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혐오가 아니라 여성혐오다

01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이 결국 등록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뭔가 몸 속에 있던 끈이 하나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02
우리는 안다. 그냥 누군가가 싫다고, 특정 집단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스스로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인지 (정확하게든 어렴풋하게든) 알 때 자신의 바로 그 수치스러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는 것을. 그냥 싫으면 싫다고, 혐오한다고, 징그럽고 끔찍하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이 뭔가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착각할 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논리라는 것이 지금까지 자신의 혹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치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묻고 싶다. 도대체 왜 그런 쓸데 없는 고집으로 타인을 죽이려고 하는가를. 그런 논리를 펼치고 누군가를 추방하면 즐겁고 행복한지 묻고 싶다.
03
이번 사건은 공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이 사건을 가장 간결하게 정리해보자면, 원래 비트랜스여성만 입학할 수 있는 공간에 트랜스여성이 입학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을 문제로 만듦으로써 이 학교에 입학하고 이 학교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성격을 다시 규정한 사태다. 여대니까 당연히 여성만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은 심각한 현실 오도다. 여대에는 이미 많은 트랜스젠더퀴어가 다니고 있다. ftm/트랜스남성이 있고,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mtf/트랜스여성이 다니고 있다. 그러니까 여대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젠더 범주의 존재들이 학교를 다니고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이미 여대를 다니고 있는 많은 트랜스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다. 정당하게 합격한 트랜스여성을 추방하는 행동을 통해 현재 여자대학교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구성원의 젠더 범주를 멸균하듯 규정해버렸다. 끔찍한 일이다.
04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래디컬)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사이의 대립, 혹은 1020 세대 페미니스트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잘못된 방식일 뿐만 아니라 여대와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재생산하는 데 적극 협조할 뿐만 아니라 방조한다. 일부 여대의 지극히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여론을 모으고 결국 트랜스젠더퀴어의 입학을 막았다고 해서 그 랟펨들을 악마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사건을 사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대립구도를 만들 뿐이다.
여대,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퀴어를 대립시키는 방식의 언설 구조는 결국 이 사회가 어떤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누락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사태가 랟펨과 트랜스 사이의 문제일 뿐 나머지는 아무런 상관없거나 단순 지지자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발급한다. 다른 말로, 이 사건을 기회 삼아 (트랜스를 단 한 번도 지지한 적 없음에도) 페미니즘은 혐오를 만드는 집단이라며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를 논평자, 재판관으로 만든다. 마치 ‘나는 중립적으로 이 사건을 평가할 수 있어’라는 바로 그 태도가 지금 이 사태를 만들었다.
이 사건은 이원젠더체제를 만들고 유지하고 이 체제를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공모해서 발생했고 이를 통해 트랜스를 추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극소수의 랟펨을 비난하고 악마화하는 것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존의 가부장제 질서, 이원젠더체제, 이성애규범성, 비트랜스규범성,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는 문화 등은 안전하게 유지될 뿐이다.
05
랟펨에서 나온 트랜스혐오 논리 중 가장 곤혹스러운 표현은 생물학적 여성이다. 트랜스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어서 여성이 아니고(남성이고) 여대에 입학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생물학적 여성은 (최소한)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등장하면서 가장 많이 문제 삼은 개념이다. 남자는 원래 이렇고 여자는 원래 저래, 남자는 원래 음식을 만들 줄 모르고 여자는 원래 가사 노동을 잘해, 남자는 원래 아이를 못 봐, 여성이라면 당연히 모성이 있는 것 아니냐와 같은 언설이 모두 생물학적 여성/남성을 통해 구성되는 논리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말은, 생물학과는 무관한 말인데, 마치 여성의 운명, 행태, 성격은 염색체에 규정되어 있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XX염색체에 설거지 잘 하는 능력이라도 적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대학에서 생물학을 배우며 염색체에 이런 정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없다). 그리하여 여성이 할 수 있는 일,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연화한다. 동시에 이 말은 성폭력 또한 자연화하는 대표적 언설인데, 남자는 원래 성욕이 많고 못 참는다는 발언이 바로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언설은 페미니즘에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개념이며, 페미니즘에서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언설은 그것이 비판받을 때만 이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를 추방하기 위해, 트랜스를 적대하기 위해 이 논리를 펼치는 모습은 매우 당혹스럽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사건이 트랜스 혐오 사건이 아니라 일부 페미니스트(랟펨)에 의한 여성 혐오 사건으로 설명하고 싶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논리 자체가 여성 혐오다.
06
여성 의제를 우선 다루겠다는데 왜 비난하냐는 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우선할 수 있는 여성 의제, 보편적 여성이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이것은 모든 여성을 단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가진 집단으로 가정하고 결국 가부장제가 ‘여성’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바로 그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무엇보다 여성 우선이라는 말은 문재인이 말한 “나중에”와 같은 논리이자 태도다. 트랜스 의제, 퀴어 의제는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로 추방하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07
트랜스를 둘러싸고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중, 불안이 있다. 여성의 불안은 이해한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예의상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로 트랜스로 인한 여성의 불안을 이해한다고, 있을 수 있는 불안이라고 말한다. 오래 활동한, 랟펨에 분노하고 트랜스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성 공간에 트랜스가 들어오면 불안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 역시, 특강 같은 곳에서 불안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불안을 왜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트랜스로 인해 비트랜스여성이 불안을 겪을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는 태도는 마치 동성애자로 인해 이성애자가 불안하니 그 불안을 이해해달라는 말과 같다(목욕탕에 동성애자가 들어오면 이성애자가 불안하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으니 동성애자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는가?). 예멘 난민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불안해지니 그 불안도 이해해야 하고, 장애인으로 인한 비장애인의 불안과 불편도 이해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그 누구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트랜스로 인한 불안에는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트랜스를 혐오하는 주장이 어떤 점에서는 정당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지금 사태를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공모한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제 나는, 저런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 한다.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한다고 말해주기보다 불안과 안전의 권력, 폭력과 배제의 정치를 말해야 한다.
08
중립은 혐오와 폭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다.

언젠가 당신의 음반을 돌려줄 것이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퀴어 혐오를 적극 비판하고 관련 활동에 적극이었다. 그리고 워마드가 젊은 세대 여성의 투쟁이고 고통을 말하는 행위이기에 충분히 함께 할 가치가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 태도는 그 사람이 정확하게 그 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나는 그 사람이 일베에도 동일한 동정과 연민을 느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일베에 분노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일베도 혹은 한남도 언제나 억울함을 토로하고 어떤 투쟁과 고통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권력자 혹은 혐오 가해자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당한 공격이라고 믿는다. 그럼 왜 그 말은 듣지 않는가? 나에게 워마드의 어떤 행위는 일베와 같다. 워마드 계열이라고 불리는 집단, 혹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집단(나는 그 자처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의 동의가 무슨 상관이겠는가)은 끊임없이 트랜스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조롱한다. 그 발언을 무시하고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당신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그 발언을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나는, 그들의 어떤 활동은 지지함에도 그들과 결코 함께 할 수 없고 그들의 어떤 활동에도 동참할 수 없는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무엇인가? 예전에 노동 운동 하는 사람, 막시스트나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노동해방되면, 뭐만 해결되면 ‘여성 문제’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식으로 최우선의,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의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워마드는 누구와 닮았는가? 그런 워마드 계열이나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참칭하는 이들의 태도에 동참할 수 있거나 연민을 느끼는 당신의 위치는 어디인가? 워마드라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을 가치가 있다며 함께 할 때, 그들이 그토록 조롱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는 집단의 목소리는 들을 여유가 없었는지 묻고 싶다. 나는 당신이 낸 음반을 당신에게 반납하고 싶지만, 나는 당신에게 지금 시점에서 연락을 할 힘이 없다. 슬프고 분노가 치민다.

페미니즘, 젠더 정치 그리고 책임

한국여성학회 여름캠프에서 진행한 행사에서 발표한 원고입니다. 라운드테이블 서두 발언이라 짧고 구성이 엉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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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국여성학회 여름캠프 – 라운드테이블 “강남역 이후, 저항의 확장” 2017.08.16. @여성플라자
페미니즘, 젠더 정치 그리고 책임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젠더는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정치 및 이론에 있어 가장 첨예한 논쟁이 발생하는 장이다. 그렇기에 젠더-페미니즘-트랜스젠더퀴어학(transgenderqueer studies)라는 키워드는 다양한 질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젠더 연구와 여성 연구는 동일한가? 젠더가 곧 여성은 아니라고 해도 젠더 관점은 여성의 관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젠더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분석틀인가? 이때 여성과 남성은 안정적으로 작동/존재하는 범주인가? 혹은 여성과 남성을 안정적 범주로 가정할 때에야 젠더 관점을 여성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성과 남성이 불안정할 때 젠더 관점은 어떤 관점이 되는가? 젠더는 페미니즘의 독단적 성과로 등장한 개념인가? 그래서 젠더는 (무수히 많은 수식어를 붙이는)페미니즘에서만 그 개념을 만들고 그 의미와 내용을 발저시켰는가? 그렇다면 일부 섹슈얼리티/퀴어 연구자가 말하듯, 페미니즘은 젠더를 연구하고 퀴어 연구는 섹슈얼리티를 연구한다는 공식은 어느 정도는 타당한 구분인가? 섹스와 젠더를 분리하고 젠더를 저항 정치의 가능성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어떤 경험으로 섹스와 젠더를 분리했기에 가능했는가? 페미니즘의 젠더는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와 전혀 다른 개념인가? 트랜스젠더퀴어 정치와 연구에서 논하는 젠더는 트랜스젠더를 젠더라고 부르며 은어처럼 사용하는 바로 그때의 젠더인가? 그렇기에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는 트랜스젠더퀴어라는 개개인 혹은 집단의 특징만 대상으로 연구하는 작업인가?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에서 논하는 젠더는 페미니즘 혹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인간 범주를 당연시하는 페미니즘에서의 젠더와 무관한가? 즉 여성과 남성이라는 망상적 범주 혹은 규범적 범주는 트랜스젠더퀴어와 무관한 젠더 범주인가? 종종 여성은 비남성 혹은 남성 범주에서 추방된 존재를 모두 포괄하는 범주, 타자를 대표하는 기호로 말해지곤 하는데, 트랜스젠더퀴어는 비남성 범주 혹은 여성 범주에 속하는 존재로 인식되(기는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는 여성이라는 기표에 포함되는가? 여성이란 명명은 젠더 분석에서 타자를 대표할 수 있는가? 여성이 타자를 대표하는 기호가 될 때 이때 여성은 단일한 속성으로 구성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가? 남성과 비남성-여성이라는 구분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비롯한 다양한 비규범적 젠더 행위자를 비체나 구성적 외부로 삼으며 구성된/구축된 범주는 아닌가? … 아마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을 일련의 이런 질문은 젠더를 둘러싼 논쟁이 결코 단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층위에서 인식을 구성해야 함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현재 젠더 관련 논의가 구성되는 방식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과 더 많이 생산될 질문은 젠더 개념이 등장한 역사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젠더를 매개하는 몇 가지 논란에 개입할 다층적 층위를 열어준다.
2015년 한국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현상이 발생했고 지금도 그 현상은 어느 정도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현상은 여성 혐오를 밑절미 삼고 있음에도, 경찰이나 미디어 등에서 여성 혐오와 무관한 것으로 언급하거나 ‘분석’하는 많은 사건을 여성 혐오 사건을 재명명했다. 또한 여성 혐오에 따른 많은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행진, 말하기대회 등을 진행하며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를 가시화했다. 아울러 한국에서 여성은, 단순히 피해여성 몇 명이 아니라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여성이 우연히 살아 남았다는 자각을 가능하게 했고 여성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는 인식을 재/확인했다. 안전이별은 지금 한국 남성과 연애를 하는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고, 종종 안전이별을 기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는 현상은 페미니즘을 재인식하고 다시 말하도록 하는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현상은 흥미롭게도 LGBT/퀴어를 향한 혐오와 함께 등장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 하나는 2014년을 기점으로 보수기독교 혹은 반퀴어 집단의 LGBT/퀴어 혐오가 과거와 달리 훨씬 더 가시적 방식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반퀴어 집단은 2014년 퀴어문화축제의 퍼레이드 행사를 방해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2015년엔 각종 미디어를 활용해서 퀴어를 비난하고 혐오하며 이 사회에서 추방해야 할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현상을 통해 등장한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그렇게 분류되는) 집단에서 LGBT/퀴어 혐오를 페미니즘 운동의 한 방식, 여성 운동의 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 중후반부터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그렇게 분류되는) 집단은 게이 남성 문화에서의 여성 혐오를 둘러싸고 논쟁을 진행했고, 워마드를 비롯한 몇몇 게시판에선 게이 남성을 혐오하는 글이 넘쳐나고 가장 인기 있는 글이 되었다(정현희 2016; 터울 2016).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과 게이 정치의 분화 혹은 (페미니스트)여성과 (게이)남성의 갈등이 (또 다시)시작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페미니즘 정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페미니즘의 의미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그렇게 분류되는) 집단은 게이 남성을 ‘패는’ 것에 이어 크로스드레서를 비롯하여 트랜스젠더퀴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2016년 트랜스젠더퀴어가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커뮤니티 이용자가 올린 본인의 사진을, 워마드 이용자가 무단으로 캡쳐해서 워마드나 다른 곳에 공개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트랜스젠더퀴어 활동가가 평가했듯, 2017년은 젠더퀴어를 둘러싼 논쟁의 해라고 할 수 있고 관련 논란 혹은 논의가 폭증하고 있다.
2017년 1월 하순, 워마드의 게시판에 젠신병자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트랜스젠더(혹은 트랜스젠더퀴어)를 은어처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 ‘젠더’와 정신병자를 합친 표현이었다. 이것은 워마드 이용자 중 일부의 인식이 아닌데, 워마드는 한동안 사이트 가입 요건으로 크로스드레서는 정신병자라는 요지의 문구를 쓰도록 했다. 즉 트랜스젠더퀴어를 (가장 부정적 용어 사용 방식으로의)정신병자로 부르는 태도는 워마드 자체의 정책이자 인식이며, 워마드 사용자 대부분이 공유하는 입장이다. 동시에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에서 사용하는 젠더는 은어로만 의미가 있음을 주장하는 행위기도 하다. 그리하여 젠신병자라는 용어 사용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는 페미니즘에서의 젠더와는 별개며,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 경험은 여성의 젠더 경험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이해를 표출한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퀴어는 페미니즘 운동이나 혹은 ‘여성’ 운동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둘의 공통점은 부재하고 트랜스젠더퀴어는 ‘여성’ 이슈에 무관하고 ‘여성’은 애써 트랜스젠더퀴어 이슈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젠신병자라는 용어는 바로 이 측면을 표현한다.
2017년 2월 하순, 2017년 제9회 성소수자 인권포럼은 본행사 첫째 날 “Feminist in the Mirror, 혐오를 허하라? :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라는 제목으로 세션을 열었다. 성소수자 인권포럼(구 LGBTI 인권포럼)은 2016년에 이미 한 차례 워마드의 게이 남성 혐오와 게이 남성 커뮤니티에서의 여성 혐오를 주제로 다룬 바 있다. 2017년에는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그렇게 분류되는) 집단의 트랜스 혐오를 주요 논의 사항으로 다뤘으며, 퀴어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논했다. 세션을 진행하며 패널의 발표가 끝나고 전체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상적 발언이 등장했다. 세션 참석자 중 한 명은 페미니즘이 가장 억압 받는 집단인 여성을 챙기고 여성 이슈를 다루기에도 버거운데, 왜 퀴어니 장애니 이주니 하는 다른 이슈까지 책임지고 챙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이 왜 LGBT/퀴어, 장애, 이주와 같은 정치적 의제를 ‘책임’지거나 ‘챙겨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요지의 인식은 그 참석자만의 특별한 인식이 아니다. 이것은 최소한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갈라지는 순간부터 지속된 논쟁이며, 앞서 말햇듯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등장한 의제며, 페미니즘 정치학이 전개되어온 긴 역사의 단면 중 하나기도 하다. 성전쟁이라는 역사로 쉽게 예시할 수 있듯,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LGBT/퀴어와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정치학과 이론을 전개해왔지만 동시에 페미니즘과 LGBT/퀴어는 마치 적대적 관계인 것처럼 회고되거나 인식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트랜스 정치는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고(스트라이커 2016), 섹스와 젠더 개념의 형성에 있어 트랜스젠더퀴어를 빼고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루인 2010). 트랜스는 언제나 여성의 한계, 여성 범주의 경계를 논쟁적 위치로 만들었고 이것이 현재 페미니즘 정치와 이론 형성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그렇게 분류되는) 집단이 여성 문제만 챙겨야 한다고, 오직 여성만 챙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LGBT/퀴어, 장애, 이주 등의 정치학을 페미니즘이 함께 챙기도록 주변에서 말하는 것은 페미니즘에 가하는 부당한 부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페미니즘을 정치학이나 역사를 지닌 인식론이 아니라 소유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정체성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2017년 7월 15일 서울에서 퀴어문화축제 부스 행사 및 퍼레이드 행사가 진행되던 날, SNS에서는 젠퀴벌레라는 표현으로 떠들썩했다. 젠더퀴어(젠퀴)와 (바퀴)벌레를 조합한 이 표현은, 그 며칠 전부터 몇 명이 사용하기는 했다. 하지만 젠더퀴어가 퀴어문화축제를 휘젓고 다니고 페미니즘 관련 행사나 부스는 부재한다는 식의,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의 비난을 하며 젠퀴벌레란 표현이 등장하면서 논란이 폭증했다. 젠퀴벌레라는 표현은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그렇게 분류되는) 집단에서 사용했는데, 이것은 젠더퀴어가 비트랜스여성이 겪는 억압을 가리거나 말할 수 없게 만든다는 인식 혹은 그러한 불안의 표출이기도 했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현상이 등장하면서, 많은 페미니즘 행사 혹은 페미니즘 행사라고 부를 수 있는 행사가 등장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만 참가할 수 있는 행사도 기획되었다. 이때마다 많은 트랜스젠더퀴어 및 그 지지자가 그 행사에서 지칭하는 ‘여성’이 누구인지 질문했고 여성 범주와 관련한 강력한 문제제기를 했으며, 때론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는 행사라며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행사는 참가자 자격의 제한을 바꿨고, 다른 어떤 행사는 개최를 하기도 전에 취소되었다.
젠퀴벌레라는 표현은, 젠더퀴어가 끊임없이 ‘여성’(즉, 비트랜스여성)의 행사를 방해하고 취소시킬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여성’의 억압을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인식을 표출한다. 이런 인식은 트랜스젠더퀴어, 그 중에서도 mtf/트랜스여성은 여성이 아니며 여성 범주에 트랜스는 포함되지 않음을 명시한다. mtf/트랜스여성이나 때로 자신을 여성으로도 인식하는 젠더퀴어가 ‘여성’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면, 이때 여성 범주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은 트랜스를 배제하는 여성은 생물학적 본질에 따른 여성이란 의미가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를 통해 여성 범주의 경계가 설정되고, 여성을 인식해온 그 동안의 한계가 명확해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2001년 하리수 씨가 데뷔했을 때 많은 (비트랜스)페미니스트는 하리수 씨가 여성이 아닌데 그 이유는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언설은 트랜스를 배제하는 발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와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여성을 상상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하게 한다. 결혼을 했건, 비혼을 선택했건 다른 어떤 삶을 선택했건 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결정적 문제로 사유했고, 이것이 여성 관련 정책이나 다른 활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젠퀴벌레라는 표현의 등장, 젠더퀴어가 여성 관련 행사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훼방놓고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이해는,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의 인식에서 여성이 구성되는 방식을 말해준다.
물론 모든 행사가 트랜스젠더퀴어를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행사는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여성의 경험이라고 말했던 것이 반드시 여성의 경험으로 말해질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월경/생리와 관련한 경험을 말하는 행사를 마련할 때 참가자의 범위를 여성으로 제한할 이유는 없다(권김현영 2017.04.28.). 월경/생리를 경험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고 참가자 범위를 기술한다면 여기엔 ftm/트랜스남성, 젠더퀴어, 인터섹스 그리고 비트랜스여성 등 다양한 범주의 젠더가 모여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동시에 그럼에도 비트랜스여성만을 배타적으로 모집하겠다면 이런 정치적 판단에 책임을 지고 충분히 설명하고 논쟁을 진행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흐름 중간에 중요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었다. 2017년 5월 28일 윤김지영은 페이스북에 “젠더 퀴어와 TERF 간의 논쟁에 대하여”라는 글을 공개했다(https://goo.gl/khG2yL). 이 글은 공개 몇 시간 뒤, 제목의 문제를 지적한 여러 댓글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목을 “페미니즘 판의 대립구도와 혐오 혐의론에 대하여”로 바뀌었다. 최초 제목은 젠더퀴어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를 명시했지만, 정작 내용에선 그 어디서도 젠더퀴어나 TERF를 직업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게이 남성 커뮤니티에서의 여성 혐오 문화를 비판하고, 퀴어를 성소수자에 제한해서 사용하지 않길 제안하면서 페미니스트 역시 퀴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수정된 제목이 그나마 글 내용에 부합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초의 제목, 다른 사람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 유지했고 윤김지영이 적당하다고 판단했을 제목에 젠더퀴어와 TERF를 언급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것은 윤김지영이 글을 쓸 당시까지 젠더퀴어와 TERF, 게이 남성 그리고 트랜스혐오와 게이혐오 등을 전혀 구분하지 못 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두를 의도적으로 혼합해서 사용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윤김지영의 글은 다양한 국면에서 논쟁을 야기했다. 일군의 퀴어페미니스트는 윤김지영의 글에서 퀴어 개념을 사용하고 적용하는 방법 등을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했다. 예를 들어 윤김지영은 퀴어의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퀴어라는 식의 독해는 훨씬 더 많은 논쟁을 야기한다. 반면, 일군의 페미니스트는 윤김지영의 글을 적극 옹호했다. 윤김지영의 글을 옹호하는 이들은 거칠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TERF라 부를 수 있는 입장을 취하거나 페미니즘이 퀴어나 장애, 이주와 같은 이슈를 함께 다루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부당한 부담이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윤김지영의 글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한다며(혹은 잘 설명한다며) 환영했다. 하지만 윤김지영의 글은 단순히 TERF를 옹호하는 입장의 글이 아니라 퀴어와 페미니즘의 연대를 모색하는 글이라고 독해하며 윤김지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다시 비판하는 퀴어/페미니스트 역시 존재했다. 그들은 윤김지영 글 비판은 잘못된 독해며, 윤김지영은 페미니스트와 게이 등의 연대를 주장하는 글이라고 주장했다. 윤김지영의 글은 상당히 다양한 층위에서 논쟁과 독해를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퀴어와 페미니즘의 관계, 트랜스와 페미니즘의 관계를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고민하는 이들에게 윤김지영의 글은 특별한 관심을 야기했다.
윤김지영의 글은 다양한 층위에서 논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책임 관련 논의다. 윤김지영은 그의 글 말미에 “페미니즘의 지평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뒤, 페미니즘은 “모든 소수자성을 빨아들이는 통일체, 수렴체”가 아니고 “모든 억압들의 해방원리이자 만물 구원 여신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을 “소수자 운동의 수렴체, 통일체로의 과도한 위상 부과”는 페미니즘이 “여성억압의 역사를 주변화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페미니즘이 “만물해방설의 만능적 이론과 실천”이 아니라는 윤김지영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페미니즘은 만능해방이론이 아니라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윤김지영은 페미니즘이 모든 억압을 다루면 정작 여성 억압을 주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여성은 젠더, 인종, 장애, 섹슈얼리티, 계급과 같은 범주와는 무관한 방식의, 여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억압을 겪는다고 가정한다.
둘째, 윤김지영은 페미니즘이 트랜스젠더리즘이나 퀴어 논의, 장애정치와는 조우할 수는 있어도 페미니즘과 그들은 서로 다른 정치를 실현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이런 주장은 옳은 내용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주장은 페미니스트 주체를 비트랜스-선주민-비장애-이성애 여성로 가정하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여성은 여성으로 단순하게 묶일 수 있는 범주인가? 여성 경험은 단일한가? 페미니즘이 (어떤 망상적 범주인)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학일 수는 있지만, 윤김지영은 이 과정에서 여성 범주 자체를 단일하고 순수한 것으로 사유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셋째, 페미니즘이 만능해방론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원론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만능해방론이 아니라는 주장을 통해 윤김지영은 정치적 무책임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효과를 낳았다. 윤김지영이 직접 정치적 무책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이 글은 많은 TERF나 순수한 여성(매우 협소한 범주의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행태를 정당화했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종종, 혹은 자주 여성 범주를 둘러싼 논쟁을 해왔고 이 과정에서 트랜스를 배제하는 정책을 공공연히 표출하는 행사나 기획이 등장하곤 했다. 물론 그런 기획은 당시에도,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비판을 듣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많은 논쟁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트랜스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여성 범주를 설정하는 이들은, 바로 그 자신의 입장이 야기하는 정치적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즉, 페미니즘의 역사는 정치적 책임의 역사다. 페미니즘에서 발생한 많은 논쟁은 자기 입장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어떻게 지고, 사유하고, 논의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윤김지영이 페미니즘은 통일체, 수렴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페미니짐이 모든 이슈를 다 다룰 수는 없다고 했을 때 이 발언은 바로 그 정치적 책임을 면제한다. 쉽게 말해, “당신이 말하는 여성 범주는 무엇이고 누구를 여성으로 규정하는가?”라고 정치적 입장을 질문하는데 여기에 “페미니즘은 통일체가 아니고 만능해방론이니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없다”고 답하는 식이다. 페미니즘이 복잡한 범주(종종 교차성이라고 불리는 것)를 모두 사유할 수는 없다고 해도, 사유하지 않음에 따른 정치적 책임은 스스로 질 수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면제되거나 방기될 때, 페미니즘은 통일체가 아니니까 페미니즘에게 다른 모든 소수자를 책임지도록 하지 말라고 했을 때, 이때 페미니즘은 과연 정치학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앞서 나는 성소수자 인권포럼 자리에서 등장한 발언을 언급했다. 그 자리에서 페미니즘에게 모든 ‘소수자’를 책임지거나 챙기도록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언설이 등장했다. 이 언설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것은 페미니즘을 정치학이 아니라 소유권의 문제로 만들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정치학이라면 정치적 책임은 첨예한 문제고, 정치적 책임을 위해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설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누가 누굴 책임지고, 챙기고 하는 문제가 된다면 이것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문제가 된다. 이럴 때 쟁점은 누가 페미니스트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페미니즘이 여성 의제만 다루는 것을 비판하는 입장에 불평불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페미니즘은 특정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고, 특정 자격을 지닌 범주가 독점할 수 있는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모태페미”와 같은 언설도 가능해진다. 페미니즘이 정치적 입장, 인식론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마치 동성애자라는 정체성과 같은 층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론이 된다면, 이때 페미니즘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이 정체성 정치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인식론이자 분석틀이며 저항 정치를 지향한다면 페미니즘은 어떻게 말해지고 인식되어야 할까?
한국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은 젠더를 둘러싼 논쟁의 장을 열었다. 과거에도 몇 번인가 여성 범주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여성 범주와 페미니즘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고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젠더 개념을 둘러싸고 더 많은 비난과 혐오 발화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페미니즘이 정치학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정치적 책임이란 개념을 고민하는 것이다. 정치적 책임이 무엇인지, 혹은 책임이 무엇인지는 그 자체로 논쟁적이기에 자명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입장과 그 입장에 대한 책임을 직접 지는 것이 중요한 태도라면, 페미니즘은 통일체가 아니고 페미니즘에게 모든 걸 챙기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식의 논리/의견이 페미니즘을 더욱더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책임지는 태도에서 저항의 태도 역시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루인. “규범이라는 젠더, 젠더라는 불안: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는 메모, 세 번째” <여/성이론> 23호 (2010): 48-75.
스트라이커, 수잔. <트랜스젠더의 역사: 현대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이론, 역사, 정치> 제이, 루인 옮김. 서울: 이매진, 2016
정현희. “왜 메갈리아는 ‘게이 논쟁’을 필요로 하였는가?” <The 더러운 커넥션: 2016 제8회 LGBTI 인권포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2016. 11-22.
터울. “(아마도)끼스러운 (시스젠더 남성)게이년의 여성혐오와 젠더 수행” <The 더러운 커넥션: 2016 제8회 LGBTI 인권포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2016.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