게 보일리 없다. 자신의 집에 무단 점거했다가 월세를 제대로 안 내고 도망갈 수도 있고 집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그런 부정적 존재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임대인은 분명 전세 혹은 월세를 줬음에도 임차인의 집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집의 상태를 확인한다. 임대인과 임차인은 결코 연대할 수 없다. 임대인에게 임차인은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또 공포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다. 때때로 언제든 외국으로 이민갈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집단에게 가난한 이들은 그저 공포의 대상이다. 영화는 바로 이 찰나를 다룬다. 계급 간의 갈등이 공포로, 호러로 변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에선 계급 간의 이미지가 공포고 호러다.
03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주거 밀집 지역이고 꽤나 깨끗한 편이다. 반면 이전에 살던 이태원의 보광동은 재개발을 앞둔 지역이었다. 도로는 있지만 자동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고 골목 사이로 또 골목이 있다. 처음 오는 택배기사는 자칫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 쉽다. 주택의 높낮이가 다 달라서 난 이층집의 이층에 있었는데 바로 옆집 삼층 옥상이 보였다. 하지만 자취를 하며 다양한 동네에 살았고 내겐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가장 괜찮은 동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괜찮은 동네였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로선 감지덕지였다.
이사하는 날, 이사를 돕는 직원분이 내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동네에서 살았느냐고. 처음엔 이사를 축하하는 단순한 인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동네에서 살았느냐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 찰나, 나는 살만하지 않은 공간에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사는 지역이 계급을 만드는 찰나일 수도 있다.

영화는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정비된 모습과 주인공의 형, 범인이 사는 동네의 정리되지 않은 모습을 대조한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범인이 사는 지저분한 동네를 혐오스럽고 불결한 형태로 재현한다. 그런 불결하고 지저분한 동네에서, 나는 임대인의 문제만 제외하면 무척 즐겁게 살았다. 다른 말로, 보광동에 살던 시절의 나는, 영화에서 재현하는 계급 혐오 시선의 대상이기도 하다. 범인과 나는 동일한 피사체다.


04
동네의 안전, 거주 공간의 안전은 젠더화되지만 또한 계급화된다. 주인공이 사는 곳엔 주민이 무슨 항의만 해도 경비원, 안전요원 등이 여럿 달려오고 쩔쩔맨다. 곳곳에 CCTV가 있고 CCTV가 비추는 곳을 집안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아마 경찰도 하루에 몇 번씩 순찰할 것이다. 하지만 범인이 사는 곳은 그렇지 않다. 사고가 나도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별로 없고 그냥 사라졌나보다 하고 만다. 가까운 경찰서 역시 없는 듯하다. 어떤 위험 사고가 발생할 때 바로 부를 경비원이나 안전요원도 없다. 계급이 안전을 담보한다.
이태원 일대의 한남동과 보광동은 붙어 있는 지역이고 경찰의 순찰이 잦은 지역이다. 하지만 각 지역을 순찰하는 목적은 다르다고 느낀다. 한남동을 순찰할 땐 거주자의 재산과 안전을 보호할 목적일 것이다. 보광동을 순찰할 땐 위험한 거주민을 감찰할 목적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해도 그 의미와 뉘앙스는 다르다.
영화 도입에, 여성역 인물이 동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줬다. 이것은 젠더화된 불안이다. 남성역 인물에겐 그럭저럭 살 수 있는 공간이지만 여성역 인물에겐 그럴 수 없다는 뜻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계급화된 불안이기도 하다. 여성역 인물은, 애인에게 이 동네에서 벗어나 괜찮은 동네에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얘기한다. 그 말은 안전을 젠더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지역, 계급과 얽혀 있음을 암시한다.
05
동네의 위험을 알려주는 상징으로 외국인 거주자를 등장시키는 장면은 정말 불쾌했다. 외국인 혐오, 외국인 공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찰나다. 많은 외국인이 집값이 싼 곳을 찾다보니 영화가 재현하는 가난한 동네에 머물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지나가는 외국인을 통해 동네의 계급과 공포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06
이 영화의 가장 큰 공포는 영화에서 다루는 다양한 공포 요소를 전혀 성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