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도살, 폭력성, 페미니즘, 계급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동물을 죽이는 행동이 어떤 폭력성의 발현이라는 논리는 정당한 것일까? 이것은 타당한 논리일까? 육식을 하면 사람이 더 폭력적이고 채식을 하면 사람이 선하다는 식의 언설이 있다.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런 언설은 꽤나 만연하다. 만약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폭력적 행동이라면 가사노동은 폭력적 실천이란 이상한 논리가 가능해진다. 음식을 만드는 여성 젠더 역할은 폭력적 행위라는 논리도 가능하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가능하다면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은 충돌하는 정치학인가? 하지만 적잖은 페미니스트가 생명 윤리를 이유로 채식을 고민하고 채식주의를 얘기한다.
여성이 생선이나 어류를 구매하고 죽이는 일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제된 성역할이지 여성의 폭력성을 표현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하는 행동이란 뜻이다. 이런 해석은 정말 여러 가지로 문제다. 여성 중 생선이나 어패류를 좋아해서 직접 요리하는 일은 없다는 걸까? 대행업무라고 해서 책임감이 없다고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남성성과 폭력성을, 육식 행위와 폭력성을, 생명 살해 행위과 폭력성을 단순하게 등치시켜선 안 되는 찰나다. ‘모순’이나 ‘아이러니’는 등치해선 안 되고 전제가 잘못 된 것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발생한다. 그리고 육식 행위는 폭력적이고 채식을 여성성/여성적 사유로 연결하는 행위는 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고 강화할 뿐이다.
도살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살 행위는 특정 계급의 역할이다. 조선시대엔 정말 천한 일이고 지금도 도살행위가 우대받거나 사회적으로 권장받는 직업은 아니다. 도살을,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폭력성과 붙인다면, 특정 계급에 대한 혐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은 폭력적이다라는 식의 인식과 곧장 결합되면서 계급 혐오/계급 편견를 재생산한다. 즉 채식 행위에 어떤 윤리, 비폭력성을 붙이거나 육식 행위에 비윤리적이거나 폭력적 속성을 붙이는 행위는 결국 특정 계급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논리에 가깝다. 거대 목축업을 하는 건 거대 자본의 일이긴 하지만, 직접적 도살이 상층 계급의 일은 아니란 점에서 도살, 생명 살해 행위를 폭력적 실천으로 재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다른 말로 채식을 윤리, 폭력성 등과 연결해서 논하는 행위는 여성 혐오, 계급 혐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그러니 누가, 어떤 인식론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채식에 윤리와 비폭력성을 붙이려 드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런 논리가 어떤 지배 질서, 지배 규범을 재생산하려고 하는지 탐문해야 한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

육식, 채식, 그리고 생명에서 음식으로

작년 추석이었나… 부산에 간 김에 친척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메뉴는 친척집 근처 낚지볶음이었나 낚지가 들어간 탕이었나…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낚지가 들어가는 음식이었다. 우선 양념장과 채소가 들어간 냄비가 나왔고 불을 올려 가열했다. 양념이 끓을 즈음 점원은 다른 통에 담은 낚지를 가져왔다.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낚지를 끓는 냄비에 담았다. 낚지는 뜨거워서 버둥거렸고 점원은 익숙한 듯 집게로 꾹 누르며 낚지가 죽길 기다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끔찍하단 듯, 차마 볼 수 없는 현장이라는 듯 눈을 가렸다. 낚지가 죽고 냄비 뚜껑을 덮자 사람들은 얘기를 계속했다. 낚지가 다 익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낚지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잘랐고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와 함께.
낚지는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생명에서 음식으로 변해갔다. 그 과정은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에서 ‘맛있는 먹거리’로 변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낚지의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잘 익은 낚지를 맛있게 먹었다. 이 장면을 지금 다시 떠올리다가 뒤늦게 깨달았는데.. 내가 게를 못 먹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땐 채식을 할 때가 아니었다. 채식을 고민할 때도 아니었다.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은 그 언젠가, 집에 꽤 많은 꽃게가 생겼다. 엄마는 이 꽃게를 삶기 위해 커다란 솥에 물을 올렸고 적당히 간을 했고 끓는 물에 꽃게를 넣었다. 아닌가? 적당히 간을 한 물과 꽃게를 함께 냄비에 넣고 불을 올렸던 것도 같다. 그리고 냄비에서 수증기가 올라올 때 익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장 위에 있던 꽃게 몇이 탈출을 시도했다. 살아 있는 꽃게가 가득한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탈출하려는 꽃게의 모습도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날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땐, 낚시에 따라가선 갓잡은 생선을 바로 회 뜨는 모습을 봤고, 그 회를 맛있게 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꽃게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삶은 꽃게의 살을 발라 먹는 걸 좋아한 나는, 그날 이후 먹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글이 아니다.
마트나 재래시장 등에 장보러 갈 때면 종종 각종 채소나 과일이 한가득 쌓인 모습을 본다. 조금은 시든 채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냄비에서 죽어가던 낚지, 큰 솥에 담긴 꽃게를 떠올린다. 마트에 진열된 채소는 이미 죽은 걸까,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걸까?
낚지가 뜨거운 물에서 살기 위해 혹은 고통스러워하며 꿈틀거리는 순간과 채소가 조금씩 시들어가는 순간. 이 두 순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겐 차이가 없다. 둘 다 죽어가는 생명의 모습이다. 생명에 위계가 없다면 채식이 유난히 윤리적일 이유가 없다. 채식을 한다고 우월할 이유도 없다. 채식의 윤리성을 입증하기 위해 생명의 위계를 만드는 건 웃긴 짓이다. 그래서 채식을 논하는 많은 논리가 공허하다 싶을 때가 많다. 공감이 안 될 때는 더 많고.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저 윤리나 위계로 무언가를 설명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끔찍함의 전시가 아니라 어떤 친밀감, 덜 끔찍함으로 채식을 설명할 수는 없는 걸까 싶기도 하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

이불호흡고양이

장마로 창문만 열면 집에 물이 드는 날입니다. 덥고 습한 나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요. 여느 고양이는 집에서 가장 시원한 곳에 누워있다고 하지요. 어떤 고양이는 화장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고 어떤 고양이는 현관문 앞에서 떠나지 않고.
바람 역시 여름엔 각별하게 행동합니다. 굳이 제가 외출하지 않아도, 집에 있을 때면 각별하게 행동합니다. 그 행동이 귀여워 그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는데요.. 오랜 만에 고양이 사진도 올릴겸 바람의 유난히 귀여운 사진을 올립니다. 바람이 여름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아웅.. 귀여워라.
정말 예쁘지 않나요?
D는 참이 이러는 모습을 보고 보아고양이라고 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