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집합은 그 자신의 완전성 혹은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는 상태인데, 전체 집합의 부분 집합은 무모순 상태일 수 있는가에 대하여…
트랜스혐오가 아니라 여성혐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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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이 결국 등록하지 않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뭔가 몸 속에 있던 끈이 하나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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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다. 그냥 누군가가 싫다고, 특정 집단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스스로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인지 (정확하게든 어렴풋하게든) 알 때 자신의 바로 그 수치스러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는 것을. 그냥 싫으면 싫다고, 혐오한다고, 징그럽고 끔찍하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것이 뭔가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착각할 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논리라는 것이 지금까지 자신의 혹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치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묻고 싶다. 도대체 왜 그런 쓸데 없는 고집으로 타인을 죽이려고 하는가를. 그런 논리를 펼치고 누군가를 추방하면 즐겁고 행복한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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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공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이 사건을 가장 간결하게 정리해보자면, 원래 비트랜스여성만 입학할 수 있는 공간에 트랜스여성이 입학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을 문제로 만듦으로써 이 학교에 입학하고 이 학교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성격을 다시 규정한 사태다. 여대니까 당연히 여성만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은 심각한 현실 오도다. 여대에는 이미 많은 트랜스젠더퀴어가 다니고 있다. ftm/트랜스남성이 있고,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mtf/트랜스여성이 다니고 있다. 그러니까 여대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젠더 범주의 존재들이 학교를 다니고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이미 여대를 다니고 있는 많은 트랜스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다. 정당하게 합격한 트랜스여성을 추방하는 행동을 통해 현재 여자대학교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구성원의 젠더 범주를 멸균하듯 규정해버렸다.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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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래디컬)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사이의 대립, 혹은 1020 세대 페미니스트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잘못된 방식일 뿐만 아니라 여대와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재생산하는 데 적극 협조할 뿐만 아니라 방조한다. 일부 여대의 지극히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여론을 모으고 결국 트랜스젠더퀴어의 입학을 막았다고 해서 그 랟펨들을 악마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사건을 사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대립구도를 만들 뿐이다.
여대,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퀴어를 대립시키는 방식의 언설 구조는 결국 이 사회가 어떤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누락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사태가 랟펨과 트랜스 사이의 문제일 뿐 나머지는 아무런 상관없거나 단순 지지자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발급한다. 다른 말로, 이 사건을 기회 삼아 (트랜스를 단 한 번도 지지한 적 없음에도) 페미니즘은 혐오를 만드는 집단이라며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이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를 논평자, 재판관으로 만든다. 마치 ‘나는 중립적으로 이 사건을 평가할 수 있어’라는 바로 그 태도가 지금 이 사태를 만들었다.
이 사건은 이원젠더체제를 만들고 유지하고 이 체제를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공모해서 발생했고 이를 통해 트랜스를 추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극소수의 랟펨을 비난하고 악마화하는 것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존의 가부장제 질서, 이원젠더체제, 이성애규범성, 비트랜스규범성,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는 문화 등은 안전하게 유지될 뿐이다.
05
랟펨에서 나온 트랜스혐오 논리 중 가장 곤혹스러운 표현은 생물학적 여성이다. 트랜스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어서 여성이 아니고(남성이고) 여대에 입학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생물학적 여성은 (최소한)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등장하면서 가장 많이 문제 삼은 개념이다. 남자는 원래 이렇고 여자는 원래 저래, 남자는 원래 음식을 만들 줄 모르고 여자는 원래 가사 노동을 잘해, 남자는 원래 아이를 못 봐, 여성이라면 당연히 모성이 있는 것 아니냐와 같은 언설이 모두 생물학적 여성/남성을 통해 구성되는 논리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말은, 생물학과는 무관한 말인데, 마치 여성의 운명, 행태, 성격은 염색체에 규정되어 있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XX염색체에 설거지 잘 하는 능력이라도 적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대학에서 생물학을 배우며 염색체에 이런 정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없다). 그리하여 여성이 할 수 있는 일,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연화한다. 동시에 이 말은 성폭력 또한 자연화하는 대표적 언설인데, 남자는 원래 성욕이 많고 못 참는다는 발언이 바로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언설은 페미니즘에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개념이며, 페미니즘에서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언설은 그것이 비판받을 때만 이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를 추방하기 위해, 트랜스를 적대하기 위해 이 논리를 펼치는 모습은 매우 당혹스럽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사건이 트랜스 혐오 사건이 아니라 일부 페미니스트(랟펨)에 의한 여성 혐오 사건으로 설명하고 싶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논리 자체가 여성 혐오다.
06
여성 의제를 우선 다루겠다는데 왜 비난하냐는 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우선할 수 있는 여성 의제, 보편적 여성이 누구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이것은 모든 여성을 단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가진 집단으로 가정하고 결국 가부장제가 ‘여성’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바로 그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무엇보다 여성 우선이라는 말은 문재인이 말한 “나중에”와 같은 논리이자 태도다. 트랜스 의제, 퀴어 의제는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로 추방하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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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를 둘러싸고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중, 불안이 있다. 여성의 불안은 이해한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예의상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로 트랜스로 인한 여성의 불안을 이해한다고, 있을 수 있는 불안이라고 말한다. 오래 활동한, 랟펨에 분노하고 트랜스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성 공간에 트랜스가 들어오면 불안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 역시, 특강 같은 곳에서 불안을 이야기하면 그럴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불안을 왜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트랜스로 인해 비트랜스여성이 불안을 겪을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는 태도는 마치 동성애자로 인해 이성애자가 불안하니 그 불안을 이해해달라는 말과 같다(목욕탕에 동성애자가 들어오면 이성애자가 불안하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으니 동성애자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는가?). 예멘 난민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불안해지니 그 불안도 이해해야 하고, 장애인으로 인한 비장애인의 불안과 불편도 이해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그 누구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트랜스로 인한 불안에는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트랜스를 혐오하는 주장이 어떤 점에서는 정당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지금 사태를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공모한 것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제 나는, 저런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 한다.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한다고 말해주기보다 불안과 안전의 권력, 폭력과 배제의 정치를 말해야 한다.
08
중립은 혐오와 폭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다.
언젠가 당신의 음반을 돌려줄 것이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퀴어 혐오를 적극 비판하고 관련 활동에 적극이었다. 그리고 워마드가 젊은 세대 여성의 투쟁이고 고통을 말하는 행위이기에 충분히 함께 할 가치가 있고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 태도는 그 사람이 정확하게 그 위치에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나는 그 사람이 일베에도 동일한 동정과 연민을 느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일베에 분노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일베도 혹은 한남도 언제나 억울함을 토로하고 어떤 투쟁과 고통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권력자 혹은 혐오 가해자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당한 공격이라고 믿는다. 그럼 왜 그 말은 듣지 않는가? 나에게 워마드의 어떤 행위는 일베와 같다. 워마드 계열이라고 불리는 집단, 혹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집단(나는 그 자처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의 동의가 무슨 상관이겠는가)은 끊임없이 트랜스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조롱한다. 그 발언을 무시하고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당신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그 발언을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나는, 그들의 어떤 활동은 지지함에도 그들과 결코 함께 할 수 없고 그들의 어떤 활동에도 동참할 수 없는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무엇인가? 예전에 노동 운동 하는 사람, 막시스트나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노동해방되면, 뭐만 해결되면 ‘여성 문제’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식으로 최우선의,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의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워마드는 누구와 닮았는가? 그런 워마드 계열이나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참칭하는 이들의 태도에 동참할 수 있거나 연민을 느끼는 당신의 위치는 어디인가? 워마드라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을 가치가 있다며 함께 할 때, 그들이 그토록 조롱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는 집단의 목소리는 들을 여유가 없었는지 묻고 싶다. 나는 당신이 낸 음반을 당신에게 반납하고 싶지만, 나는 당신에게 지금 시점에서 연락을 할 힘이 없다. 슬프고 분노가 치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