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고양이 이야기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Rica, the Cat 블로그를 운영할 당시였다. 리카를 내게 분양한, 길고양이 리카를 임보하셨던 분이 내게 물었다. 출판사에서 출판하자는 연락이 안 왔느냐고. 그럴리가 있나. 당시 고양이 블로그는 방문자가 5명 남짓이었다. 아니, 그보다 출판을 고민할 정도의 매력과 지명도가 없었다. 알다시피 한국에서 고양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작가는 여럿 있다. 내가 카페 활동을 하지 않고, 고양이 블로그를 찾지 않으니 잘은 모르지만 고양이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사람 역시 상당할 것이다. 고양이와 살며 겪는 성찰이나 어떤 고민을 탁월하게 쓰는 사람도 여럿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고양이와 관련해선 전문가도 넘친다. 웹툰에 고양이와 관련해서 조금만 안 좋게 그려져도 댓글이 난리나고 별점테러가 일어난다. 이런 웹에서 나의 고양이 블로그가 누군가의 주목을 받을리 없다. 고양이 블로그를 한창 운영할 당시엔 이곳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우연히 들리거나 해서 알게된 소수의 사람만 찾는 곳이었다.
비슷하게… 언젠가 세미나에서 어느 고양이 이야기를 들었다. 트위터의 유명 고양이라고 했다. 상당한 미모로 많은 이들을 홀리고 있다고 했다. 이런 것, 나와 상관없는 얘기다. 나의 고양이는 나를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고, 이곳에 들리는 분들만 알고 있다. 특별히 유명하지도 않다. 내가 쓰는 고양이 관련 글은, 그저 내가 쓰는 다른 많은 글처럼 이런저런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혹은 내가 하는 여러 고민이 고양이와 살며 겪는 경험과 겹치는 찰나를 기록하는, 그저 흔한 기록일 뿐이다.
이곳이 변방의 이름 없는 블로그고, 나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듯, 나의 고양이 역시 세상에 무수히 많은 고양이 중 한 마리고 아는 사람 역시 매우 적다. 고양이카페와 같은 형식의 커뮤니티에서 나는 존재감 자체가 없다. 그러니 나와 내 고양이의 삶은 그저 흔하디 흔한, 주목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더구나 사진을 잘 찍어, 사진만으로 혹할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고양이와 관련한 어떤 글을 쓴다면 그것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고 내겐 기억을 기록하며 추억을 쌓는 행위에 불과하다. 내겐 딱 이 정도의 의미다.
하지만 내겐 이런 의미여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겐 그 의미가 다른가보다. 혹은 이런 이유로 나와 내 고양이 이야기는 어떤 다른 지점을 점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나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 나와 나의 고양이 바람

인간도 동물이니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해서 얘기하면, 난 인간과 비인간 간에 위계가 없다고 믿지 않는다. 없을리가 있나. 생명의 동등함은 지향하는 가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인간과 비인간의 생명이 동등하다면 지금 이런 글 자체를 쓰지 않겠지.
바람과 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날 집사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내가 서열 상 아래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서열 상 더 위에 있다는 뜻이다. 바람의 생활방식에 내가 깊이 개입하고 있으며 나의 노동이 없다면 바람의 삶이 위험할 수 있다. 어느 날 내가 미쳐서 혹은 다른 어떤 독한 이유로 바람의 목숨을 끝내야겠다고 작정하면 그렇게 못 할까?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집사로 사는, 고양이를 숭배하는 사람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바람의 혹은 집에 사는 고양이의 안위는 온전히 집사를 자처하는 사람의 ‘선한 마음’에 달려있다. 정말 위험하고 또 불안한 상황이다. ‘선한 마음’ 혹은 애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고양이의 삶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실제 적잖은 고양이가, 집사의 선한 마음이 끝남과 동시에 버려지고 거리 생활을 시작한다. 집에 사는 고양이의 생사여탈권이 집사에게 있다는 건, 집사의 선한 마음 혹은 책임감에 있다는 건, 둘의 관계가 결코 동등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양이를 마냥 숭배할 수도 없고 좋게만 그릴 수도 없다. (그래서 “개와 토끼의 주인”이란 웹툰은 소중하다.)
그렇다면 ‘선한 마음’ 혹은 ‘책임감’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하다고, 정말 사랑하니까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고 이 위계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어떻게 다시 고민할 수 있을까? 인간이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 인간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독점되어 있다고 말해봐야 별 의미는 없다. 이런 식의 언설이 통할 거라면 이 지구는 이미 부처님 뱃살이었겠지. 설득하지도 않고, 동정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관계를 다시 사유할 수 있도록 흔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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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일과 관련한 고민 메모입니다. 혹은 답장은 아니지만 답장과 비슷한 성격의 글이기도 합니다.

죽음으로 관계를 이야기하기: 나와 리카 고양이

어떤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을 겪는다는 건, 내가 이 생명과 혹은 이 존재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이제까지 무엇을 함께 하겠다고 하면서도 미뤘는지, 우리의 관계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동시에 이 사회에서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인식되거나 명명되는지를 깨닫는 시간이다. 특히 특정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해당 국가의 구성원으로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도가 특정 관계에 규정한 어떤 제약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행복할 때, 소위 건강하다고 말할 땐 알 수 없다. 아플 때 그리고 죽음을 겪을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그랬다.
어떤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을 겪는다는 건, 애정의 고단함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함께 무언가를 적극 나눌 수 있을 땐 상대가 아파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상대와 어딘가를 함께 가고 싶은데 상대는 그럴 수 없을 때… 그리고 상대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긴장감, 그런데도 어떻게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울 수밖에 없다. 피곤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존재를 돌볼 수 있다는 건 내가 어떤 경제적 상황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병원비건 간병비건 뭘 해도 돈이 든다. 모든 게 돈이다. 사랑하니까 감수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해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다. 그런데 돈이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돈이 있어도 앞서 말한 괴로움과 피곤함은 남는다. 바로 이 순간 내가 상대와 어떤 삶을 나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와 상대는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있다.
눈치챘겠지만 나의 고양이 리카 이야기다. 리카가 조금씩 삶의 끈을 놓는 시간, 나는 참 멀리 있었다.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지 못 했다는 사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납득이 안 된다. 이게 문제다. 그때 상황을 내가 납득해야 하는데 나는 그 당시 내 행동을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때 있던 일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그때 꼭 그래야 했을까, 그때 나는 좀 다르게 행동할 수 없을까? 그때 나는 도망치는 것 말고 다른 행동을 할 순 없었을까? 그런데 지금이라면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사랑한다고 믿지만 나는 정말 리카를 사랑했을까? 우리는 아니 내게 리카는 어떤 존재였을까? 우리는 어떤 관계였을까?
그래서 관계와 관련한 얘기는, 죽어가는 생명을 두고서 ‘이렇게 살려둬도 괜찮은지, 안락사를 시도함이 옳은 건 아닐까’를 갈등하는 찰나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삶을 나눌 땐 뭐든 좋을 수 있다. 죽어가는 시간, 아픈 시간은 관계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여기에 이 사회에서 사람과 고양이가 맺는 관계의 의미도 드러난다. 너무도 멀었던 화장장부터(고양이 화장장이라 멀었다기보다 죽음 자체가 삶의 영역에서 너무 먼곳에 위치한다), 사람이 죽었다면 며칠 알바를 쉴 수 있었겠지만 고양이여서 그러지 못 했던 상황까지. 삶의 곳곳에 배치된 죽음의 위계를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의 위계는 관계의 위계며 생명의 위계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죽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만나서 죽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죽음에서 만남의 시간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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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일과 관련한 고민 메모입니다. 혹은 답장은 아니지만 답장과 비슷한 성격의 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