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취향: 성실함, 꾸준함

지난 시티브레이크 공연을 보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난 불꽃처럼 확 타올랐다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삶보다는 꾸준히 오래 가는 삶을 사랑한다. 끝내주는 앨범 한 장 내고 대충 살다 몸이 망가져서 더 이상 음악을 못 하는 전설에, 천천히 꺼지는 불꽃이 되기 싫어 삶을 마감하는 생활 방식에 매력을 못 느낀다. 그 앨범을 좋아할 수는 있다. 어느 순간 집중해서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래 좋아하지 않고 열광하지 않는다.

혁명과 개혁. 굳이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를 비교하자면, 피델 카스트로가 더 대단하다. 어떤 사건을 확 불러 일으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일을 장기 지속할 수 있도록 끌고 가는 것은 더 어렵다. 단기의 혁명보다 장기의 개혁이 더 어렵다. 그래서 나는 현대 사회의 히트 상품 체 게바라보단 피델 카스트로가 더 대단하다고 평가한다. 굳이 예를 들어 비교하자면 그렇다.
음악의 취향도, 이론가의 취향도 이와 같다. 1970년대 끝내 주는 앨범 몇 장 내고는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거나, 그 시절 앨범을 내고 인기를 끌자 마약을 한다거나 술 등으로 흥청망청 지내다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이들에겐 애정이 안 간다. 난 그런 행동이 용기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용기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과 어떤 스타일을 꾸준히 실험하고 그 실험을 위해 제 삶을 적절히 관리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20년, 30년 뒤에도 여전히 원하는 음악을 하고 공연을 하는 것이 용기고, 진짜 실력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꾸준함과 성실함을 사랑한다. 모든 사람이 꾸준하고 성실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게을러서 성실하지 않고 꾸준하지 않지만,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로 꾸준함과 성실함을 좋아한다. 꾸준하고 성실한 이론가의 글이 더 좋다.
여름이라 끊임없이 늘어진 상황에서, 조금은 반성이라도 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고는 있는데… 흠…
부끄럽다..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와 관련하여… : 메모

정신과 조치는 필요없다.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 아니니까. 정신병을 폄훼하는 게 아니다. 젠더를 진단할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뜻이다. 젠더를 정신병으로 진단하겠다면,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라 비트랜스젠더 역시 진단해야 한다. 이 사람은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젠더로 살고 있는 정신병, 저 사람은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젠더로 살지 않고 있는 정신병… 그럼에도 처방전은 필요하다. 현재 의료 체계에서 적법하게 호르몬을 구하려면 처방전을 제출하는 방법 뿐이다. 정신과 진단서는 필요없지만 처방전은 필요하다는 얘기, 일견 모순 같을 수 있다. 의료 처방전을 필수조건/전제조건으로 인식하느냐,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도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모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젠더가 의료 범주란 점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만(이것이 근대 젠더 체계의 토대란 점을 기억하자) 그럼에도 이런 체계를 받아들이느냐 바꾸려고 하느냐,라는 인식론적 차이가 있다. 다시 한 번 오해하지 말자. 정신과 진단서를 받는 사람은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이런 오독은 하지 말자. 젠더를 정신과 진단을 통한 관리 체계가 아니라 처방전으로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다. 이것은 일시적 협상안이다. 호르몬은 어떤 처방전 없이 임의로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면, 신분증 제출 없이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록하도록 하자. 딱 여기까지다. 이것이 최대치의 타협 지점이다. 호르몬을 투여할지 말지, 자신의 몸을 변형할 수 있는 약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온전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제 3자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현재 사회에선 어쨌거나 처방전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그렇다. 그렇다면 정신과 진단서 없이 본인의 진술을 믿으며(검사처럼 심문하고 재판관처럼 판단하지 않으며) 그 진술을 믿절미 삼아 처방전을 발급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그렇게 거창한 일도 아닌데, 이 일이 왜 이렇게 지난하게 느껴질까?

현대카드 슈퍼콘서트19 시티브레이크 – 뮤즈!

지난 주말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9 시티브레이크”에 다녀왔습니다. 알라딘-페이게이트 결제 이슈로 현대카드에 안 좋은 감정은 있지만 콘서트는 콘서트(…일 수밖에 없는 라인업..;; ). 올 여름 진행한 다섯 개의 록페스티벌 중 하나기도 하지요.

요약하면 정말 재밌었어요. 신나게 여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시티브레이크 자체의 음향은 정말 실망이었습니다. 출연진 중 자신들의 음향시스템과 함께 하는 공연과 그렇지 않은 공연의 차이가 엄청났거든요. 현대카드 측에서 고용한 것으로 추정하는 음향팀의 소리는 정말이지.. 종종 찢어지고 뭉개지고.. 기본적으로 소리 자체를 제대로 못 잡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뭐.. 이건 이거고 아무려나 즐거웠어요. 재밌었어요.
17일
이기 앤 더 스투지 Iggy and the Stooges – 오오.. 노익장! 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실례겠다 싶을 정도로 재밌었습니다. 1947년 생이면 60대 중반인데도 신나게 뛰어다니며 노래하는데 감탄 또 감탄!
림프 비즈킷 Limp Bizkit –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초반에 조금 봤습니다.. 첫 두 곡이 Rollin’과 My Generation. 신나게 놀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후기를 찾아보니 이날 가장 만족스러웠다는 얘기가 많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이 뮤즈니까요.
뮤즈 Muse – 예상보다 일찍 시작했고(30분 정도 지연할 줄 알았는데 7-8분 정도만 지연!) 일정시간표보다 빨리 끝난 공연. 절대 만족입니다. 일단 그냥 행복했어요. 자리는 운 좋게 가장 앞 펜스에서 3미터 이내 거리에서 봤습니다. 림프 비즈킷을 사실상 포기하고 일찍 간 뒤 어떻게 운이 좀 좋았거든요.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가 힘들어서 뒤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여럿이기도 했고요. 암튼 연주곡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건 Hyper Music! 정말 라이브로 이 곡을 들을 수 있을 줄 상상도 못 했기에 정말 좋았습니다. 이번 투어의 상징이라는 로봇도 나왔고 마무리는 역시나 Knights of Cydonia! 열심히 뛰면서 놀았고 즐거웠습니다.
(찾아보니 애국가를 간단하게 연주한 걸 두고 감동이란 사람도 많은데 전 좀 뜬금없었습니다. 하지만 Panic Station 뮤직비디오에서 욱일승천기를 사용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어서..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암튼 뮤즈는 온다면 언제든 가야지요. 후후후.
여담으로 뮤즈 공연을 시작하기 전, 뒤에 있던 어느 일행이, 내 생에 뮤즈 라이브를 보다니 공연 끝나고 가장 행복한 기분으로 자살하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후후후. 뮤즈 공연 처음 갔을 때 제가 딱 그 기분이었죠. 공연 보기 전에 죽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공연 보다가 정말 행복해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기분이었고요. 지금은요? 죽긴 뭘 죽어요. 앞으로 있을 공연 계속 봐야죠!
18일
김창완밴드 – 산울림 시절 곡을 기대했고 역시나 나와서 정말 신났습니다. 끝까지 다 볼까 하다가 다음 공연 시간 때문에 마지막 부분을 놓친 건 아쉬웠지만요. 역시 음악은 라이브죠. 후후후.
애쉬 Ash – 이름만 알고 있어서 이번에 약간의 예습을 한 밴드. 시작 시간 직전에 갔는데 한산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엔 자리가 가득 찼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밴드는 아닌데, 인기 좀 있는 밴드 아니었나 싶어서요. 암튼 덕분에 시작 직전에 갔음에도 앞자리에서 신나게 봤어요. 좋아하는 노래, 특히 Evil Eye가 나와서 특히 좋았고요. 음향 문제로 기타 사운드가 찢어지는 등 듣기에 좀 괴롭기도 했는데, 앞자리여서가 아니라 음향 조율을 제대로 안 해서 귀가 좀 아팠다는 문제만 빼면 정말 좋았습니다. 어느 순간엔 음악이 머리 속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요.
신중현그룹 – 메탈리카보다 더 기대한 시간이었습니다. 시티브레이크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까지 나왔다면, 김창완/산울림, 신중현, 조용필까지 정말 환상이고 완벽했을 텐데라는 고민도 했지요. 흐흐. 애쉬에 비해 음향을 좀 더 신경을 써서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음향 사고가 있긴 했지만요. 신중현, 신대철, 신윤철까지 끝내주는 기타의 향연이라 이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감동 그 자체였고요. 물론 노래는 신중현이 아닌 다른 분이 불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흐흐흐. 아이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총을 쏘는 퍼포먼스,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며 태극기를 펼친 퍼포먼스는 별로였고요. 이런 아쉬움과 별개로 연주 하나는 정말 좋았고, ‘미인’은 정말 어떻게 이런 멜로디와 리프를 만들었을까 싶게 감탄 또 감탄입니다.
메탈리카 Metallica – 예전엔 좀 많이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냥 좋아하는 밴드였는데.. 공연을 보면서 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음향, 무대 디자인, 무대 운용, 연주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끝내줬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에 앉아서 봤는데 그냥 압도되어서 넋을 놓았고요. 좋아하는 곡이 계속 나와서 좋기도 했지만, 라이브로 볼 수 있을까 기대한 The Memory Remains가 나와서 정말 좋았죠. 특히 이 곡은 떼창이 압권. 멤버들은 일부러 악기 연주를 중단하고 떼창만으로 적잖은 시간을 즐겼을 정도니까요. 공연을 30분 늦게 시작했고, 차 시간이 있어 중간에 일어나야 해서 정말정말 아쉬웠습니다. 이런 공연은 정말 끝까지 봐야 하는데, 집이 멀다는 게 안타까웠죠.
그나저나 메탈리카 공연이 들려준 음향을 다른 그룹의 공연에서 제공하는 건 정녕 불가능한가요?
이틀 간의 즐거운 시간이 지났으니 내년을 기대해야죠. 흐흐.
그리고…
공연을 보며 깨닫기를, 자기 하고 싶은 걸 오랜 시간 하기 위해선 성실함과 자기 관리가 가장 중요하단 걸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1947년 생인 이기팝, 1980년대 초반에 데뷔한 메탈리카, 신중현, 김창완 등 나이가 적다고 할 수 없음에도 지금 이 시간 이렇게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건 운이 아니죠. 단순한 인기 문제도 아니고요. 예술 혹은 어떤 창의적 활동을 하기 위해선 틀을 깨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요. 네, 맞아요. 틀을 깨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대충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틀을 깨면서도 엄청난 자기 관리와 성실함이 없다면 불가능하죠.
그래서 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제 게으름을 이 순간도 반성만 했습니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