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글래스, 기술, 장애

구글글래스(Google Glass)와 관련한 이런 저런 얘기가 잊히지 않고 계속 등장하는 와중에.. 구글글래스를 사용한 장애인이 겪은 변화와 관련한 기사가 나왔다.

관련 영상: http://goo.gl/HfNEi9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자신이 원할 때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통화나 문자를 주고 받는 게 어려웠는데 구글글래스를 통해 원할 때 사진을 찍고, 문자를 즉각 주고 받는 일 등이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구글글래스가 발표된 이후 줄곧 나온 회의론 중 하나는, 안경도 불편해서 잘 안 쓰는데 안경처럼 착용하는 구글글래스를 누가 사용하겠느냐는 것이다. 불편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이 어떤 몸 경험을 밑절미 삼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겐 번거롭겠지만 누군가에겐 매우 유용하다. 물론 구글글래스가 모든 장애인에게 유용하단 뜻은 결코 아니다. 장애의 범주는 폭넓고, 어떤 장애인에겐 무용지물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장애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안경 및 유사 제품 착용이 정말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으니 무용지물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어떤 혁신도 무용지물이라고 말함과 같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비장애인 맥락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비슷한 예로, 구글에서 무인자동차를 개발하고 관련 영상을 수시로 공개할 때도 이런저런 부정적 반응은 많았다. 하지만 무인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은 자신의 시각으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 뿐일까? 시각장애인도 자가용을 소유하고 ‘직접’ 운전해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이건 기존의 운전자 몸이 아닌 다른 몸과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한다.
구글 무인자동차 관련 영상: http://goo.gl/ysbYH8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이런저런 비판이 등장하지만 그 비판이 어떤 몸 경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함께 사유해야 할지 않을까? 그리고 기술과 몸을 둘러싼 상상력을 어떻게 바꿔낼 수 있는지도 같이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 뭐, 이런 고민을 하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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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역사, 뻔한 얘기

어떤 이슈와 관련한 역사를 읽노라면 관점과 입장은 이전에 비해 개선은 되어도 진화하진 않는다. 관점은 진화하는 게 아니라 경합한다. 어떤 시기엔 ㄱ이란 논의가 우위를 점했다면 다른 시기엔 ㄴ이란 논의가 우위를 점할 뿐이다. 그러다 또 다른 시기엔 그 모두를 비판하는 입장이 등장하고. 그런데 이것을 진화 담론으로 이해하는 순간, 과거의 흔적과 논의를 놓친다. 이를 테면 트랜스젠더 범주를 의료적으로 접근하고 의학적 조치를 취함에 비판하는 입장은 근래 서구 트랜스젠더 운동과 이론적 논의가 활발히 등장한 1990년대 이후부터 가능했던 게 아니다. 미국의 경우, 미국 내에서 적법한 의료적 조치가 가능하지 않았을 때도 트랜스젠더의 의료화/병리화를 비판하는 움직임은 존재했다. 그 입장이 그 시기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또 그 시기의 병리화 비판이 지금과 같은 차원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논의가 쌓이면서 더 섬세하고 또 정교하게 변하긴 했다. 즉 관점과 입장의 역사에선, 어떤 변화는 있어도 진화는 없다. 과거엔 인식 수준이 낮았는데 지금은 아니더라는 식의 접근은 정말 곤란하다. 역사 없는 혁신은 없다. 버틀러의 젠더 논의 역시, 내가 어느 글에서 기술했듯 다른 많은 논의가 축적된 지형에서 가능했다.

지금 나의 한계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주제와 그 주제를 지금 내가 쓸 수 있는지는 늘 별개의 문제다. 물론 나는 많은 경우 내가 쓰고 싶은 주제를 어떻게든 쓰곤 했다. 어떻게든 뭐라도 만들려고 애쓰곤 했다. 혹은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수준에서 내가 쓰고 싶은 주제를 모색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욕심을 냈다. 아이디어는 괜찮았다. 글이 지향하는 방향성도 괜찮았다. 그런데 내가 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다루려고 하는 내용이 평소 충분히 익히지 않은 내용이었다. 7월 한 달, 관련 논문을 몇 편 읽었지만 그 뿐이었다. 논문 몇 편으로 관련 이슈를 알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해당 이슈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만행에 가깝다. 아니, 단지 한두 문단 인용하거나 언급할 거라면 논문 몇 편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글을 지탱하는 주요 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논문 몇 편을 읽고 구한 얄팍한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앎이 필요하고 삶에 엮은 고민이 필요하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삶으로 엮어내는 부분이 한없이 부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사실 아이디어를 잡았을 때부터 해당 주제에 무지하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글 좀 찾아 읽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란 고민을 했다. 어떻게 안 되었다. 어떻게 안 되는 수준을 넘어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어서 한 문단을 쓰기도 힘들다는 걸 확인했다. 억지로 쓰려면 쓸 순 있겠지만 변죽만 끓이다 말테고 피상적으로 떠드는 수준에 머물게 뻔했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연기하기로 했다. 몇 달 더 연기해서 나중에 쓰기로 했다. 나중에 쓰면 안 쓴다는 말과 같으니 특정 시점과 기회를 고정했다. 포기하는 건 그만두는 게 아니다. 포기하기 전까지 진행한 일이 내 몸에 온전히 남음과 같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음과 같다. 그러니 다음을 기약해서 좀 더 괜찮은 꼴을 갖추길 바란다. 그 사이에 얼렁뚱땅 지내지만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