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아내다, 감상

지난 달,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를 봤다. 그것도 두 번.. 한 번 보고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한 번 더 봤다. 그러고 나서 책을 샀다. 연극 대본과 샬로테의 자서전. 이 연극으로 나중에 글을 쓰고 싶다는 뜻인데…
기본 정보는 http://goo.gl/UVGDE
기본적으로 내용은 재밌다. 두 시간 동안 진행하는 연극인데 언제 두 시간이 지나가나 싶게 금방 지나갈 정도다. 기본 줄거리는 작가 더그가 게이-트랜스베스타잇인 샬로테를 인터뷰하는 내용이고. 게이 남성과 관련한 연극이 일정 수요를 지닌다는 점에서 상연할 수 있었으리라. 이런 시장에서 이 작품이 올랐다는 건 기쁜 일이긴 하다. 무엇보다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좋은데… 좋은 점이나 의미 분석은 대본을 직접 읽고, 샬로테의 자서전을 읽은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과 고민인 점 먼저 쓴다면…
우선 번역 문제. 연극 중간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의 책이 나오는데, 독일어 제목은 <Die Transvetite>인데.. 이걸 독일어로 한 번 읽은 다음 한국어로 “동성애에 대하여”라고 말한다. 맙소사. 처음엔 이것이 더그 라이트가 쓴 대본에도 이렇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판단을 보류했는데… 정확하게 찾은 건 아니고 대본을 대충 넘겨서 해당 부분으로 짐작하는 구절엔 별도의 영어 번역이 없다. 독일어 그대로 적혀 있다. 이 말은 “동성애에 대하여”가 한국어 연극에서 추가되었다는 뜻이다. 몇 가지 가능성은 있다. 연극 기획단에서 트랜스베스타잇의 뜻을 정확하게 몰랐다거나 한국 독자를 ‘배려’했거나. 즉, 트랜스베스타잇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몰라서 동성애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한 가지. 이건 배우의 연기를 통한 혐의기도 하다. 하지만 트랜스베스타잇의 의미를 알았음에도 관객에게 그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이를 동성애로 번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거나 트랜스베스타잇이 익숙한, 널리 통용되는 용어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나는 이 번역이 히르쉬펠트의 주장과 업적을 배반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히르쉬펠트는 동성애와 트랜스베스타잇/트랜스젠더를 구분해서 설명하려고 한 선구적 이론가다. 그러니 그나마 협상한다면 트랜스젠더여야 한다. 이것도 적절한 번역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트랜스베스타잇을 동성애로 번역하고 유통하는 방식은 작품을 해석하는데 많은 방해를 야기한다(뒤에서 다시).
연기와 관련해서 중요한 불만 중 하나는 소위 여성역을 연기할 때다. 1인 35역 정도라서 혼자 각 배역에 다른 캐릭터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소위 남성역과 여성역에 부여하는 성질에 편차가 크다. 여성역엔 다소 우스꽝스럽거나 단순한 성질만 부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모 역할을 들 수 있는데 이모는 어느 나이부터 남장 혹은 남성스런 복장만 입은 인물이며, 샬로테가 처음 여장한 바로 그날 목격했고 히르쉬펠트의 책을 알려준 인물이기도 하다. 이 말은 이모를 연기할 때 부치 젠더나 ftm 젠더를 연기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배우(지현준 분)는 그저 왈가닥하지만 상당히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연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캐릭터를 잘못 잡은 것이 아니라 소위 여성 젠더 범주라고 불리는 인물의 다종다양한 성격을 연기할 줄 모르거나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이모와 관련해선 연기만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문제도 동시에 등장한다. 이모는 히르쉬펠트가 쓴 “동성애”에 관한 책이 아니라 “트랜스베스타잇”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었고 이 책을 “새로운 성경”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이모가 자신을 부치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했을 수도 있지만 ftm 트랜스남성으로 정체화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꼭 이 두 가지 범주가 아니어도 이모는 지배 규범적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트랜스베스타잇을 동성애로 번역하는 순간, 이모에게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범주/캐릭터는 다소 평범해진다. 더구나 이모 연기는, 연극 내에서 중요한 비중임에도, 다른 여성 젠더 인물과 비슷하여 상당히 무난했달까…
연기의 문제는 샬로테와 더그를 혼동시키기도 한다. 극을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다면(딱 한 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암전 상태가 나온다) 1부에선 샬로테와 더그가 상당히 구분된다. 샬로테는 허리를 구부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며, 더그는 조금 여성스럽고 조금 밝은 목소리랄까.. 그런데 이런 구분이 2부로 넘어가면 무너진다. 2부에선 주로 젊은 시절 샬로테가 등장하는데, 젊은 시절 샬로테를 연기하며 허리를 구부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보니 1부에서 더그에게 부여한 특징이 2부에선 샬로테에게 부여된다. 그래서 연기만 떼어놓으면 1부의 더그와 2부의 젊은 시절 샬로테가 구분이 안 가는 찰나가 발생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2부의 더그는 좀 더 남성스럽게 연기한다. 좋게 해석하면 이건 고의일 수 있다. 더그는 샬로테란 인물이 존재함을 처음 듣고 흥분하며 샬로테를 찾았고, 샬로테에게서 자신의 잃어버린 역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 고백, 샬로테와 더그의 연속성과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1부의 더그와 2부의 젊은 시절 샬로테를 비슷하게 연기했을 수 있다. 하지만 35가지 캐릭터를 구분하며 연기해야 하다보니 발생한 한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연기에 아쉬움이 있다보니 내가 본 지현준 씨의 연기말고 남명렬 씨의 연기는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궁금했다. 남명렬 씨는 어떻게 연기했을까? 남명렬 씨와 지현준 씨가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올랐다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전반기엔 남명렬 씨, 후반기엔 지현준 씨가 무대에 섰다.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좁은 무대를 잘 활용한 점, 흥미로운 내용의 연극을 무대에 올린 점 등은 분명 좋았다. 아울러 꼭 이것만 좋았던 건 아니고… 히히히.

채식, 도살, 폭력성, 페미니즘, 계급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동물을 죽이는 행동이 어떤 폭력성의 발현이라는 논리는 정당한 것일까? 이것은 타당한 논리일까? 육식을 하면 사람이 더 폭력적이고 채식을 하면 사람이 선하다는 식의 언설이 있다.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런 언설은 꽤나 만연하다. 만약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폭력적 행동이라면 가사노동은 폭력적 실천이란 이상한 논리가 가능해진다. 음식을 만드는 여성 젠더 역할은 폭력적 행위라는 논리도 가능하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가능하다면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은 충돌하는 정치학인가? 하지만 적잖은 페미니스트가 생명 윤리를 이유로 채식을 고민하고 채식주의를 얘기한다.
여성이 생선이나 어류를 구매하고 죽이는 일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제된 성역할이지 여성의 폭력성을 표현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하는 행동이란 뜻이다. 이런 해석은 정말 여러 가지로 문제다. 여성 중 생선이나 어패류를 좋아해서 직접 요리하는 일은 없다는 걸까? 대행업무라고 해서 책임감이 없다고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남성성과 폭력성을, 육식 행위와 폭력성을, 생명 살해 행위과 폭력성을 단순하게 등치시켜선 안 되는 찰나다. ‘모순’이나 ‘아이러니’는 등치해선 안 되고 전제가 잘못 된 것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발생한다. 그리고 육식 행위는 폭력적이고 채식을 여성성/여성적 사유로 연결하는 행위는 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고 강화할 뿐이다.
도살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살 행위는 특정 계급의 역할이다. 조선시대엔 정말 천한 일이고 지금도 도살행위가 우대받거나 사회적으로 권장받는 직업은 아니다. 도살을,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폭력성과 붙인다면, 특정 계급에 대한 혐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은 폭력적이다라는 식의 인식과 곧장 결합되면서 계급 혐오/계급 편견를 재생산한다. 즉 채식 행위에 어떤 윤리, 비폭력성을 붙이거나 육식 행위에 비윤리적이거나 폭력적 속성을 붙이는 행위는 결국 특정 계급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논리에 가깝다. 거대 목축업을 하는 건 거대 자본의 일이긴 하지만, 직접적 도살이 상층 계급의 일은 아니란 점에서 도살, 생명 살해 행위를 폭력적 실천으로 재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다른 말로 채식을 윤리, 폭력성 등과 연결해서 논하는 행위는 여성 혐오, 계급 혐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그러니 누가, 어떤 인식론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채식에 윤리와 비폭력성을 붙이려 드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런 논리가 어떤 지배 질서, 지배 규범을 재생산하려고 하는지 탐문해야 한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

육식, 채식, 그리고 생명에서 음식으로

작년 추석이었나… 부산에 간 김에 친척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메뉴는 친척집 근처 낚지볶음이었나 낚지가 들어간 탕이었나…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낚지가 들어가는 음식이었다. 우선 양념장과 채소가 들어간 냄비가 나왔고 불을 올려 가열했다. 양념이 끓을 즈음 점원은 다른 통에 담은 낚지를 가져왔다.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낚지를 끓는 냄비에 담았다. 낚지는 뜨거워서 버둥거렸고 점원은 익숙한 듯 집게로 꾹 누르며 낚지가 죽길 기다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끔찍하단 듯, 차마 볼 수 없는 현장이라는 듯 눈을 가렸다. 낚지가 죽고 냄비 뚜껑을 덮자 사람들은 얘기를 계속했다. 낚지가 다 익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낚지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잘랐고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와 함께.
낚지는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생명에서 음식으로 변해갔다. 그 과정은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에서 ‘맛있는 먹거리’로 변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낚지의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잘 익은 낚지를 맛있게 먹었다. 이 장면을 지금 다시 떠올리다가 뒤늦게 깨달았는데.. 내가 게를 못 먹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땐 채식을 할 때가 아니었다. 채식을 고민할 때도 아니었다.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은 그 언젠가, 집에 꽤 많은 꽃게가 생겼다. 엄마는 이 꽃게를 삶기 위해 커다란 솥에 물을 올렸고 적당히 간을 했고 끓는 물에 꽃게를 넣었다. 아닌가? 적당히 간을 한 물과 꽃게를 함께 냄비에 넣고 불을 올렸던 것도 같다. 그리고 냄비에서 수증기가 올라올 때 익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장 위에 있던 꽃게 몇이 탈출을 시도했다. 살아 있는 꽃게가 가득한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탈출하려는 꽃게의 모습도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날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땐, 낚시에 따라가선 갓잡은 생선을 바로 회 뜨는 모습을 봤고, 그 회를 맛있게 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꽃게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삶은 꽃게의 살을 발라 먹는 걸 좋아한 나는, 그날 이후 먹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글이 아니다.
마트나 재래시장 등에 장보러 갈 때면 종종 각종 채소나 과일이 한가득 쌓인 모습을 본다. 조금은 시든 채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냄비에서 죽어가던 낚지, 큰 솥에 담긴 꽃게를 떠올린다. 마트에 진열된 채소는 이미 죽은 걸까,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걸까?
낚지가 뜨거운 물에서 살기 위해 혹은 고통스러워하며 꿈틀거리는 순간과 채소가 조금씩 시들어가는 순간. 이 두 순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겐 차이가 없다. 둘 다 죽어가는 생명의 모습이다. 생명에 위계가 없다면 채식이 유난히 윤리적일 이유가 없다. 채식을 한다고 우월할 이유도 없다. 채식의 윤리성을 입증하기 위해 생명의 위계를 만드는 건 웃긴 짓이다. 그래서 채식을 논하는 많은 논리가 공허하다 싶을 때가 많다. 공감이 안 될 때는 더 많고.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저 윤리나 위계로 무언가를 설명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끔찍함의 전시가 아니라 어떤 친밀감, 덜 끔찍함으로 채식을 설명할 수는 없는 걸까 싶기도 하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