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외모는 나의 인식 수준을 알려줄 뿐이다

“찰나의 시간에 마주치는 타인의 외모를 통해 ‘우리’는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라는 문장.
통상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의 젠더, 나이대, 계급, 인종, 출신국가, 직업군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 중 어떤 것(젠더, 인종, 나이?)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당연하다고 여긴다. 또 어떤 것은 타고남은 아니지만 특정 관습을 몸에 익히면서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어떤 추리소설엔 외모 만으로 용의자의 특징을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정보가 상대이 인식하는 상황과 일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외모를 통해 그 사람은 남자라고 판단했다고 치자. 사실 ‘우리’는 타인을 남자, 여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분과 인식의 영역이 아니다. 구분과 인식의 영역에 포섭되는 존재는 여성 규범과 남성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특질이 있을 때다. (비슷하게 ‘우리’는 어떤 타인을 보며 ‘저 사람은 이성애자야’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비이성애자만 인식하고 뭉뚱거리는 형식으로 분류한다.)혹은 정말 매력적이거나. 하지만 남자로 파악은 그 사람이 자신을 남성/남자로 인지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상대는 자신을 남자로 인식할 수도 있고, 남자로 인식하진 않지만 여자로도 인식하지 않을 수 있고, 여자로 인식할 수도 있고, 이런 식의 분류 기준이 자신에게 적절/적합하지 않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그의 외모는 대개 남자로 통하는 형식이라고 할 때에도 그 외모는 호르몬을 장기간 투여한 남자 형식일 수도 있고, 호르몬일 이제 막 투여해서 별다른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 경우일 수도 있다.
타인의 외모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상대방과 관련한 정보가 아니다. 상대방이 인식하는 형식의 정보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호르몬을 투여한지 일주일된 mtf 트랜스젠더를 낯선 사람으로 마주친다고 할 때 ‘이 사람은 호르몬을 투여한지 일주일 되었네..’라고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데 없다.
타인의 외모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정보는 타인에 관한 정보가 아니다. 내가 타인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식, 즉 나의 수준에 관한 정보만 알려줄 뿐이다. 수준이란 말이 좀 부정적이라면 내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내가 세계를 해석하도록 배운 방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뿐이다.
이것은 또한 공부를 하는 태도에 관한 얘기기도 하다.
+뭔가 갑자기 ‘삘’을 받아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 뻔한 얘기다. 하지만 이 글을 밑절미 삼아 확장해서 나중에 어디 확장할 수 있다.

김조광수-김승환 동성결혼 행사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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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와 클리셰는 다른데 클리셰를 나열하면서 로맨스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로맨스도 없고 로망도 없고 진부함과 관습만 있다. 진부함, 관습, 그리하여 규범적 실천만 나열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래, 그것 역시 사랑일 수 있다. 아니, 그것 역시 사랑이다. 사랑이란 규범의 반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사랑이 사회적 변화를 위한 행동이라면 곤란하다. 가장 규범적인 행동만 반복하면서 그 행동이 사회적 변화를 위한 것이라면, 무슨 변화를 위한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벨 훅스는 자신의 책에서 여성운동이 남성과 동등해지는 운동이라고 얘기할 경우, 도대체 어떤 남성과 동등해지려는 것인가를 질문했다. 중산층-비장애-백인-여성은 하층-비장애-흑인-남성과 동등해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비슷한 계층 혹은 자신보다 좀 더 나은 남성과 동등하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벨 훅스는 중하층 계급의 여성, 비백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해지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님을 처음부터 알았다고 지적한다. 노동계급-흑인-남성은 상당한 피억업자기도 하다. 남성과 동등해진다고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동등해지고 누군가와 같은 권리를 갖는다고 해서 상황이 개선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이럴 때 동성결혼이 동성애자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떤 계급의 이성애결혼 양식과 동등해지려는 것일까?
운동을 통해 평등한 상황을 얘기할 때, 역할 모델은 누구인가? 즉 누구와의 평등/동등을 얘기하는 걸까? 만약 이성애자가 하니까 비이성애자도 누리겠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기존 질서의 문제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억압 제도를 강화하는 행동일 뿐이다. 나는 LGBT 운동이건 퀴어 운동이건 뭐건, 이런 식의 동화주의를 지향하는 방식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행동이 동화주의가 아님에도 동화주의로 독해되는 경우와 대놓고 동화주의를 지향함은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의 ‘당연한’ 결혼 이슈가 정말로 이성애규범적/동성애규범적 행동의 전형이라고 읽고 있다. 김조-김 커플의 행사가 둘만의 ‘사적’ 행사가 아니라 명백한 공적 사건이라면, 꼭 동성결혼이라는 형식이어야 할까? 이번 행사가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위한 쇼라면, 동성결혼이 최선인지 정말 묻고 싶다. 나는 동성결혼 형식은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성결혼 형식이라면, 꼭 지금과 같은 내용이어야 하는지도 묻고 싶다. 이성결혼만을 규범화하는 현재 사회 제도를 문제 삼겠다고 할 때, 동성결혼을 주장해야 하는지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 삼을지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을 구성하고 효과를 야기한다.
김조-김 결혼쇼에서 가장 불쾌한 지점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동성’결혼 혹은 비이성애결혼을 무시하는데 있다. 기혼이반, 결혼하는 바이, 결혼하는 트랜스젠더,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 동성 관계의 공적 결혼, 신문기사에 남아 있는 비트랜스-비트랜스 동성 관계의 결혼은 현존하는 결혼이 이성애-비트랜스젠더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행사는 역사와 복잡한 양상을 모두 무시하고 있다. 이 찰나, 김조-김 커플 혹은 그 지지 집단이 얘기하는 동성결혼에 포섭되는 존재는 누군지 묻고 싶다. 이 행사가 상상하는 ‘동성결혼’에 속하는 이들이 누군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조-김 커플이 얘기하는 동성결혼의 구별짓기엔 이성애-동성애(혹은 게이남성)만 있다는 인상이다. 기혼이반, 트랜스-비트랜스 동성결혼 등은 아예 구별짓기의 틀 바깥으로 추방된다. 현재 이슈 구도에서 기혼이반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못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혼을 얘기하고 싶다면 좀 더 다양한 맥락에서 다르게 행사를 진행할 수 없었을까? 난 이 지점이 가장 불쾌하다.
아우, 심란하다.

폭력에 집중하는 단체

지난 주에 모 단체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참 오랜 만에 하는 강의라 떨렸는데 어떻게 무사히 끝났습니다. 강의 내용은 젠더폭력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뭐, 대충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리는 재밌었고 제 얘기가 끝나고 이어진 토론도 흥미로웠고요.
그 단체는 한국에서 폭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몇 안 되는 단체인데요.. 끝나고 모 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한국에서 폭력을 전문으로 다루는 단체와 활동가를 향한 부정적 이미지가 상당하다는 것과 함께, LGBT/퀴어 운동에서도 폭력과 관련한 단체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 LGBT/퀴어 운동 및 단체 중에서 폭력에 초점을 맞춘 곳은 없는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권을 얘기하고 권리를 얘기합니다. 어떤 곳은 차별과 억압 상황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동으로 폭력과 관련한 이슈에 집중할 법도 한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이것은 저의 인상일 뿐이라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제 인상이 잘못되었다면 언제든 얘기해주셔요).
이를 테면, 커뮤니티 내부의 성폭력 이슈와 커뮤니티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성폭력 이슈가 상당히 중요할 텐데도 이 이슈에 완전히 집중해서 활동하는 곳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성폭력만이 아니라 LGBT/퀴어를 향한 다양한 혐오 폭력이 꽤나 빈번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없다는 건 때때로 신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현재 상황은 한 단체에서 거의 모든 이슈를 담당하고 있죠. 문화사업도 하고 상담사업도 하고 언론모니터링도 하고 연구사업도 하고 때때로 정치로비도 하고… 사실 각 이슈는 별개의 단체에서 집중해서 다뤄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 하고 있죠. 심지어 상당히 멋지게 하고 있습니다. LGBT 관련해서 몇 개의 단체가 있고 각 단체마다 운동을 하는 방식이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이슈를 다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폭력에 집중하는 단체만 따로 생겨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폭력에 집중하는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협의하여 공동의 단체를 설립하는 과정을 진행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기존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혹은 처음부터 다른 기획 속에서 다르게 작업할 수도 있고요. 어떤 식이건 폭력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있으면 좋겠는데요… 네, 압니다. 이렇게 바람을 품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요. 그럼에도 폭력 이슈에 집중하는 단체가 있으면 좋겠어요. 정말 필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