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아내다, 트랜스젠더 관련 연극

ftm 트랜스남성과트랜스젠더게이 트랜스베스타잇 관련한 연극이 있어 소개합니다. 🙂
출처:
제목: 나는 나의 아내다 I Am My Own Wife
일시: 2013/05/28 ~ 2013/06/29 // 화수목금 8시, 토 3시 7시, 일 3시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금액: 일반회원 30,000원
::작품설명::
초연의 세계적 작품
브로드웨이, 웨스트앤드 등 모든 시상에서 최고의 상을 휩쓸며 각종 평단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그러면서도 연극이란 장르로 약 1년 동안 브로드웨이 장기공연에 성공한 세계적 작품이다.
논픽션 드라마
이 연극은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살아갔던 CHARLOTTE VON MAHLSDORF 라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가 가지는 시대적 혹은 개인적 특수성,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일반적 가치성 등의 이야기가 그려내는 사실설으로 더욱 깊은 감동을 준다.
1명의 배우가 30인 이상의 역할을 하는 모노 드라마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독특한 소재와 작품성을 바탕으로 그리고 단 한 명의 연기자가 30인 이상의 역할을 연기하는 국내의 대표적 남자배우 모노드라마가 될 것이다.
 
::줄거리::
존은 동베를린의 붕괴 이후 동독에서 근무하고 있던 미국 기자인데 어느 날 '샬롯'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샬롯은 로다라는 이름으로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히틀러가 파워를 갖기 시작할 때 자라났고 나치제제와 독일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 왔던 트랜스젠더였다. 또한 그가 1800년대 독일의 축음기, 시계, 가구 등을 수집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임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존은 이 이야기를 미국에 살고 있는 그의 작가 친구 '도우'에게 들려 주게 되고 도우는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어렵게 여비를 마련하여 독일로 여행을 와 샬롯의 개인 박물관을 방문하여 그를 만나게 된다. 샬롯의 삶의 매혹된 도우는 그(그녀)에게 그녀의 인생에 관한 연극을 만들어 보겠다는 허락을 받고 그녀와의 인터뷰를 시작한다.

뮤지컬 드랙퀸: 패러디, 패러디

지난 주 목요일, 두 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하리수 씨 주연의 <뮤지컬 드랙퀸>을 관람했다는 점이다. 아는 분이 소개해줘서 하리수 씨 공연이 있음을 알았는데 때마침 초대권이 생겨서 미루지 않고 다녀왔다. 결과만 말하면 정말 좋았다. 즐거웠고.
내용은 간단하다. 가게를 닫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정도로 장사가 안 되는 드랙퀸바에서 일하는 드랙퀸(오마담, 소희, 지화자, 에밀리)이 어떤 계기로 홍사장을 만나고 성공한다는 얘기. 이렇게만 요약하면 별 것 없는 듯하지만 깨알같은 재미와 공연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트랜스젠더를 이해하는데 있어 기본 정보와 인권감수성까지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공연이 끝났을 때 ‘추천할 수 있는 트랜스젠더 입문’으로 판단했다. 다시 찾고 싶고.
간단하게 몇 가지만 메모하면..
일단 패러디의 향연이 매력을 더한다. 다양한 패러디가 있겠지만, 어설픔을 어설픔으로 패러디하는 장면은 특히 좋았다. 패러디가 아닌 건 아닐까라는 고민도 있지만, 어설프게 공연해야 하는 장면에선 계속 어설펐고 깔끔하게 공연해야 하는 장면에선 깔끔했다. 이것이 좋았다. 작품 속 드랙퀸 업소 <블랙로즈>가 인기 없는, 뭔가 어설픈 업소란 점에서, 만약 배우의 연기가 매우 깔끔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듯하다.
(물론 어설프지 말아야 하는 장면에서 삑사리가 나기도 했지만..;; )
“나, 해병대 나온 여자야”라는 장면은 꽤나 흥미로웠다. 사건의 갈등을 어떻게 풀까 궁금했는데, 행여라도 갈등 과정에서 눈이 맞아 갈등이 풀린다는 식이면 리뷰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리수 씨가 “나, 해병대 나온 여자야”라고 말하면서 갈등을 풀어가다니.. 하리수 씨가 드랙퀸을 연기했다는 점도 좋았고 또 매력적인 풍경이지만, 해병대라는 대표적 남성공간으로 불리는 곳을 이렇게 패러디하다니!
눈물이 난 곳도 있었다. 드랙퀸으로 혹은 트랜스젠더로 살며 겪는 어려움을 노래하는 과정에서 “네 엄마는 미역국 먹었냐”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고 하리수 씨가 말했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오마담(하리수 역)과 홍사장이 마지막까지 친구로 남은 점 역시 좋았다. 어설프게 연애관계로 만들었다면 싫었을 듯. 너무 진부하지 않나. 깔끔한 친구 관계, 딱 좋았다.
혹시나 갈까말까를 망설인다면 꼭 보러 가시길 권합니다. 인터파크에서 예매하고 있어요.
난 몇 번 더 볼까를 고민하고 있다. <뮤지컬 드랙퀸>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 시기가 참 애매한데 어떻게 할까…

개별 관계에서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권력 행사

사회적 맥락에선 ‘소수자’ 혹은 ‘비규범적 범주’라고 해서 개별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사회적 맥락에선 ‘소수자’지만 개별 맥락에선 ‘권력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와 개별 관계가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구분하기로…)
채식이 그러하다. 몇 주 전 읽은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채식주의자 혹은 비건은 인구의 1% 정도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 나물 음식이 많아 채식하기 좋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나물 반찬에 젓갈이나 멸치다시다, 쇠고기다시다 같은 것이 들어간다. 조개나 멸치로 국물을 낸 된장국도 채식으로 분류된다. 그러니 비건이나 채식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별로 없다. 이런 점에서 비건이 사회적 불편을 겪는 건 사실이다. 사회가 비건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다(때때로 적대적이다). E님의 지적처럼, 잡식하는 사람의 죄의식을 채식하는 사람에게 투사하는 분위기에서 채식은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 비건도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일 순 있다.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라고 해서 개별 관계에서도 그러할까? 이를 테면 친밀한 관계에서, 한 명은 비건이고 다른 한 명은 잡식이라면 권력은 참 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식당을 고르거나 음식을 선택할 때 기준은 거의 항상 비건일 수밖에 없다. 잡식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선택하면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지만, 비건을 기준으로 선택하면 잡식하는 사람도 대충 다 먹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비건의 생활양식에 호응하는 잡식하는 사람의 태도를 음식감수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관계와 권력에 민감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이 관계에선 채식하는 사람이 (반드시 부정적이진 않다고 해도 때때로 일방적)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하고 싶다.
친밀한 개별 관계에서, 특정 한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이 관계를 엮어가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그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어쨌거나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상대방의 어떤 선택 가능성을 차단하는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잡식하는 사람이 비건과의 관계에서 변해가는 삶의 태도, 혹은 비건의 지향점을 위해 잡식하는 사람이 동조해야 하는 상황을 두고, 친밀성이 만든 따뜻한 변화라고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왜 채식하는 사람 혹은 비건은 어떤 변화를 실천하지 않고 잡식하는 사람만 어떤 변화를 실천하는가? 나는 이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정작 내게 어떤 마땅한 대답이 있는 건 아니다. 개별 관계에서 비건이 실천하는/행사하는 권력이 없다고,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는 말만 할 뿐이다. 그리고 내겐 그저 고민만 쌓여간다. 여전히 비건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민은 알리바이용인지도 모른다.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관계에서도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사회적 인식에서 트랜스젠더는 대개 사회적 약자/소수자로 표상된다. 그래서 연애관계나 어떤 친밀한 관계에서 트랜스젠더가 연애파트너인 비트랜스젠더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계속 얘기할 순 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비트랜스젠더 애인에게 떠넘기는 형식이라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관계에서 트랜스젠더가 겪는 어려움은 고려되는데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어떤 어려움은 고려되지 않는다면? 비트랜스젠더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애인이란 위치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이 있는데도 이것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이 관계에서도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약자’이기만 할까? 적어도 이 관계에서만은 트랜스젠더가 어떤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비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의 상황을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은폐된’ 억압을 겪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떻게 트랜스젠더와 사귀느냐’와 같은 사회적 인식이 야기하는 폭력,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어가며 끊임없이 긴장하거나 걱정해야 하는 고민(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트랜스젠더의 어떤 태도에 문제제기하려고 해도 그것이 행여나 혐오발화로 오독/오인될까봐 혹은 트랜스젠더 애인의 삶을 이해 못 하는 무정함/무지로 독해될까봐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상황 등이 있다. 이것은 어딘가에 말하기도 쉽지 않다. 적어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 지점을 말할 담론의 장은 없다. 이럴 때 트랜스젠더인 애인이 비트랜스젠더인 애인의 고민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타자성을 이용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 아닐까?
나는 사회적 억압 이슈를 개별 관계에서 풀어버리는 많은 폭력 중 하나로 위의 고민을 위치 지으며 줄곧 고민을 이어갈 수 있을까? 개별 관계에서, 이것이 사회적 맥락과 동떨어지진 않는다고 해도 바로 이 사회적 맥락 때문에 권력으로 행사될 수 있는 비규범적 지위를 계속해서 고민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이 어떤 알리바이, 혐의를 남겨두기 위한 면피용일까봐 두렵다.