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까? … 아니.

지금은 그 논의가 좀 줄어든 듯하지만, 한때 블로그에 구글애드 설치하는 방식과 수익이 한창 이슈였던 적이 있다(그땐 블로그가 대세고 트위터를 비롯한 SNS는 그 열풍이 미미하던 시절이다). 구글애드의 클릭 당 단가가 높을 땐, 유명하고 인기 있는 블로거가 월 몇 백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했지만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서버, 호스팅 및 도메인 유지 비용 정도를 보충하려나? 블로그에 구글애드를 설치하는 얘기가 한창일 때 나 역시 잠시 고민했다. 1년 수익이 호스팅 및 도메인 관리 유지 비용만 되어도 꽤나 도움이 될 테니까. 호스팅을 연장하고 도메인을 연장할 때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비용은 적잖게 부담이다. 그래서 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안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안 예뻐서다. 다른 분의 블로그에 구글애드가 있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내 블로그에 광고가 나오는 건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이 지저분함만 아니라면 지금도 구글애드 설치를 고민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고 해서 수익이 나진 않는다. 블로그 자체로는 어떤 수익도 안 난다. 이런저런 직접적 비용과 글을 쓰고 관리하는데 드는 시간 비용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블로그를 운영하는 건 내가 좋아서일 뿐만 아니라 나의 아카이브기 때문이다. “루인 아카이브”. 이 이유가 아니라면 유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일기처럼 이것저것 주절거리기도 하고 논쟁적 이슈에 말을 보탤 수도 있는, 나만의 독자적 공간. 찾아주는 분은 적지만, 그 적은 분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공간. 이런 이유로 이곳을 유지하고 꾸려간다. 내가 죽어도 이곳이 계속 유지되길 바라고 있고.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도메인과 호스팅을 5~10년 정도 기간으로 연장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이 바람은 언제나 꿈으로 그친다.)
블로그에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아니, 블로그가 아니라 이런저런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매달 한 편, 혹은 석 달에 두 편 정도의 논문을 쓰고 그 글을 유료로 판매한다면 그 수익으로 나는 먹고 살 수 있을까? 1초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글이 유료로 구매할 정도의 매력이 있는가와 별도로 트랜스젠더 이슈의 글을 구독하는 독자 자체가 매우 적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필요한데 소논문 분량의 글 한 편으로 100만 원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 편에 얼마를 책정하면 될까? 이를 위해선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있고 공부하는 사람이 몇 명 정도인지를 먼저 가늠해야 한다. 일단 이런저런 농담을 통해 유추하건데 많아야 100명 남짓. 트랜스젠더가 그 정도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글을 찾아 읽고자 하는 독자를 과하게 많이 잡아서 100여 명. 그 중에서 내 글을 굳이 찾아 읽을 사람은 당연히 일부다. 그럼 글 한 편의 가격은? 100만 원을 채우기 위해선 글 가격이 올라가야 하고 가격이 올라가면 구매할 사람은 더 줄어든다.
맞다. 글 가격은 그 만큼 저렴하다. 글을 쓰는데 드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글의 가격은 매우 싸다. 이를테면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다룬 나의 논문 “캠프 트랜스”를 일만 원에 판매한다면 몇 분이나 구매할까? 단행본도 아니고 논문에 일만 원이라면, 나 역시 망설인다. 하지만 외국 학술논문사이트에서 논문 한 편에 책정하는 비용는 대충 계산할 때 2~3만 원 수준이다. 학교 도서관을 통해 무료인 것처럼 다운로드하지만 한 편 당 비용은 상당한 편이다. 그리하여 다시 고민하기를, 나 같이 하급 혹은 비루한 사람의 글 말고, 매우 저명하고 그 질을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논문이라면?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문학동네, 자음과모음처럼 좀 규모가 있는 출판사가 아닌 이상 출판사에서 책정하는 원고 가격 역시 저렴하다. 어떤 잡지는 게재 원고에, 분량과 상관없이 5~10만 원을 책정하고 어떤 잡지는 원고료 자체가 없다. 한국에서 글,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의 노동에 부여하는 가격은 이렇다. 신경숙처럼 기본 판매 부수가 있어, 계약금만 억대라는 극소수의 저자를 제외하면, 글로 먹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일을 하다보니 글을 쓸 시간이 줄어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자주, “글을 쓰기 위해 로또라도 해야”라는 농담을 한다.
문학창작자도 아니고, 학제에서만 생활하는 연구자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글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 짧게 쓰려고 한 서두가 길었다. <아이즈>에 올라온 특집기획을 읽다가 떠오른 단상이다.
“대한민국 콘텐츠 잔혹사” http://goo.gl/9u1oL
웹툰과 그림, 음원 중심으로 논의를 해서 아쉽지만 그래도 가슴을 친다. 시리즈 중 “창작 자영업자 십계명”( http://goo.gl/DIwvC )은 두고두고 읽을 글이다. 이미 많은 분이 읽으셨겠지만 다양한 형식의 창작으로 먹고 살고자 하는 분이라면 꼭 읽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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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종종 드는 고민은, 어찌하여 블로깅은 자기 홍보수단으로, 그리하여 당연한 무임노동으로 인식되는 걸까? 불만이란 뜻이 아니라 그냥 궁금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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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기존 출판 논문을 유료로 판매하겠다는 건 아니다. 난 여전히, 단행본 형태가 아니라면 소논문 분량의 글이라면 무료로 배포할 수 있길 바란다. 무료로 배포할 수 있길 바라면서 동시에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생득(타고남) vs 선택, 논쟁 메모

*말 그대로 논쟁적 지점이 있는 메모입니다.
트랜스젠더, 바이, 동성애자 등이 타고나느냐 선택이냐라는 논의 구도에 붙잡혀 있는 이상 다른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즉, ‘생득 vs 선택’ 논쟁은 이성애규범적, 이성애중심적 사유체계지 트랜스젠더, 바이, 동성애 등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방식이 아니다. ‘생득 vs 선택’ 논쟁은 그리하여 기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을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마치 트랜스젠더 등을 포용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쇼(show)에 가깝다.

커밍아웃, 부모에게

어제 쓴 글에 이어서…
내가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애당초 커밍아웃은 내가 결정할 문제지 다른 누군가가 하라, 하지 마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매우 순진한 언설 같아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행위는 특정 범주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차별이나 편견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덮어씌움과 같다. 트랜스젠더에게 커밍아웃을 요구하며 네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니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 아니냐라는 말은 결국 모든 책임은 트랜스젠더에게 있다고 말함과 같다. 트랜스젠더라고 주변에서 욕하는 것도, 여성답지 못하다 혹은 남성답지 못하다고 아무나 함부로 지껄일 수 있는 것도, 법적 제도가 없는 것도,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잘 모르는 것도, 다른 모든 것도 트랜스젠더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함과 같다.
누군가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차별하는 건 트랜스젠더 때문이야”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한 사람을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변하기 위해선 네가 커밍아웃을 해야 해”라고 말하면 많은 이들이 쉽게 수긍한다. 슬픈 일이다. 앞의 말과 뒤의 말 사이에 인식론적 차이는 거의 없다. 커밍아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커밍아웃이 모든 일을 해결할 궁극의 해법이 아니란 얘기다. 커밍아웃은 그저 시작일 뿐이며 그것도 시작하는 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기획에 많은 힘을 쏟는다면, 비록 유명인사의 커밍아웃이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주체만 힘들 뿐이다.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오랜 시간 골몰했다. 여전히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못 찾고 있다. 무슨 뜻이냐면, 나는 ‘활동가라면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가 웃기다고 믿는다. 부모에게 커밍아웃 하는 일이 가장 의미있는 커밍아웃이라고 의미 부여 하는 행위에도 얼마간 불편함을 느낀다(가장 쉽지 않은 일이란 점엔 동의한다). 활동가라면 부모에게 당연히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거나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진정한 커밍아웃이란 언설은 한국의 규범적 가족제도를 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말하는 가족 가치를 비이성애-트랜스젠더 실천에도 고스란히 이식하겠다는 기획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식의 언설을 들을 때면 속으로 혈연가족제도가 그렇게 좋으냐고, 소중하냐고 되묻곤 한다. 소심하여 속으로만 구시렁거리지만…
다른 한편, 부모는 나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아야 하는 존재인가? 부모는 나와 친밀한 존재인가? 나의 경우엔 이 질문에 부정적이다. 나는 부모 누구에게도 내가 사는 방식을 얘기하지 않는데 이것은 내가 부모와 어떤 특별한 친밀감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작년 어느 시점부터 매일 아침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안부를 묻고 있지만 나와 어머니의 친밀감은 딱 여기까지다. 나는 그 이상을 어머니와 혹은 부모와 나눌 의지가 없다. 그렇게 친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데 굳이 왜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하지? 내가 부모에게 혹은 원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건, 그들과 친밀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것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친밀하지 않음에도 원가족은 내게 많은 것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 피곤함, 고단함 때문에 원가족에게만은 커밍아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농반진반으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건 농반진반이고.)
커밍아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지만, 커밍아웃 하나로 뭔가 엄청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아도 관련 이슈에 상당히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지만 어떤 이슈에 큰 기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커밍아웃 했다는 것만으로, 소위 대사회적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만으로, 부모나 원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만으로 기고만장하다면 그건 가장 부정적 용법으로서 커밍아웃 페티시일 뿐이다(다양한 페티시가 있는 1인으로서 이런 표현이 상당히 불편하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